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9화. (140/161)

139화.

“최대한 빠르게.”

“알겠습니다.”

“돌아오자마자 일을 주어서 미안하군.”

“폐하께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뭐든 하겠습니다.”

깊게 허리를 숙이고 밖으로 나가는 알뤼르였다.

“이실리스.”

“왜 부르지?”

페일러스의 부름에 이실리스가 되물었다.

“이건 보통문제가 아니야. 라르헨의 마력석이 뮤르카 제국까지 닿아있다니.”

“알고 있어.”

“어디서 유출된 것인지 알아내지 못하면…….”

“마력석 관리에 문제가 생긴다.”

“안다면 다행이군.”

“그것을 모르는 황제도 있나.”

이실리스가 가볍게 말하면서 손짓했다. 그녀의 손짓에 따라 페일러스가 물러서자 베르타스가 그녀를 향해 한 걸음 다가섰다.

“다 끝났나?”

“급한 것은.”

“그렇다면…….”

옥좌에 앉은 그녀의 손을 잡아끈 베르타스가 이실리스를 일으켜 세웠다.

“에리카에게 가자.”

“선황이 데려간 것이 아니었나?”

“그렇지. 그러니 가자. 오늘은 에리카와 함께 자는 것은 어떨까.”

“나는 한 번도 선황과 자본 적이…….”

“우리 딸은 다르지.”

잘라 말하는 베르타스에게 입술을 달싹이려던 그녀가 귓가에 울리는 그의 말에 포기했다.

“에리카가 어머니라고 부르더군.”

“어서 가지.”

어머니라니. 앞으로 그렇게 불러야 하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너무 빨랐다. 대체 누가 에리카에게 그런 말을 알려준 것인지 알아내고야 말겠다고 생각하면서 에리카의 방으로 갔다. 

이실리스는 자신을 반기는 딸을 품에 안고 잠을 청했다. 아이를 끌어안고 자는 것은 어색했지만 따뜻한 아이의 체온이 그녀를 감싸자 스르륵 잠이 들었다.

이실리스와 에리카가 잠든 것을 확인한 베르타스가 몸을 일으켰다. 이제 심어둔 그의 사람들을 만나러 갈 시간이었다. 

* * *

방 밖으로 나온 베르타스를 보고 다한이 웃었다.

“나오실 줄 알았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지?”

“막는다고 막았는데…….”

에리카를 찾아오는 귀족들이 있었다고. 그 앞을 계속 지키고 있었지만, 시종들에게 혹은 시녀들에게 뇌물을 주고 에리카를 만나려고 하는 귀족들을 제대로 막지 못했다고 다한이 보고했다.

“그러라고 내가 너에게 이 자리를 준 것이 아니다.”

“압니다. 각하. 그러나…… 방법이 없었습니다.”

“방법이 없어?”

“그렇습니다.”

마법사를 대동하여 찾아오는 귀족들을 눈치챌 수 없었다고 말하는 다한을 향해 베르타스가 이를 갈며 말했다.

“그 안에 시녀장은 없었나?”

“교묘하게 시녀장이 없는 시간에 찾아오는 것을 어찌합니까. 저도 별수 없었습니다.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황태녀님의 방에 여러 사람이 드나든 후였습니다.”

“다한!”

“그래도 그 이후에 알게 된 선황의 부군께서 결계를 만들어주셨습니다.”

“결계를?”

“그렇습니다.”

그가 만들어준 결계 덕분에 그나마 귀족들을 차단할 수 있었다고 말하면서 다한이 웃었다.

“그들을 그냥 둔 것인가?”

“그럴 리가 있습니까?”

다한은 한번 당한 것은 절대 잊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것은 베르타스가 다한을 에리카의 곁에 둔 이유이기도 했다. 이렇게 귀족들에게 당한 다한이 어떤 행동을 취했겠는가. 답은 하나였다.

“죽였군.”

“그렇습니다.”

싸늘하게 웃는 다한의 표정에 자비란 없었다.

“마법으로 난입한 황족들이 황태녀님께 위해를 끼칠 수도 있었습니다. 황족에게 위해를 끼친 자는 즉결처형. 당연한 결과입니다.”

아무렇지 않게 귀족 살해를 논하는 다한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베르타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혹시 역심을 품은 귀족이 에리카에게 좋지 않은 짓을 할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베르타스도 다한에게 역정을 낸 것이었다.

“이실리스가 없어졌으니 저들이 쥐락펴락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겠지.”

“그런 듯합니다.”

“나도 없어졌으니 기회라고 생각했을 거고.”

“네.”

다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들은?”

“이곳을 지키던 마법사 중 귀족들에게 징벌을 내리는 데 참여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마 폐하께서 돌아오셨으니 벌을 청할 것입니다.”

“상을 내려도 모자랄 판에 벌은 무슨. 내가 알아서 해결하지.”

“그 말을 기다렸습니다.”

하도 귀족들이 들고일어나는 바람에 골치가 아팠다고 말하는 다한이었다. 선황은 보는 시선이 있어 귀족들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보니 이전 선황의 치세가 눈에 그려지는 듯해 다한은 입을 다물었다.

“그나저나 누구입니까?”

“누구를 묻는 거지?”

함께 온 보클로엠과 이베르트에 대해 묻는 말임을 알면서도 베르타스가 모르는 척 물었다.

“알만한 사람끼리 왜 이럽니까. 각하. 저 둘, 보통이 아니던데요.”

“보통이 아니라고?”

“오자마자 황궁의 결계부터 확인하는 모습이 이상합니다.”

“황궁의 결계를?”

“그렇습니다.”

베르타스와 이실리스가 돌아오기 전까지 황궁의 보안을 담당하던 다한이었다. 그의 시선을 피해서 황궁에서 무언가를 획책하기란 어려웠다. 곳곳에 영상석을 심어두었고 기존에 존재했던 영상석의 위치 말고도 여러 개를 추가로 더 설치했다.

“이상합니다.”

“뭐가 이상하지?”

다한의 말에 베르타스가 묻자 그가 베르타스에게 바짝 다가서면서 속삭였다.

“기존에 있는 영상석의 위치를 알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그 영상석이 있는 곳을 피해서 움직였습니다. 하마터면 놓칠 뻔했는데, 추가로 설치한 영상석에 그 모습이 잡혔습니다.”

“오자마자 바로 움직인 건가?”

“그렇습니다.”

라르헨의 광역 결계의 중심이 되는 곳을 찾는 것 같았다. 이베르트가 과거 라르헨의 황족이었기에 그 위치를 알고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결계가 없어지길 바라는 베르타스로서 다행이라고 말하긴 어려웠지만, 그것 때문에 고민하는 이실리스를 보게 되는 것보다 차라리 그 일이 조금 늦게 벌어지는 것이 나았다.

‘혹 그녀가 막을 수 있다면…….’

그때 가서 움직여도 늦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실리스의 마음은 알고 있었지만 그대로 움직여줄 수 없었다. 그러기엔 이 제국에 무례한 자들이 너무 많았다. 고마운 줄도 모르고 끊임없이 황족을 이용하려는 자들이 너무 많았다.

귀족들이 에리카를 건드리지 않았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도 있었다. 아마 그도 이곳의 결계를 노리는 보클로엠과 이베르트를 경계는 했겠지. 그러나 에리카에게 접근해서 나라의 명운이 어쩌니, 결계가 어쩌니 했다는 소리를 들은 지금 그의 생각은 180도 바뀌었다.

‘결계는 무슨.’

죄다 없애버릴 테다. 감히 딸을 건드리다니. 베르타스의 눈이 분노로 타올랐다. 그의 마음을 눈치챈 다한이 몸을 낮추었다.

“다한 경.”

“네. 각하.”

“에리카에게 다녀간 자 중, 살아남은 사람이 있나?”

“거의 하급 귀족이 왔습니다. 그들도 오고 싶어서 온 것은 아니겠죠.”

쉽게 말하면 고위귀족이 몸을 사리느라 하급 귀족들이 왔다는 소리였다.

“그럼 그들의 명단은?”

“준비해 놨습니다.”

“가져오게.”

“알겠습니다.”

그에게 꾸벅 인사하고 물러나는 다한을 보면서 베르타스의 눈이 번뜩였다.

* * *

회의실에서 이실리스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녀에게 제안되는 안건이 왜 이렇게 많은지 서류를 다 검토할 틈도 없었다. 계속해서 국새를 찍어달라 요청하는 귀족들에게 이실리스가 손에 마력을 일으키면서 말했다.

“내게 그런 것을 요구하다니. 제정신인가?”

이실리스 라르헨. 힘으로 귀족들을 짓누르는 황제였다. 잠시나마 선황의 치세에 길들어진 그들이 대놓고 귀족들의 힘을 늘리겠다 요구하는 모습을 보고 이실리스는 이를 갈았다. 저들을 눌러 놓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썼던가. 그랬는데 모든 것이 허사였다.

그녀가 자리를 비운 그 잠시, 그 잠깐의 시간 동안 힘을 키운 귀족들이었다. 그녀의 안전에 대해선 묻지 않았다. 없어진 시간 동안 괜찮았는지 그녀에게 물었던 사람은 베루스 공작 단 한 사람이었다.

‘내가 너무 안이했어.’

한 사람의 힘으로 유지되던 큰 나라가 이렇다니. 그 사람이 없어지면 구심점이 없어지는 것이니 더욱 기반을 닦았어야 했는데 그게 부족했다. 아직 나라의 결계는 선황이 유지하고 있었고 이실리스는 당장 그 결계를 유지하기 위해 마력을 빼낼 생각이 없었다.

‘이베르트와 보클로엠이 문제야.’

그들이 무엇을 노리고 있는지 안 이상, 그녀의 마력은 쥐고 있는 것이 나았다. 괜히 광역 결계를 세운다고 마력을 쏟아부었다가 일이 생겼을 때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도 있으니. 이실리스는 차일피일 광역 결계를 세우는 것을 미루고 있었다.

“다 했는가?”

귀족들이 계속해서 떠드는 소리가 듣기 싫었다. 귓가에 울리는 소리는 제대로 된 소리로 들리지 않았다. 다만 욕심 많은 자들의 아우성일 뿐. 나지막한 그녀의 목소리가 회의실을 울리자 귀족들은 입을 다물었다.

“그대들의 의사는 알았으니 물러나게.”

“허나 폐하!”

“내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피곤하군.”

회의를 파하겠다는 이실리스의 말에 반박할 수 있는 귀족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에게 인사하고 멀어지는 귀족들을 보면서 이실리스는 혀를 찼다.

‘저런 자들을 신하들이라고 믿고 있었다니.’

드러내놓고 저들의 주머니를 채워달라고 요구할 줄은 몰랐다. 오늘의 중요 안건 중 하나인 마력석. 황궁에서 쥐고 있는 마력석의 유통권을 그들에게도 내어달라는 것이었다.

“마력석 하나도 만들지 못하는 반편이들이 뭐?”

마법사들의 고유한 힘이었다. 마력석은. 그리고 그 마력석을 유통할 수 있는 곳은 오직 라르헨의 황궁뿐. 그걸 내어달라고 말하는 것은 그녀의 돈을 내놓으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건 안 될 일이지.’

“폐하.”

남아있던 베루스 공작이 그녀를 불렀다.

“내가 없는 사이, 저들이 배가 불렀군.”

“귀족들의 불만이 큽니다.”

“내가 라르헨으로 돌아온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았네. 그런데 불만이 크다고? 왜, 내가 아니면 선황이 결계를 유지하면 되니 반란이라도 일으키자고 하던가?”

“폐하. 그것은…….”

“여기저기 들리는 말을 듣지 못할 정도로 내 힘이 약해지진 않았네. 결계를 유지하지 않으니 내가 우습게 보이기라도 한 모양이군.”

“그것이 아닙니다.”

“아니긴.”

희미하게 웃는 이실리스를 향해 열리던 베루스 공작의 입술이 굳게 닫혔다. 그의 표정을 보면서 이실리스는 결심했다. 그녀의 치세에 걸림돌이 되는 것은 다 없애 버릴 것이다. 에리카에게 완전무결한 라르헨을 넘겨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겠다고 결심했다.

“폐하, 자비를 베푸심이…….”

위험한 생각을 하는 그녀를 눈치챈 베루스 공작이 입을 열었지만 이실리스는 무표정한 얼굴을 들어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나는 그들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었네, 공작. 일주일이면 된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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