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6화. (137/161)

136화.

저 말이 순수하게 들리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전에 보이지 않던 것이 보였다. 그녀를 향해 찬사를 내뱉는 파브리스에게 이실리스가 말했다.

“이제 라르헨으로 돌아가야겠어.”

“하긴, 너무 오래 자리를 비웠지.”

라르헨으로 가야겠다는 이실리스의 말에 배를 준비해 주겠다는 파브리스의 목소리엔 기쁨이 가득했다. 그가 원했던 모든 일이 해결되자 상당히 만족스러운 것 같았다. 이실리스는 그런 파브리스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왜 그렇게 쳐다보지?”

“좋아 보이는군.”

“당연한 소릴. 제국의 위기를 해결했는데.”

이제 이파프 제국의 사정이 조금 더 나아질 거라고 말하는 파브리스를 향해 이실리스가 물었다.

“파브리스, 자네는 왜 해상왕국을 고집하는 것이지?”

“…… 그게 무슨 소리지?”

“왜 해상왕국을 고집하느냐고 물었네. 우리의 마력석이 아니면 유지하기도 힘든 곳이 아닌가.”

“갑자기 그건 왜 묻지?”

“궁금해서 말이야. 이파프 제국에 육지도 있는 거로 알고 있는데…….”

“그 자그마한 땅을 말하는 건가? 칼리파 제국의 옆에 있는?”

“그래도 육지가 아닌가.”

“우리가 그곳으로 들어가려면 칼리파 제국과 싸워야 해.”

파브리스의 목소리엔 분노가 가득했다.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 칼리파 제국은 호전적인 국가. 너희 라르헨과는 다르다. 그들과 우리는 물과 기름같이 섞일 수 없는 자들이다.”

“파브리스.”

“너야 강대국의 황제에 마력이 대단한 황제이니 이런 어려움을 겪어 본 적이 없겠지. 우리라고 이 바다 위가 좋아서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바다 위가 아니면 살 수 있는 곳이 없기에 내린 결정이지.”

“…….”

“그나마 선대, 우리의 선대와 라르헨의 선대 황제들이 인연이 닿아 방법을 마련해 준 것이지. 육지에서 살 수 없으니 바다 위라도 지배해야 해.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살아남을 수가 없다.”

파브리스의 말에 이실리스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각자의 사정을 다 알게 되니 이젠 파브리스를 욕할 수도 없게 되었다.

‘저런 사정이 있었다니.’

깊이 관심을 두면 안 되겠다. 연민을 갖고 관심을 두는 순간 그녀의 어깨에 짊어질 짐이 더 늘어난다. 이실리스는 그제야 베르타스가 걱정하는 부분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내가 가진 힘 때문이겠지.’

마력이라는 것은 이중적이었다. 그녀에게 자신감을 갖게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녀를 힘들게 했다. 마력에 상응하는 책임감. 그것이 그녀를 힘들게 했다. 마력을 잃기 전엔 알지 못했던 것이었다. 힘든 줄도 몰랐다. 그냥 당연한 줄로만 알았다.

‘그랬는데 아니었지.’

그녀의 마력은 그녀만의 것이었다. 다른 누군가와 공유할 필요도 없었고, 라르헨에 헌신할 필요도 없었다. 라르헨을 이끄는 황족이었기에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생각해보면 어머니도 그러했다. 선황인 어머니도 그녀의 마력을 결계에 쏟아부었지만 그게 다였다. 결계를 제외한 다른 일엔 마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이파프 제국의 마력석에 마력을 쏟아부은 자는 그녀의 아버지인 타르토스였다.

‘일부러 그 사실을 말할 필요는 없겠지.’

오로지 이실리스, 그녀만이 마력으로 모든 것을 해결했다.

복잡한 머릿속을 털어내기 위해서 이실리스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를 바라보던 파브리스가 의아한 표정을 짓는 것이 보였지만 그의 궁금증을 해결해줄 생각은 없었다.

“라르헨의 마법사들은 어디 있지?”

“그들은 모두 이토르트 항구로 귀환했다.”

“알뤼르의 말이 사실이로군.”

한 명도 남지 않고 귀환했다는 말에 이실리스가 고개를 들었다. 먼바다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에 그리움이 가득했다.

“배를 준비하지.”

“가장 빠른 것으로.”

“당연한 소릴 하는군.”

신하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파브리스를 바라보던 이실리스가 다가온 베르타스를 향해 속삭였다.

“이제 라르헨으로 가겠군.”

“가야지. 우리 딸이 기다리지 않나.”

“에리카. 그래, 에리카가 기다리고 있어.”

그리움이 충만한 이실리스의 목소리에 베르타스가 그녀의 어깨를 쥐었다. 가녀린 어깨를 끌어당긴 그가 그녀의 귓가에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딸이 기다려.”

“그래. 우리 딸이.”

베르타스에게 머리를 기댔다. 멀리서 그 둘을 바라보고 있던 알뤼르가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 * *

파브리스가 준비한 배에 올라탄 이실리스는 먼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곳에 무언가라도 있는 것처럼. 이실리스의 곁에 서 있던 베르타스도 바다 너머에 있는 무언가를 바라보았다. 파브리스의 성대한 환송을 받은 그들이 배를 타고 바다 위로 나온 지 시간이 꽤 흘러있었다. 

하루 만에 라르헨에 도착하기란 어려웠지만, 최대한 속도를 내 달라고 했다. 파브리스의 선원들은 그들의 제국을 유지하게 해 준 이실리스에게 경의를 표하면서 맡겨두라며 자신감을 보였다.

‘적어도 올 때보다 시간이 덜 걸리겠지.’

그때보단 인원수도 적었으니. 생각에 빠진 이실리스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베르타스는 조용히 그녀의 뒤를 지켰다. 그런 그들의 시선을 피한 이베르트와 보클로엠이 배 한켠에서 후드를 쓴 채로 서 있었다. 

“라르헨으로 가면 바로 결계를 찾아가야겠습니다.”

이베르트의 말에 보클로엠은 망설였다.

“정녕 그것밖에 방법이 없는가.”

“그걸 계속 손목에 달고 다닐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눈짓하는 이베르트를 보면서 보클로엠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계속해서 확답을 주지 않는 보클로엠을 이베르트는 시선으로 독촉했다. 아직 인간에 대한 연민이 남아있는 보클로엠에게 다시 속삭였다.

“그들이 당신께 한 짓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

배 위의 한구석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둘을 목격한 베르타스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그들을 살폈다. 그의 시선을 눈치챈 알뤼르가 다가섰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알뤼르. 마력은 괜찮나?”

“거의 다 찾았습니다.”

“다행이군.”

베르타스의 말에 숨겨진 안도의 기색을 느낀 알뤼르가 희미하게 웃었다.

“저분들은 왜 살피셨습니까.”

“뭔가 이상해서.”

“이상하다뇨?”

“저러고 둘이 있는 게 역적모의라도 하는 것 같지 않나?”

“별 헛소릴 다…….”

그의 말을 웃으면서 넘기는 알뤼르를 보면서도 베르타스는 웃지 않았다. 무표정한 베르타스의 얼굴에 함께 심각해진 알뤼르가 그를 향해 말했다.

“정말…… 입니까?”

“…….”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베르타스를 보면서 알뤼르의 표정도 굳었다. 역적모의라니. 베르타스의 입에서 나온 말에 알뤼르는 웃을 수 없었다. 베르타스의 귀에 분명히 들렸다.

‘결계를 찾아가야 한다니…….’

라르헨에 있는 결계라면 단 하나. 나라를 지키는 결계였다. 그 결계를 노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못 들었으면 모르겠는데…… 들었으니…….’

이실리스에게 말해야겠지. 베르타스의 입장에서 저들이 결계를 없애고 사라져 준다면 대환영이었다. 원래부터 없애려고 했던 것, 그가 아닌 누가 없앤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문제는 이실리스.’

저들을 데리고 라르헨으로 들어가는 것을 꺼리는 그녀였다.

‘하필이면.’

제 귀에 들리게 말할 건 뭐란 말인가. 한숨을 내쉰 베르타스가 알뤼르를 향해 물었다.

“라르헨에 결계라고 불릴 만한 게 뭐가 있지?”

“결계…… 말입니까?”

“그래, 결계.”

“라르헨을 지키는 광역 결계 말고요?”

“그거 말고는 없는 거겠지?”

“지금 딱히 생각나는 것은 없습니다만……, 그건 왜…… 설마?!”

알뤼르의 말에 베르타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황한 알뤼르의 표정에 베르타스가 입을 열었다.

“문제는 저들이 라르헨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거야.”

“데리고 가지 않으면 되지 않습니까!”

“헛소리를. 너는 마력의 근원이라고 불리는 드래곤을 막을 방법이 있다고 생각하나?”

“…….”

“차라리 눈에 보이는 곳에 두는 게 나아.”

“폐하께서는 이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눈치만 채고 있을 뿐. 아직 알지는 못하지. 나도 지금 들었으니.”

“들었다고요?”

“소드마스터의 청력을 우습게 보지 마. 너희 마법사들은 마력을 사용하지 못하는 자들을 낮춰보는 경향이 있더군.”

베르타스의 말에 움찔한 알뤼르가 입을 다물었다. 폐하께 가서 고하겠다는 그를 말리지 않았다. 제가 직접 말하는 것보다 알뤼르가 말하는 것이 오히려 편했으니. 멀어지는 알뤼르의 뒷모습을 살피던 베르타스가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에 걸린 둘은 아직도 무언가를 이야기하는 중이었다. 

“그냥 두기도 애매하군.”

베르타스의 집요한 시선이 따라붙자 그 시선을 눈치챈 이베르트가 그에게 눈을 돌렸다. 손을 들어 보이는 그를 향해 고개를 대충 끄덕인 베르타스가 바다를 바라보았다. 가뜩이나 심란한 이실리스에게 부담을 줘야 한다니.

베르타스가 들었을 거라고 예상도 못 한 그들이 계속 말을 이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어찌 보면 다행이었다. 모르고 있다가 뒤통수를 맞는 것보다 나았으니. 

알뤼르에게 말을 들은 것인지 당황한 표정의 이실리스가 그에게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베르타스는 웃으면서 양팔을 벌렸다.

“뭐 하는 거지.”

“와서 안기라고.”

다가오던 이실리스가 주춤하면서 멈추자 베르타스가 그녀를 끌어당겼다.

“이렇게 안겨야 저들의 의심을 피하지.”

이실리스를 깊게 끌어안으면서 베르타스가 속삭였다. 사심 섞인 그의 말에 희미하게 웃는 그녀가 느껴졌다. 이렇게 제품 안에서 웃는 그녀가 좋았다. 잠시 그에게 안겨있던 이실리스가 품 안에서 입술을 달싹이는 소리가 들렸다.

“결계를 노리는 것 같다고?”

“그래.”

“큰일이로군.”

결계를 세운 자가 결계에서 마력을 회수하는 것을 막기란 어려웠다.

“이실리스.”

“왜 부르지?”

“라르헨에 결계가 있는 것이 좋은 것 같나?”

“제국민들을 보호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너의 희생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거잖나. 아니, 결계에 마력을 부여하는 누군가의 희생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야. 그런데도 괜찮다는 건가?”

“한 사람이 희생하여 다수가 행복할 수 있다면 그 정도 희생은 치를 수 있지.”

“아니, 나는 아니야.”

단 한 명의 희생이라도 그것을 기반으로 하는 안전이라면 없어지는 게 나았다. 그게 이실리스라면 더욱. 베르타스의 말을 들은 이실리스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강인한 턱선이 굳어진 것이 보였다.

“왜…….”

“언제까지 라르헨을 위해서 희생하려고 하는 거지?”

“라르헨의 황족이라면 당연히…….”

“이실리스.”

말을 자르면서 고개를 젓는 베르타스와 시선을 마주했다.

“알지 않나. 라르헨의 제국민과 귀족들이 너를 따르는 이유는 황족이기 때문이 아니야.”

“…….”

“네가 강력한 마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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