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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화. (141/161)

140화.

보클로엠의 문제만으로도 충분히 머리가 아팠다. 미적거릴 시간이 없었다. 그녀의 앞길을 막는 사람들은 다 치워버리겠다고 마음먹은 그녀를 바라보면서 베루스 공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실리스 라르헨은 라르헨의 황제 중, 가장 황권이 강한 황제였다. 그녀의 자리를 위협하는 존재라면 다 없애버리는 것이 그녀였다. 선황과는 다른 황제였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으나 현재 선황이 결계를 유지하고 있으니 이실리스 라르헨이 가지고 있는 힘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귀족들이 문제였다.

‘말렸으나 소용이 없었지.’

그랬다. 그는 계속해서 귀족들을 설득했다. 귀족들은 그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았지만. 이실리스가 사라지고 나서 결계가 유지된 것이 문제였다. 선황의 마력, 정확히 말하면 선황의 부군인 타르토스의 마력으로 광역 결계가 유지되자 이실리스 라르헨이라는 황제가 필요 없어진 것이 문제였다.

‘그래서 저렇게 고개를 치켜든 거겠지.’

이번 일로 선황을 부른 것이 문제였다. 선대의 힘에 기대지 않고 일을 해결했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이 가장 커다란 실책이었다.

“폐하, 소인이…….”

“그만. 공작의 잘못이 아니니 그만하게.”

손을 저으며 말하는 이실리스의 말에 베루스 공작이 입을 다물었다. 지금의 그녀에게는 무슨 말을 해도 들리지 않을 것이 뻔했다. 말을 해도 변명에 불과했으니.

“그대가 선황을 부른 의도를 알고 있네. 그 덕분에 내가 무사히 돌아왔으니 죄는 묻지 않겠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저 방자한 자들을 봐줘야 한다는 것은 아닐세.”

단호한 이실리스의 말에 베루스 공작도 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마음을 먹었다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기회만 노리고 있음을 시사하는 이실리스의 말에 베루스 공작이 깊게 허리를 숙이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선황이 결계를 세운 것이 문제가 아니라 저들의 사고가 문제였어.”

그동안 이실리스는 반대로 생각하고 있었다.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결계를 유지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생각했는데 그게 최선이 아니었다. 한 사람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편해진 이들은 계속해서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걸 몰랐지.’

그들의 요구가 점점 커지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 제 잘못이었다. 너무 안이하게 생각했다. 이 모든 상황을 만든 것은 이실리스, 바로 그녀였다. 그녀의 희생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게 만든 것이 문제였다.

“베르타스는 어디 있는가?”

“국부께서는 황태녀님의 방에 계십니다.”

“가자.”

시종장의 말에 이실리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의장을 벗어나는 그녀의 뒤를 마법사들도 따랐다. 라르헨으로 돌아온 둘째 날, 베르타스가 황궁의 많은 시녀들과 시종들을 척살했기에 이실리스는 착잡한 심정으로 황태녀의 방으로 향했다.

‘궁 안의 사용인들에게까지 손을 뻗치다니.’

귀족들의 행태를 용서할 수 없었다. 다한에게 모든 것을 보고 받은 이실리스는 표정이 무너질 뻔한 것을 애써 참았다. 믿었던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하는 것은 꽤 아픈 일이었다. 이실리스가 어릴 적부터 그녀를 모셨던 사람들이었다. 그랬는데 그것조차 귀족들의 입김이 들어간 것이었다니.

새삼 놀라웠다. 이 체계를 유지하기 위해 귀족들이 손을 뻗친 곳은 대체 어디까지인가. 이실리스 라르헨 아니, 라르헨 제국의 황족이 나라를 위해 희생하고 그 희생을 당연하다고 생각하게 만든 것은 누구인가. 처음엔 당연한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니. 그게 전부 귀족들의 농간에 놀아난 것이었다니.

이번 일로 이실리스가 깨달은 것이었다. 에리카에게 접근한 귀족들은 황족의 마력을 노린 자들. 그 마력을 제 입맛대로 사용하기 위해 움직인 세력이었다.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어릴 적부터였어.’

이실리스가 그런 말을 듣고 자란 것이 시작이었다. 그녀의 어머니인 선황은 눈을 감았지만, 그녀는 눈을 감을 생각이 없었다. 알게 된 이상 그건 불가능했다.

“어쩌면 베르타스의 생각이 맞았던 것인가.”

한 사람이 모든 것을 짊어질 수 없다는 그의 생각이 맞는 것일지도 몰랐다. 차라리 결계가 없는 것이 낫다는 그 말이 갑자기 생각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마력을 잃고, 그 마력을 되찾으면서 이실리스의 가치관이 변했다.

“하명하실 일이 있으십니까. 폐하.”

“아니, 아닐세.”

그녀의 중얼거림을 들은 마법사가 물었으나 이실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충성스러운 부하들이었지만 그들에게 말할 수 없었다. 그녀가 겪은 그 무수한 일들을 다 알릴 필요는 없으니.

‘나의 이런 생각을 저들이 알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배신자라고 손가락질할 것인가, 아니면 이해할 것인가. 마력의 상실감은 같은 마법사만이 이해할 수 있었다.

‘대체…….’

고민이 깊어가던 찰나, 에리카의 방 앞에 도착했다. 이실리스는 거침없이 방문을 열고 들어갔고 방안의 광경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에리카가 울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폐하.”

“베르타스는 어디 가고! 시녀장은 어딜 갔는가!”

이실리스의 분노를 한몸에 받은 시종과 시녀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말이 없는 그들을 무서운 눈으로 바라보던 이실리스가 에리카를 안아 들고 그 방에 있는 영상석을 재생했다. 다한의 말을 들은 이실리스가 새로 설치한 것. 오로지 그녀의 마력으로만 움직이는 영상석이라 영상을 지우는 것도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곳에 두길 잘했어.’

다한의 말에 설마 했었다. 그랬는데 모든 것이 사실이었다니. 이실리스는 눈 앞에 펼쳐진 영상에 분노했다. 에리카를 향해서 결계를 유지할 의무가 있다고 늘어놓는 시종, 그 말을 옆에서 거드는 시녀. 겨우 네 살이었다. 그녀의 딸은.

“감히 너희들이…….”

분노한 이실리스가 그 자리에서 마력을 일으켰다. 뒤에 있던 마법사들이 그녀의 마력에 짓눌려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마력의 크기는 점점 커져갔고 황궁의 결계와 맞닿아 불꽃이 튀었다.

“폐하.”

“이실리스!”

문이 벌컥 열리고 타르토스가 들어왔다.

“네가 지금 제정신이냐!”

“선황의 부군은 이 문제에서 빠지는 게…….”

“지금 마력을 일으키면 광역 결계를 유지하고 있는 아일라는 어쩌라는 거냐!”

끝까지 저와 에리카가 아니라 선황을 걱정하는 타르토스의 말에 이실리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문제였나?”

“그래! 굳이 결계를 건드리지 않아도 저런 잔챙이들은 해결할 수 있을 텐데!”

“그렇군.”

더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저는 안중에도 없는 저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할까. 오히려 이제는 고마울 지경이었다. 저 한결같은 태도. 무언가 바랄 수 없는 저 태도가 오히려 반갑다니.

‘그동안 귀족들의 손에 너무 놀아났어.’

“그래서 광역 결계는 언제 세울 참이냐.”

“아직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이 남았다.”

“해결하지 못한 문제?”

“그러니 물러가게. 이곳은 황태녀의 방. 그대가 함부로 드나들 곳이 아니다.”

이실리스가 마력으로 타르토스를 밀어냈고, 결계를 유지하느라 계속해서 마력을 소모하고 있던 그는 쉽게 밀려났다. 그의 뒤에서 베르타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왔군.”

“이게 무슨 일이지?”

“그대가 없는 틈을 타서 이들이 또 들어왔더군.”

“황궁의 성벽에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녀오는 길이다. 그런데……!”

베르타스의 싸늘한 시선이 그 자리에 엎드려 있는 이들에게 닿았다. 이실리스가 마력을 거두어들이자 그제야 숨을 쉬는 둘이었다. 그녀의 뒤에 자리하고 있던 마법사들도 다를 것이 없었다.

“그들도 한패로군. 정말로 성벽에 문제가 있었나? 마력으로 보호되는 곳인데?”

이실리스의 한탄에 베르타스의 표정이 굳었다.

“명을 내려다오.”

“무슨 명을…….”

갑자기 베르타스가 그녀의 앞에 무릎 꿇으면서 말했다.

“저들을 숙청할 수 있는 생살여탈권을 다오.”

귀족들을 살리고 죽일 수 있는 권리를 달라 말하는 베르타스를 보면서 잠시 고민했다. 주고 싶었다, 그에게. 그러나 불가능했다. 이실리스가 이를 악물고 고민하자 그가 다시 말했다.

“뭘 고민하지?”

“그럴 수 없어, 베르타스. 귀족의 생살여탈권은 황제만이 가질 수 있는 권리. 그러니 너에게 내줄 수 없다.”

“그러면 저들을 두고 볼 셈인가? 에리카를 또 노릴 거야!”

그의 말에 이실리스의 표정이 굳었다. 베르타스가 걱정하는 바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걱정하는 것을 그도 느끼고 있을 테니까. 이실리스가 가볍게 손짓하자 마법사들이 그녀의 앞에 있는 두 사람을 마력으로 옥죄었다.

“마탑에 가두어라.”

“알겠습니다.”

“너희들 외에 누구에게도 문을 열어서는 안 된다. 둘이 도망친다면 너희에게 죄를 물을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목숨을 걸어라.”

“당연합니다.”

절대 도망가게 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 장담하는 마법사들의 말에 이실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뤼르에게 배후를 캐라고 이르라.”

“명을 받듭니다.”

두 명의 마법사가 방 밖으로 나가자 이실리스가 베르타스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에리카를 노리는 것은 이미 알고 있다.”

“알면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 건가?”

“그런 게 아니야.”

“아니면?”

“베르타스.”

이실리스가 한숨을 내쉬면서 에리카를 땅에 내려놓았다. 어느새 울음을 그친 그녀의 딸은 땅에 발이 닿자마자 베르타스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그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정한 눈으로 지켜본 이실리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배후를 캐야 한다.”

“내 딸의 안위를 노리는 자들은 무조건 다 죽어야 해.”

“베르타스.”

“나는 너처럼 관대한 사람이 아니야. 나의 것을 건드리는 자들은 죽는다. 나는 그렇게 살았다.”

“그것은 페일러스에게…….”

이실리스가 페일러스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그에게 모든 조사를 맡기겠다고 말하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문이 열리고 급히 들어오는 자로 인해 그들의 대화가 멎었다.

“안 됩니다. 폐하.”

알뤼르가 그 자리에 나타났다. 다급하게 뛰어온 듯한 모양새에 그녀가 알뤼르를 향해 뭐라 입을 열려던 찰나였다.

“대공이 배신했습니다.”

“뭐?”

“페일러스 대공이 배신했습니다.”

이실리스와 베르타스의 시선이 알뤼르에게 닿았다. 무시무시한 그들의 시선에 흠칫한 알뤼르였지만 목을 가다듬고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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