소설리스트

143화. (144/161)

143화.

“여기 있었나.”

“…….”

이실리스의 목소리가 들렸을 것이 뻔한데도 베르타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바람이 불어 둘 사이를 갈라놓았다. 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베르타스의 시선에 이실리스가 떨어지지 않는 입을 떼어 속삭였다.

“아직도 화가 났는가?”

“제가 어찌 폐하께 화를 낼 수 있겠습니까. 나라의 국부에 불과한 것을.”

“베르타스.”

“먼저 가보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정원을 나서는 베르타스를 잡을 수 없었다. 머리를 식히러 나왔던 정원에서 오히려 더 복잡한 마음을 안고 가게 되었다.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나…….’

머리가 복잡했다. 당장 보클로엠의 움직임도 문제였다. 페일러스에 맡겨둔다고 했으나 감시의 시선을 놓은 것은 아니었다.

“슬슬 움직임을 보였다고 했으니…….”

곧 기별이 올 터.

* * *

“언제 움직이실 겁니까?”

“언제?”

“그렇습니다. 언제.”

아직도 양 손목에 이그나르도의 검은 마력을 두르고 있는 보클로엠에게 이베르트가 물었다.

“언제까지 그걸 두르고 계실 요량입니까?”

“이베르트.”

날카로운 시선으로 보클로엠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렇지 않아도 이 마력 구속구는 보클로엠의 치부였다. 마뜩잖은 표정을 숨기지 않으며 눈을 떼지 않았다.

“결계로 가서 마력을 찾으시면 되지 않습니까.”

“라르헨의 결계는 국경에 있는 것이 아니다.”

“네?”

“그 결계는 황궁에 있어. 바로 여기 있단 말이다.”

모르는 사람들이야 라르헨의 광역 결계의 중심이 되는 마법진이 국경 곳곳에 포진해 있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이것은 라르헨의 황족들도 모르는 사실이었다.

마법진을 처음에 만든 보클로엠 그리고 라르헨의 건국 황제만이 알고 있는 사실. 건국 황제는 그 사실을 후손들에게 알리지 않고 죽었다. 때론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여기서 기회를 노려야 해.”

망설이던 보클로엠이 결정을 내렸다. 며칠 동안 라르헨의 황궁에 머물면서 살펴보니 이 제국은 광역 결계가 없어도 충분히 다른 나라를 견제할 수 있는 나라였다.

보클로엠이 이 나라에 결계를 만들어준 이유는 단 하나. 이 제국이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될까 싶어서였다. 마력이 상당히 소진되는 일이었지만 그 당시 보클로엠을 대적할 수 있는 자는 없었다.

‘지금처럼 마력을 빼앗기지만 않았어도…….’

보클로엠이 라르헨의 결계를 노릴 일은 없었을 터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이그나르도의 마법진이 깨졌는데 마력이 돌아오지 않았다. 마법진에 잡혀있던 시간이 오래되어 마력이 소멸된 듯싶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마력을 돌려주는 것이 아닌데.”

이실리스의 마력이 아쉬웠다. 이그나르도의 마법진을 사용하여 이실리스의 마력을 흡수했는데 그 마법진이 깨지자마자 그녀에게로 돌아간 그 상당한 마력. 그게 아까웠다.

본디 마력은 드래곤의 것. 그들의 것을 빌려 쓰고 있는 인간들이었으니 준 것을 돌려받는다고 이상할 일은 없었다.

“지금이라도 다시 해 볼까요?”

이베르트의 말에 보클로엠이 고개를 저었다. 이곳은 라르헨의 황궁이었다. 그녀의 마력을 빼앗는다고 해도 그녀에게 충성을 바치는 마법사들이 있는 이상 오히려 당할 수 있었다.

손목에 구속구가 없었다면 아무렇지 않았겠지만, 이 이그나르도의 마법이 어떻게 작용할지 알 수 없으니 보클로엠은 괜한 분란을 만들지 않기로 했다.

“아니, 문제를 일으킬 필요는 없지.”

“그럼 언제쯤 시작하실 겁니까?”

“곧.”

먼 곳을 바라보는 보클로엠을 보면서 눈을 빛내는 이베르트였다. 그가 보클로엠을 온전하게 차지하는 날도 멀지 않았다. 품 안에 있는 이그나르도의 마력석을 느끼면서 이베르트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지만 보클로엠은 그 미소를 볼 수 없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멀리서 페일러스가 지켜보고 있었다.

‘드래곤이라니.’

그것도 라르헨의 광역 결계를 만든 건국 황제와 관련이 있는 드래곤이라니. 새롭게 알게 된 사실에 혀를 내둘렀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이실리스에게 알려야 했다. 그가 알게 된 사실을. 그러나 자리를 피하려는 그의 머리 위에 별안간 그림자가 드리웠다.

“어딜 가려고?”

이베르트였다. 마법을 통해 그들의 말을 엿듣는 페일러스를 눈치채지 못할 보클로엠이 아니었다. 보클로엠과 연결되어 있는 이베르트도 마찬가지였다. 이베르트가 손가락을 튕기자 페일러스의 몸이 동그란 결계에 갇혔다.

“일단 거기 있어.”

묘한 눈빛으로 페일러스를 바라보던 이베르트가 결계 속에 그를 가두었다. 구체로 형성된 결계를 둥둥 띄운 그가 페일러스를 데리고 별궁 안으로 들어갔다.

“어쩌시겠습니까?”

“라르헨의 황족 같으니 일단 두고 보지. 대충 아무 방에다 데려다 놔.”

“알겠습니다.”

보클로엠의 명령에 따라 이베르트가 움직였다. 결계 안에서 그 결계를 파훼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페일러스의 모습에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정보를 다루는 페일러스의 마력은 그리 강한 편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이베르트의 마법을 파훼할 수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수련을 더 하는 건데.’

“일이 들통난 것 같으니 서둘러야겠습니다.”

“그렇군. 바로 움직이지.”

내일 정도에 결계의 핵심이 되는 진을 찾아가겠다는 보클로엠의 말에 이베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곧이다.

* * *

“페일러스가 잡혀?”

“그렇습니다.”

알뤼르의 말에 이실리스가 탁자를 ‘탕’ 소리가 나도록 내려쳤다.

“그것을 알고도 그냥 두었나?”

“방법이 없습니다. 폐하. 별궁에 결계를 둘렀어요.”

“이대로 당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는 건가.”

한탄하듯 나온 그녀의 말에 알뤼르가 고개를 숙였다. 말로만 들었던 드래곤의 위력을 확인한 그는 허탈함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찌나 촘촘하게 결계를 쌓았는지 틈이 없었다. 마력의 흐름이 자유롭지 않은 곳을 찾아 다른 마력을 흘러 넣어서 마법진을 파훼해야 하는데, 그런 곳을 찾을 수 없었다.

“완벽합니다.”

“드래곤이 괜히 드래곤이 아닌 거겠지.”

감탄하는 말에 이실리스가 덧붙이자 알뤼르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금방이라도 일을 치를 듯 보이는군.”

“그렇습니다. 폐하. 광역 결계를 노리는 것이 틀림없어요.”

“그런데 저들은 왜 국경으로 가지 않지?”

“제가 국경에 가서 살폈으나 광역 결계의 핵심이 될만한 마법진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보이지 않았다?”

“그러합니다. 저들의 행태도 그렇고 국경엔 중심 마법진이 없는 게 아닐까요.”

알뤼르의 조심스러운 말에 이실리스가 생각에 잠겼다.

‘일리 있는 말이로군.’

그랬다. 저들이 광역 결계를 노린다면 결계의 핵심 마법진을 노리는 것이 정해진 수순이었다. 그랬는데 저들은 이 황궁에서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는 것은 이 황궁 안에 핵심 마법진이 있다는 소리.’

대체 어디에 그 마법진이 존재하는 것인가. 평생을 황궁에서 자란 그녀도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 생각에 잠긴 그녀가 계속해서 아무 말이 없자 알뤼르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황궁이 아닐까요?”

“그럴 수도.”

“그렇다면 큰일 아닙니까. 여기서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수색을……!”

“어떻게 수색을 하자는 거지?”

날카로운 이실리스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광역 결계를 노리는 자들이 있다고 떠들기라도 하자는 건가?”

“폐하.”

“어찌하라는 말인가.”

알뤼르가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결심한 듯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알리는 것이 낫겠습니다.”

“알리는 게 나아?”

“그것을 노리는 자들이 있으니 경계를 강화하자고 하면 어떻겠습니까? 이미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범주를 넘어섰습니다. 폐하. 차라리 널리 알려 이게 어쩔 수 없는 것임을 알리소서.”

마력 결계가 없어지면 황제가 그것을 책임져야 한다고 하는 이들도 생길 것이 분명했다. 그런 상황에서 그녀의 돌파구는 단 하나. 이 사건을 공론화하는 것이었다.

귀족들이나 제국민들에게 이것이 어쩔 수 없는 일임을 알리는 것이 최선이라고 말하는 알뤼르의 말에 이실리스의 마음이 기울었다.

“그럼 마력 결계가 없어지는 것을 당연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인가.”

“이미 어찌할 방도는 없습니다. 폐하. 아시잖습니까.”

결계를 세운 드래곤이 마력을 회수하겠다고 나선 이상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알뤼르의 말에 아무런 답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눈치를 살피던 알뤼르가 자리를 뜨려 하자 이실리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그나르도의 마법사를 찾아야겠어.”

그 때문에 요즘 서재에서 두문불출하고 있었다. 그러나 너무나도 거대한 서재는 이실리스가 혼자 찾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그나르도의…… 마법서라고 하셨습니까?”

“무슨 까닭인지는 모르지만, 그의 마법이 저 보클로엠에게 가장 치명적으로 작용하는 것이 분명해. 그러니 마법서를 뒤져서 결계를 지킬 방법을 찾아야겠다.”

“아 그런 방법이 있군요.”

뮤르카 제국에서 있었던 일을 기억해낸 알뤼르가 이실리스를 향해 현명하다 찬양했다. 그를 향해 가볍게 손을 저은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입을 열었다.

“함께 가지.”

“예? 저도…… 말입니까? 황실 마법서고는 황족 외엔 출입이 불가능하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내가 혼자 찾기 어렵네.”

“네?”

“가지.”

이실리스를 따라 황실 서고에 들어선 알뤼르는 그 규모에 압도당했다.

“저쪽 세 번째 책장까지는 내가 다 살폈으니 다음 책장을 살피면 되네.”

“폐하…… 이 많은 것을 혼자 다 하셨습니까?”

“누구에게도 보일 수 없는 것이 이 서고이거늘, 상황이 급박하지 않았다면 내가 자네에게도 보이지 않았을 걸세.”

“이곳에서 본 모든 것을 함구하겠습니다.”

“그래야 할 거야. 그렇지 않다면 내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르니.”

“명심, 또 명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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