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7화. (138/161)

137화.

“알아.”

“그런데 황족이라는 이유로 희생하는 것은 웃기지 않나? 황족이 아니고 그냥 마력이 강한 자로 태어났어도 너는 이렇게 했을까?”

“그것은 당연히…….”

아니겠지. 황족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절대 지금과 같은 상황에 놓일 일이 없었다.

“아니, 너는 그렇게 했을 거야.”

“뭐?”

“황족이기 때문이 아니라 마력이 강한 자이니 결계를 유지해달라는 부탁을 들었다면 거절할 수 없었겠지. 왜냐고? 제국민을 보호하는 방법이니까. 라르헨의 마법사라면 그 말을 들어줘야 하는 거 아닌가?”

“베르타스.”

“네가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이런 거다. 내가 희생하니 너희들도 그래야 한다.”

“베르타스.”

“그런데 말이야, 우리 딸에게도 같은 것을 요구할 건가?”

“그만.”

“에리카에게도 같은 것을 요구할 거냐고.”

“그만해.”

“에리카에게도 라르헨을 위해서 희생하라고 말할 건가?”

“그만!”

소리치며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이실리스를 베르타스는 놓지 않았다. 몸부림치던 그녀가 결국 몸에서 힘을 빼자 그가 다시 속삭였다.

“네가 바라는 라르헨이 이런 것인가?”

그의 말에 대답이 없는 이실리스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놓아줬다. 굳은 표정으로 말이 없는 이실리스를 향해 베르타스는 올라오는 감정을 숨길 수 없었다. 기회였다. 이실리스를 흔들어서 결계에 대한 생각을 바꾸게 할 기회.

‘지금이 아니면 어려워.’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드래곤이 얽힌 일이었다. 지금이 아니면 결계를 없앨 기회도, 방법도 없었다. 저들이 결계를 없애 주길. 그래서 나의 이실리스와 에리카에게 드리운 무거운 짐을 사라지게 해 주길. 이기적인 생각이지만 베르타스는 바라고 또 바랐다.

‘이런 나라가 이상한 거야. 한 사람의 힘에 기댄 나라가.’

“내가 바라는 라르헨이라…….”

이실리스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고민하는 듯한 그녀의 목소리에 베르타스는 기다렸다. 그녀가 생각을 정리할 때를. 지금까지 살았던 삶에 익숙해져서 그것이 잘못된 것인지도 모르고 살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지금의 그녀는 삶이 흔들릴만한 경험을 겪었다.

베르타스는 그것에 걸어보기로 했다. 그 경험이 이실리스를 변화시키기를. 조금 더 평범하게 생각하기를. 희생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기를.

“내가 꿈꾸는 라르헨이라…….”

이실리스의 목소리가 공기 중에 흩어졌다.

* * *

항해는 순조로웠다. 라르헨이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이실리스의 마음도 복잡해졌다. 기대되는 마음에 갑판 위에서 선실로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처음엔 이실리스 혼자였지만 그다음엔 베르타스, 그다음엔 알뤼르였다. 이베르트까지 선상으로 나왔다.

“왜 나와 계십니까. 폐하.”

이실리스에게 알뤼르가 물었다.

“그러는 그대는 왜 나왔는가.”

“그렇게 그리워하던 고향이 눈앞인데 당연한 것 아닙니까.”

“나도 그러하군.”

이실리스의 말에 알뤼르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곧 라르헨입니다.”

“곧이지.”

알뤼르의 말을 받으면서 베르타스가 답했다. 이실리스의 뒤를 지키고 서 있는 그를 본 이베르트가 베르타스에게 물었다.

“그대는 라르헨 황제의 부군이라고 하였나?”

“그게 왜 궁금하지?”

“부군이라고 하기엔 수호 기사에 가까워 보여서.”

베르타스를 깎아내리면서 말하는 이베르트의 말에 외려 이실리스가 움찔했다. 베르타스가 희미하게 웃으면서 이베르트에게 말했다.

“수호 기사라더니……. 내가 부러운가?”

“뭐라고?”

“내가 부럽냐고. 날 보는 시선에 부러움이 가득 담겨 있어서 말이지.”

이베르트의 표정이 구겨졌다. 미간이 찌푸려지면서 생각에 잠긴 그를 본 베르타스가 쐐기를 박았다.

“하긴, 아무리 동경해도 닿을 수 없는 존재를 사랑하는 너와 사랑을 이룬 나는 다르지.”

“이……!”

“그러니 작작해. 질투만큼 추한 것이 없거든.”

단언하는 그의 말에 이베르트의 얼굴이 무너졌다. 보클로엠이 이 자리에 없는 것이 다행이었다. 이 자리에 있었다면 이베르트의 모든 것을 눈치챘을 테니까. 가질 수 없는 보클로엠을 어떻게든 소유하고자 하는 그의 집착을.

“이토르트 항구입니다!”

라르헨이 보였다. 연락을 받은 마법사들이 이미 항구에 나와서 대기하고 있었다. 라르헨으로 가는 바다 위에서 작동한 통신석으로 연락이 닿았다.

“폐하. 라르헨입니다.”

“그렇구나. 나의 라르헨이구나.”

이실리스의 말에 베르타스의 시선이 돌아갔다.

‘아직도 나의 라르헨이라니…….’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라르헨에 대한 이실리스의 애정을 다시 한번 확인하니 씁쓸해졌다.

‘헛된 생각이었나.’

점점 생각에 빠져드는 그를 막은 것은 멀리 보이는 작은 몸이었다. 다한으로 보이는 사람의 어깨 위에 앉아 있는 작은 아이.

“에리카.”

베르타스의 낮은 목소리에 이실리스가 반응했다. 바로 고개를 돌린 그녀의 눈에 그토록 절실하게 그리워하던 딸의 얼굴이 보였다. 너무 멀어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눈에 그린 듯이 선했다. 붉은 머리카락에 베르타스를 닮은 얼굴, 자그마한 것 하나에도 밝게 웃는 그 얼굴. 휘어지는 눈매와 보드라운 뺨, 그 모든 것이.

더는 참을 수 없었던 이실리스가 그 자리에서 마력을 일으켰다. 붉은 마력이 그녀의 몸을 휘감는 것이 보이자 베르타스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이실리스.”

“베르타스.”

“같이 가지.”

강하게 손을 잡는 바람에 수인을 제대로 맺지 못한 그녀가 그를 바라보았다.

“이거…….”

“마력을 조금 덜 사용하는 게 낫지 않나?”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베르타스의 말에 손에서 힘이 풀렸다. 수인을 맺으려던 손을 늘어뜨리면서 그녀가 그를 바라보았다.

“마력을…….”

“이실리스.”

베르타스의 부름에 이실리스가 정면을 바라보았다. 이토르트 항구가 가까워지고 배가 멈추었다.

“폐하!”

마법사들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한의 어깨에 앉아 있던 에리카도 그녀를 불렀다. 사람들의 목소리에 묻혀 아이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천천히 배에서 걸어 내리자 마법사들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사위가 조용해졌다.

“에리카.”

발이 라르헨에 닿자마자 그녀가 내뱉은 첫마디였다. 그녀의 목소리를 알아들은 에리카가 그녀를 향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순식간에 달려와서 다리를 잡고 얼굴을 부비는 그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그녀에게 달라붙는 작은 몸을 안아 들면서 이실리스가 속삭였다.

“내 딸.”

“어머니.”

‘어머니?’

전에 듣지 못했던 호칭에 이실리스의 눈썹이 하늘로 올라갔다. 그 목소리를 바로 뒤에서 들은 베르타스도 미간이 구겨졌다. 그의 얼굴을 확인한 에리카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빠, 아빠!”

이실리스의 품에서 벗어나 베르타스에게 냉큼 안기는 에리카에게 내심 서운했지만, 그녀는 더욱 환히 웃었다. 이실리스의 미소에 에리카도 따라 웃었다. 사랑스러운 아이의 뺨에 입술을 대었다. 보드라운 촉감이 그녀의 마음을 따뜻하게 감쌌다. 벅차오르는 감정을 숨길 수 없어 에리카에게 무슨 말을 하려는 순간, 마법사들이 그녀에게 다가섰다.

“폐하. 무사히 돌아오신 것을 감축드립니다.”

“감축드립니다!”

중요한 순간을 방해한 마법사들이었다. 그래도 그녀의 앞에 무릎 꿇는 그들에게 화를 낼 수는 없었다.

“일어서게.”

“이실리스.”

뒤에서 페일러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환하게 웃는 얼굴이 보였다.

“멀쩡하니 다행이군.”

“적어도 너에게 황위를 넘겨줄 일은 없으니.”

“한마디도 지지 않지.”

“그러는 너도. 황제에게 너무 불경하군.”

손을 내미는 이실리스의 손등에 페일러스가 웃으면서 가볍게 입술을 내렸다.

“무사 귀환을 경하드립니다. 폐하.”

“그동안 고생했네.”

베르타스에게 모든 것을 전해 들은 이실리스가 속삭이자 빙긋 웃는 그의 얼굴이 보였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그를 향해서 그녀가 웃었다.

“에리카를 돌보아주어 고맙네.”

“아니, 내가 아니고 선황과 선황의 부군께서 하셨지.”

“그래?”

이미 들어서 알고 있지만 이실리스는 모른 척 물었다. 그녀의 아버지인 타르토스가 아이를 돌보았다는 말이 믿기지 않았다.

“부군께서 황태녀님을 많이 예뻐하셨지.”

“헛소리를.”

페일러스의 말을 농담 취급하면서 이실리스가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귀환을 축하하는 제국민들이 이토르트 항구로 나와 꽃잎을 던졌다. 향긋한 꽃내음이 가득한 길을 걸으면서 이실리스는 제국민들을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와아아!”

이실리스의 손짓에 환호하는 제국민들을 보면서 그녀가 살며시 웃었다.

“위세가 대단하군.”

이실리스의 뒤를 따라 걷던 보클로엠이 말했다. 이베르트와 함께 후드로 얼굴을 가린 둘은 얼핏 보면 이실리스의 마법사들과 비슷한 기운을 띠고 있었다. 이실리스를 대신해서 에리카를 안고 있던 베르타스가 페일러스에게 에리카를 넘기고는 그들에게 말했다.

“저들에게 헌신한 시간이 있기에 이런 위세도 있는 것이지.”

“헌신?”

“그렇지 않나? 제국민의 믿음이라는 것은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많은 것을 담고 있는 베르타스의 말에 보클로엠은 입을 다물었다.

“강력한 마력에 몸을 사리는 것이 아니고?”

의뭉스러운 이베르트의 말에 이실리스의 시선이 돌아갔다. 어깨를 으쓱하는 이베르트를 보면서 이실리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들이 힘에 억눌린 자들로 보이나?”

“…….”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폭군의 폭정에 머리를 숙이고 있는 자들이라고 하기에, 라르헨의 제국민들은 얼굴이 밝았다. 어두운 기색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제국민들에게 자부심을 가진 이실리스였다.

‘마력도 나의 힘이지만 저 제국민들의 믿음도 나의 힘이다.’

그래서 저 믿음을 잃고 싶지 않았다. 잠시나마 마력을 잃었을 때 얼마나 두려웠던가. 그녀를 믿는 모든 사람이 그녀에게서 등을 돌릴까 두려웠다. 힘이 없는 그녀는 필요 없다고 말할까 두려웠다.

‘마음이 착잡하군.’

어수선한 마음을 다스릴 수 없었다. 저 제국민들이 그녀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저들은 무엇 때문에 그녀에게 고개를 숙이는가. 저들이 보이는 존경, 경외. 그 모든 것들은 그녀의 마력에서 기인하는 것인가. 그 외엔 아무것도 없는 것인가.

이전에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던 모든 것이 그녀의 피부에 와닿았다. 저들은 저의 무엇을 보고 환호하는 것일까. 이실리스는 그것이 궁금했다.

‘저들이 따르는 것은 나인가 아니면 마력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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