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1화. (142/161)

141화.

“정확히는 대공이 아니라 그의 어머니입니다.”

“…… 또 그녀란 말이냐.”

페트라 라르헨. 선황의 동생이자 아니, 엄밀히 말하면 타르토스의 동생이자 선대의 황족 중 유일하게 목숨을 부지한 그녀. 제가 가진 황위를 아니, 정확히 말하면 황권을 탐하는 여자였다. 황제의 위를 노렸으나 선황에게 밀렸다.

“보고하라.”

이실리스의 말에 알뤼르가 서류와 영상구를 내밀었다. 황위 다툼에서 밀려난 그녀는 페일러스를 황위에 올리려고 시도했으나 강력한 마력을 가진 이실리스에게 제대로 힘도 쓰지 못하고 밀려났다.

‘페일러스도 황위는 싫다고 했지.’

그가 강력하게 의사를 표현했기에 그 기세가 줄어들었다. 그 이후 이실리스의 정책에 귀족들이 힘을 쓰지 못하자 조용히 사라졌던 이였다. 그랬는데 지금에 와서 뒤통수를 치다니.

“아주 오랫동안 준비했던 것 같습니다. 폐하께서 어릴 적부터요.”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언가? 황위?”

“아닙니다. 황권에 준하는 권리. 꼭두각시 황제를 원합니다.”

듣자 하니 가관이었다. 표정이 굳어지는 이실리스의 앞에 알뤼르가 영상석을 내려놓았다.

“이것은 제가 라르헨으로 돌아오자마자 새로 설치한 것입니다. 그리고 기존에 있던 영상석의 위치들도 조금씩 바꿨습니다. 폐하께서 없는 동안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모르니까요.”

“거기에 뭔가 있나?”

“직접 보시죠.”

베르타스의 물음에 알뤼르가 손짓했다. 그가 영상석에 마력을 부여하자 영상석이 환하게 빛나면서 벽면에 영상을 띄웠다.

바로 보이는 얼굴에 이실리스의 표정이 굳어졌다.

“페트라 라르헨이 황궁엔 어떻게 온 거지?”

“선황께 인사하러 왔답니다.”

“황제가 부재한 상황은 전시에 준하는 상황이 아닌가? 그런데 외부인을 들였다고?”

“선황께는 동생이 아닙니까.”

가까운 인물이 오히려 더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텐데 자꾸 허점을 보이는 선황의 태도에 표정을 굳혔다.

“선황이 부른 것인가?”

“아닙니다. 먼저 입궁하겠다 요청했습니다.”

“다른 것은?”

계속되는 영상에서 귀족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오지 않으셔서 걱정했습니다.

-걱정은 무슨. 준비는 되었는가?

-그런데, 지금 황태녀에게로 들어가는 문을 막는 자가 있어 접근하기 힘듭니다.

-황제가 없을 때, 황태녀에게 확실하게 인식시켜야 한다. 지금이 기회야.

영상 속에서 말하는 페트라의 말에 이실리스의 표정이 점점 차가워졌다.

‘그래서 내게…….’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이실리스가 아주 어릴 적의 기억이었다.

[황태녀님은 앞으로 이 나라를 어떻게 이끄실 생각입니까?]

[그것이 왜 궁금하지?]

[앞으로 이 나라를 이끌어 가실 분이니 모든 귀족들이 궁금해할 것입니다. 대답을 해 주십시오.]

[…….]

어린 나이에 페트라의 물음이 무엇을 뜻하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어떻게 나라를 이끌어 갈 것이냐니. 그걸 제대로 말할 수 있을 리가. 일곱 살짜리 아이에게 물었던 것치고 꽤 심오한 이야기였다.

그때는 당연한 줄 알았다. 그래서 대답을 찾으려고 머리를 굴릴 때였다. 황태녀에게 어울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눈동자를 이리저리 데굴데굴 굴렸다.

[아직 어리시군요.]

[어리다니.]

[황제의 할 일은 당연히 딱 하나. 이 나라의 결계를 제대로 유지하는 것입니다.]

[결계?]

[라르헨 전역에 펼쳐진 광역 결계. 그것을 제대로 유지하는 것이 황제가 할 일. 그렇기에 대대로 마력이 높은 자가 황제가 된 것입니다.]

“그런 헛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지껄였지.”

생각해 보니 그게 시작이었다. 그 이후로 황궁에 계속 찾아와서 황제가 해야 할 일이 어떻고 하는 것을 들으면서 자랐다.

주위의 시종들과 시녀들도 마찬가지였다. 황제가 해야 할 일 중, 가장 중한 것은 라르헨의 결계를 유지하는 것이라 하였다.

“이실리스.”

베르타스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것이 보였지만 표정을 다잡을 수 없었다. 황제가 되어서 감정을 이렇게나 드러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녀의 눈빛에 분노가 깔리자 알뤼르가 무릎 꿇었다.

“폐하.”

“더 있는가.”

“그러합니다.”

멈추었던 영상을 다시 움직이게 하자, 페트라가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황제가 없는 지금이 기회다. 돌아올 수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지만 돌아오기 전에 황태녀를 차지해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선황이 그렇게 싸고도는데 가능하겠습니까?

-아무리 선황이라고 해도 주변에서 황태녀를 모시는 사람까지 제어할 수는 없을 터.

-그러나 그들은 황궁의…….

-사람은 누구나 약한 부분이 있기 마련. 난 그것을 노리려고 하네.

대놓고 황궁의 시종들에게 손을 쓰겠다는 소리에 베르타스의 눈이 찌푸려졌다. 저걸 막기 위해서 그가 황궁을 장악했었는데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이런 일이 발생하다니.

-마력석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빼돌린 것을 들키진 않았으니. 바다 건너간 것을 그들이 어찌 알까.

웃고 있는 페트라와 귀족들을 보니 속에서 부아가 치밀었다. 베르타스는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눈에 새겼다. 이실리스를 찾으러 가기 전에 확실하게 단속을 하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한 번 더 기강을 세웠어야 했어.’

그랬다면 조금은 덜 했을 터. 후회란 언제나 늦었다. 베르타스의 표정이 좋지 않은 것을 확인한 이실리스가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대의 잘못이 아닐세.”

“이실리스 난…….”

“그대의 잘못이 아니야.”

저들이 에리카를 노린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계획되었던 일이라고 말하는 이실리스의 얼굴엔 서릿발 같은 한기가 서려 있었다. 이미 어릴 적의 그녀도 당했다는 말에 베르타스의 표정도 변했다.

“이제 어찌할 생각인가?”

“어쩌긴. 방법을 강구 해야겠지.”

“저 결계가 있는 한 이런 시도는 계속될 거야.”

단언하는 그의 말에 이실리스의 표정이 굳었다. 그녀도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렇기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는 것도.

“베르타스.”

“결정을 내려야 해, 이실리스.”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알뤼르가 숨을 죽였다. 라르헨의 광역 결계는 마법사들에게도 초유의 관심이었다. 그 마법 결계를 연구하기 위해 일부러 결계에 접근했다가 잡힌 자들도 여럿이었다.

그랬는데 그 결계가 없어질 수도 있다니.

“직접……. 없애시려 합니까?”

“알뤼르. 자네도 알지 않나. 우리가 없애는 것이 아니야. 그 결계를 노리는 드래곤과 그의 수호 기사를 막을 수 있는 방도가 있다면 말해보게.”

“없습니다.”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 알뤼르를 보면서 베르타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드래곤을 무슨 수로 이깁니까. 절대 못 이깁니다.”

“하긴…….”

이실리스도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보였다.

“잘못하면 나도 마력을 빼앗길 수 있으니.”

“나라의 결계를 세워준 드래곤이라면 폐하는 더욱 위험합니다. 마력의 파장이 잘 맞으니까요.”

알뤼르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더 문제였다. 저들이 결계를 없애겠다고 하면 아무도 막을 수 없다는 것이. 이미 그들이 막을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으니.”

한탄하듯 터져 나온 이실리스의 말에 알뤼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알뤼르.”

“네, 폐하.”

“시간을 줄 테니 광역 결계로 가서 결계를 연구해보게.”

“알겠습니다.”

단 한 번도 황실 마법사들에게 광역 결계를 맡긴 적이 없었다. 이실리스의 이번 결정은 그만큼 파격적인 것이었다.

“다만, 외부에 알려지게 되면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 비밀리에 그대 혼자 다녀오게.”

“명심하겠습니다. 그러면 대공의 일은 어떻게…….”

“그는 걱정하지 말게. 내 알아서 할 테니.”

“모든 것은 폐하의 뜻대로.”

그대로 무릎 꿇는 알뤼르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인 이실리스가 손짓했다. 조용히 물러나는 그를 응시하던 베르타스가 이실리스를 향해 입을 열었다.

“페일러스의 일족은 그냥 두려고 하나? 그가 있는 한 이런 시도는 계속될 것인데.”

“황권을 탐하는 것이 아니고 어린 나이의 황족을 세뇌하려는 것이니, 반역이라고 보기도 어려워.”

황위를 노리는 말이 나왔다면 일은 조금 더 쉬워질 수 있었다. 그러나 영상석을 끝까지 보았어도 역모에 관한 말은 일언반구도 없었다.

저 영상을 가지고 트집을 잡기는 어려웠다. 나라를 위하는 충심에서 그렇게 말했다 하면 끝일 일이었기에.

“우리 딸을 정쟁의 도구로 사용하다니.”

한탄하듯 터져 나온 베르타스의 말에 이실리스도 한숨을 내쉬었다. 황족인 이상 어쩔 수 없다는 그녀의 말에 베르타스가 반박했다.

“라르헨의 황족은 누구도 탐할 수 없는 절대 왕권을 가지고 있는 것 아니었나?”

“그것은 광역 결계를 제대로 유지했을 때의 이야기.”

“그럼 마력이 약한 황족은 어떻게 되는 건가?”

“마력이 약한 황족은 살아남을 수 없다. 그보다 마력이 강한 황족에게 황위를 넘겨야 해.”

선대 황제도 그래서 황위를 빼앗길 뻔했다. 마력이 강한 타르토스가 뒤에서 그녀를 뒷받침하지 않았다면 황위에서 물러나는 시기가 더 빨라졌을 터.

이실리스가 성인이 되기까지 그녀가 황위에 있을 수 있었던 이유는 타르토스의 뒷받침 때문이었다.

“마력이 약하다면 마력이 강한 마법사를 반려로 삼는다. 그게 황족의 법칙.”

“이실리스!”

“라르헨의 황족은 그 율법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 법은 라르헨이 세워지면서 만들어진 법. 내가 너와 맺어질 수 있었던 것은 내가 마력이 강했기 때문이야. 아니었다면 나는 다른 마법사와 결혼해야 했다.”

차오르는 분노를 숨길 수 없어 주먹을 말아쥐었다. 꽉 쥔 그의 손이 하얗게 변하는 것을 보았지만 이실리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 말이 없는 그녀를 베르타스는 빤히 바라보았다. 새삼 알게 된 라르헨의 황실은 생각했던 것보다 황족에게 더 잔인하고, 엄격한 규율을 적용하는 곳이었다.

“대체 이 라르헨에서 황족이 자유롭게 운신할 수 있기는 한 건가?”

“할 수 있지. 마력이 강하다면.”

“마력, 마력, 마력! 그게 없다면 황족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건가?”

“타고 나길 황족으로 타고난 자가 마력을 갖지 못했다면 당연한 것을.”

“그럼 우리 에리카는?”

딸의 이름을 언급하자 이실리스의 표정이 굳었다.

“에리카는? 그 아이가 마력을 발현하지 못했다면 어쩌려고 했지?”

“그 아이가 마력을 발현하지 못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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