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2화. (143/161)

142화.

“알 수 없는 것이라 하지 않았어?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확신하지?”

“대마법사인 나는 알 수 있어. 사람마다 잠재되어 있는 마력이 다르다. 나는 에리카에게서 그걸 보았고, 그렇기에 겉으로 드러난 마력이 없어도 그 아이를 황태녀로 올리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처음엔 아니라고 하지 않았나? 다들 그 아이를 탓할 때, 너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어.”

“그러나 그 또한 가능성일 뿐. 발현은 에리카의 몫. 황태녀의 직위에 있어도 발현하지 못한다면 얼마든지 그 자리를 내놓아야 한다.”

냉정한 이실리스의 말에 베르타스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딸에게 하는 말치곤 너무 야박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야박?”

“그래.”

“라르헨의 황족이라면…….”

“집어치워!”

도저히 더 들어 줄 수 없었다. 단 한 번도 이실리스에게 큰소리를 낸 적이 없는 베르타스가 목소리를 높이자 그녀가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나는 내가 가진 것 중 가장 좋은 것을 주려고 에리카에게 황위를 양도했다. 이실리스. 부모라면 그게 당연한 것 아닌가?”

“베르타스, 그것은…….”

“너도 마력을 빼앗겨 봤으니 알 것 아닌가! 마력이 없는 황족? 아니, 힘이 없는 황족이 당하는 그 무력감, 그 탈력감을! 에리카가 그런 일을 겪어야만 하나? 우리가 그 모든 것을 막아 줄 수 있는데?”

베르타스의 말이 옳았다. 이실리스는 그 모든 것을 막아줄 수 있는 힘이 있었다. 그것은 베르타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라르헨의 오랜 관행은 그녀 혼자서는 꺾을 수 없는 것이었다. 저런 귀족들의 수작을 참아 넘기는 것도 그 이유였다. 제국을 위한다는 말은 참 듣기 좋은 말이었다.

‘제국을 위해서 황족을 이용한다라…….’

영상석에서 들었던 말을 되새기며 이실리스가 베르타스를 향해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다.

“라르헨의 황실은 함부로 재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대제국이기에 저력이 있는 것은 나도 알고 있어. 허나, 내 딸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그건 말이 다르지. 나도 두고 보지는 않겠어.”

“베르타스.”

“라르헨 황실의 일이라 나서면 안 된다고 말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폐하.”

그녀를 향해 정중하게 인사하고 멀어지는 베르타스를 잡을 수 없었다.

“그대와 나의 생각이 다른 것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라르헨의 황족이 아니라면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상황이었다. 이런 일이 생긴 이유는 단 하나 결계 때문이었다.

“내버려 둬야 하는가.”

보클로엠이 라르헨의 광역 결계를 없애기를 바라야 할까. 아무것도 손쓰지 않은 채로 기다려도 될까. 계속해서 드는 생각을 떨쳐내고자 이실리스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녀의 머리 장식이 흔들리고 짤랑짤랑 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조금 정신이 맑아졌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페일러스를 불렀으니 그가 도착할 때까지 할 일이 있었다. 황족만이 들어갈 수 있는 서고에 가서 이그나르도의 마법서를 찾아볼 계획이었다.

황족들의 서고에 없는 책은 없었으니 찾아보면 있을 수도 있다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이실리스가 걸음을 옮겼다.

“하아.”

“괜찮으십니까, 폐하.”

그녀의 한숨에 염려하는 시종장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용히 뒤로 물러나는 시종장에게 손짓했다.

“페일러스가 오면 알리게.”

“알겠습니다.”

“누구도 서고에 들지 못하게 하고.”

“명심하겠습니다.”

서고 앞을 지켜서는 시종장을 조용한 눈으로 응시한 이실리스가 천천히 서고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녀의 키보다 큰 책장을 이리저리 살피던 이실리스가 깨달았다.

“아, 마법을 쓸 수 없군.”

그랬다. 마법을 사용하여 책을 꺼내는 것은 그 책의 위치를 알 때. 이그나르도의 마법서를 찾기 위해서는 일일이 책을 꺼내 살펴봐야 했다.

해가 넘어갈 때까지 이실리스는 이그나르도의 마법서를 발견하지 못했다. 석양이 드리우는 것을 본 이실리스가 문득 생각했다.

“찾으러 올 때가 되었는데…….”

소식이 없는 베르타스를 생각하니 제대로 토라진 듯싶었다. 쉽게 화를 내지 않는 그였지만 한번 화가 나니 그 화를 푸는 것도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마저도 귀여워 보이니 원.”

베르타스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아이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은 마음은 부모마다 같은 것을. 이실리스라고 왜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을까. 당연히 그렇게 하고 싶었다.

‘내가 평범한 이였다면…….’

당연히 그렇게 했을 거다.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을 아이에게 주려고 노력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녀는 라르헨의 황제.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의 결정 하나하나에 나라의 명운이 달려있었다. 그렇기에 아무리 사랑스러운 아이라도 그 아이에게 모든 것을 내어줄 수 없었다.

“지고의 위치에 앉는다는 것은 그런 것인걸.”

그녀의 입 밖으로 나온 말이 아스라이 허공에 흩어졌다. 그녀의 자조 어린 말을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 *

이실리스와 베르타스의 냉전은 계속되었다. 단단히 화가 난 베르타스는 이실리스를 마주하려고 하지도 않았고, 그것은 이실리스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시간이 없었다. 황제에게 주어진 개인 시간은 침소에 들 때뿐이었다. 그 외의 시간은 국정을 보는 시간이었다. 그만큼 바쁜 그녀에게 베르타스가 직접 찾아오지 않는다면 그의 얼굴을 볼 시간도 없었다.

‘그렇다고 침소에도 들어오지 않는다니.’

해도 해도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 그녀의 마음을 이해해주던 베르타스였기에 더욱 서운했다. 황제로서 그녀가 가지고 있는 짐을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

“폐하. 대공께서 오셨습니다.”

“생각보다 늦었군. 빨리 올 줄 알았는데……. 들라 하라.”

부르고 나서 한참의 시간이 지나서야 도착한 페일러스였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편안한 차림이 아니라 한껏 꾸민 성장 차림을 하고 온 페일러스를 보면서 이실리스의 눈가가 움찔했다.

‘저것은 무엇인가.’

설마 제 어미의 죄를 없던 것으로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겠지.

“일어서라.”

“…….”

이전 같았으면 왜 불렀냐느니 하면서 장난스럽게 말을 걸어왔을 그가 무거운 분위기를 풍기는 것을 보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래도 어쩌겠나. 페트라가 저지른 일은 역모는 아니었으나 그에 준하는 죄.

“페일러스, 내가 그대를 부른 이유를 아는가?”

“압니다.”

“그렇다면 그 사실을 그대도 알고 있었나?”

“저는 몰랐습니다.”

“그 말을 입증할 증거는 있는가?”

“……. 증거는 없습니다.”

“그럼 내가 무엇을 보고 그대를 믿어야 하는가?”

그녀의 물음에 페일러스가 눈을 감았다. 이미 이실리스는 결정을 내렸다. 페일러스에게 황궁으로 오라고 한 것도 그 결정을 통보하기 위한 것이지 대화를 나누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 모든 사실을 파악한 페일러스가 입술을 짓씹었다.

“폐하, 어머니를 살려주십시오.”

“그대의 어머니를 살려두기엔 일이 너무 커졌네. 다른 것보다 황손을 좌지우지하겠다는 것은 이 나라의 섭정을 원하는 것. 역모에 준하는 죄일세.”

“나라를 위하는 마음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지 결코 다른 의도는 없었을 겁니다.”

“진정으로 그렇게 생각하나, 페일?”

친애하는 사촌을 부르는 이실리스의 물음에 페일러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울 듯한 그의 표정에 이실리스의 마음도 좋지 않았다.

“내가…… 한 번만 봐 달라고 하면 안 되겠지?”

“나는 이미 여러 번 아량을 베풀었다. 그 사실을 너도 알지 않나.”

“알아, 알아서……!”

더는 말할 수 없다는 그 말을 페일러스는 속으로 삼켰다. 이실리스가 그들 모자를 많이 봐주었다는 것을 왜 모르겠는가.

“페일. 나는 기회를 주었어.”

“이실리스.”

눈물을 흘리는 그에게 위로의 말을 건넬 수 없었다.

“황궁 밖으로 나가지 말게.”

“볼모가 되라는 소리인가?”

“너의 어머니가 더 움직일 빌미를 주지 말라는 소리야.”

죄가 더 깊어지면 이실리스도 페트라를 죽일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사촌이 저렇게 말하는데 죽이는 것은 아니어도 다른 벌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페일러스는 그녀의 가장 아끼는 사촌이니까.

‘죽이지 않아도 마력을 없애거나 다른 방법을 쓸 수 있으니까.’

페일러스는 죽이지만 않으면 된다고 했다, 죽이지만 않으면. 

희미하게 미소짓는 이실리스를 보던 페일러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서 머물면 되지?”

“별궁.”

“그에 관해 할 말이 있어.”

이실리스는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페일러스에게 설명했다. 그녀의 말을 듣던 페일러스가 놀라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지금 이게…… 모두 사실이야?”

“그래.”

단박에 짧아지는 말을 들으면서 이실리스가 웃었다. 이제야 제가 아는 페일러스로 돌아온 것 같았다.

“내가 이 일을 제대로 해결하면 나에게 주는 상은 뭐지?”

눈을 반짝이는 페일러스의 얼굴은 기대로 가득 차 있었다. 이실리스가 이런 말을 꺼낸 것은 그에게 기회를 주겠다는 방증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목숨은 거두지 않겠네.”

“무슨 일이 있어도 이루겠어.”

결의에 찬 얼굴로 알현실을 나가는 페일러스의 뒷모습을 보면서 쓴웃음을 던졌다. 그녀가 요청한 일은 이룰 수 없는 일이었다. 드래곤을 막아달라는 말이 가당키나 한 것인가.

“광역 결계를 지킬 방법을 알아 오라니.”

‘나도 참…….’

상반되는 마음을 어찌할 수 없었다. 페일러스가 실패했으면 좋겠다 아니, 성공했으면 좋겠다. 오락가락하는 마음을 다잡기가 힘들어 이실리스는 알현실에서 일어났다. 복잡한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정원으로 가겠다.”

“모시겠습니다.”

그녀를 호위하는 기사가 움직이자 마법사들도 함께 움직였다. 베르타스가 없이 정원에 나가는 것은 꽤 오랜만이었다.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만끽하며 걸으니 머릿속이 조금 맑아졌다. 안색이 약간 밝아지는 그녀를 본 호위 마법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좋아 보이십니다, 폐하.”

“그러한가.”

“그렇습니다.”

요 며칠 안색이 좋지 않아 걱정했다는 충성스러운 신하의 말에 이실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 천천히 걷는 그녀의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덩치가 커다란 남자가 정원 한가운데 있는 의자에 앉아 멍하니 하늘을 보고 있는 모습.

‘베르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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