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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화. (136/161)

135화.

지긋지긋했다. 보클로엠이 이그나르도의 마법진에 잡히기 직전에 맺은 맹약 때문에 이곳에 묶인 지 몇 년인지 세는 것도 포기했다. 보클로엠도 지겨웠고 뮤르카 제국도 지겨웠다. 그 긴 시간 동안 혼자서 산을 떠돌면서 보클로엠의 목소리를 들어야 했고, 움직여야 했다.

싫은 것은 아니었다. 그 덕분에 그는 영생을 살게 되었으니. 드래곤과 반려가 된 이상, 영원히 살아갈 수 있었다. 

‘문제는 그게 아니지.’

드래곤과 맺은 반려의 맹약. 그 맹약의 허점이 문제였다. 보클로엠이 없는 그 긴 시간 동안 그가 한 것은 단 하나. 맹약을 유지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드래곤이 일방적으로 맹약을 파기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베르트는 점점 초조해졌다. 

라르헨의 결계를 깨고 마력을 회복한 보클로엠의 마력을 이그나르도의 마력석으로 묶어서 차지한다. 

‘그래야지. 그래야…….’

저 드래곤은 그의 것이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갖고 싶었다. 그 강대한 마력. 그것을 생각하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어디 있는 거지?’

그때였다. 이베르트의 눈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세드릭의 심장을 보호하듯 흐르고 있는 마력의 흐름.

‘저기로군.’

이그나르도의 마력석을 심장에 심다니. 보통이 아니었다. 이베르트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이그나르도의 마력이 그에게 달라붙기 전에 그대로 손을 세드릭의 가슴 부근에 꽂아 넣었다.

“크아아악!”

처절한 비명이 흘렀지만 보클로엠도 이베르트도 신경 쓰지 않았다. 붉은 피가 흐르고 이베르트의 손안에 이그나르도의 마력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인가?”

“그렇습니다. 위험하니 떨어지는 것이 좋겠습니다.”

보클로엠을 보자마자 달려들려는 이그나르도의 마력을 느끼면서 이베르트가 서둘러 가지고 있던 마법무구로 마력석을 감쌌다. 마력을 차단하는 천이었다. 꼼꼼하게 마력석을 싼 그가 품 안에 마력석을 넣었다.

“다 된 건가?”

“그렇습니다.”

“그럼 가지.”

저것이 어떻게 도움이 된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보클로엠은 말을 삼켰다. 오랜 시간 갇혀있던 보클로엠의 판단력이 흐려진 것이 이베르트에게는 천운이었다. 쓰러진 세드릭을 뒤로하고 지하 감옥을 빠져나가는 둘의 그림자에 어둠이 드리웠다.

* * *

“언제 이파프 제국으로 갈 거지?”

“지금이라도 당장.”

이실리스는 아침부터 그녀를 찾아온 파브리스를 마주하고 있었다. 제라드가 그녀의 행방을 알려주고 협상한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더는 피할 수 없었다. 그녀의 마력을 내주는 것은 별로 내키지 않는 일이었으나 방법이 없었다. 바다를 장악하고 있는 이파프 제국을 피해서 라르헨으로 갈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어서 가지.”

그와 그녀의 독대가 이루어지는 방의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는 자가 있었다. 방만한 태도에 권위적인 파브리스의 얼굴이 구겨졌다.

“우리도 함께 가겠다.”

보클로엠과 이베르트였다.

“저들은 누구지?”

“이곳에서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다.”

파브리스의 관심을 잘라내면서 이실리스가 말했다. 은혜를 입은 것은 그녀가 아니라 저들이었지만 저들을 라르헨으로 데려가려면 이것 외엔 방법이 없었다. 아무 이유 없이 저들을 데려가고 싶다고 하면 순순히 그러라고 말할 파브리스가 아니었다.

“그럼 저들도 같이 가야 한다는 건가?”

“그렇지.”

의아한 표정을 짓는 파브리스를 향해 이실리스는 다시 입을 열었다.

“저들도 이곳에 갇혔던 마법사니까.”

그 말에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파브리스를 보고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이실리스였다. 이렇게 긴장된 적은 처음이었다. 파브리스는 그녀의 오랜 친우였지만 이번 일로 인해 그의 다른 이면을 알게 된 이상, 어릴 적에 그러했던 것처럼 그를 대하기란 어려웠다. 그녀의 뒤에 서 있던 베르타스가 파브리스에게 입을 열었다.

“그러면 언제 출발하는 거지?”

“내일로 하지.”

한시가 급하다는 파브리스의 말에 이실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하겠다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파브리스를 붙잡지 않았다. 그가 나가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이베르트가 이실리스를 향해 입을 열었다.

“우리는 이제 이곳에 머무를 수 없다.”

정체가 들통났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제라드의 황권에 위협이 될 수도 있어 피하겠다는 그들의 말은 일리 있었다. 후대에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 나라를 빠져나가는 선대들은 역사에도 종종 나타나는 행적이었으니까.

“그런데 왜 라르헨으로 가려고 하는 겁니까?”

그게 이상했다. 굳이 라르헨으로 갈 필요는 없었다. 이파프 제국으로 숨어 들어가도 되었고 아니라면 다른 곳으로 가는 것도 가능했다. 저 둘 중 하나는 드래곤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호위 기사였다. 그런 무력을 가진 자들이 라르헨으로 들어오려고 한다는 것이 의문이었다.

“나의 고향이 그곳이니.”

“…….”

납득이 되지 않았다. 라르헨이 고향이기에 가고 싶다고 말하는 드래곤과 그 호위 기사.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기엔 그들의 무력이 상당했다. 라르헨을 위해서 그 무력을 사용할 것도 아닌 자들. 그런 자들을 라르헨으로 데리고 들어가기는 불안했다. 

그러나 의심스러우니 같이 갈 수 없다고 말할 수 없었다. 이실리스는 마음 한쪽을 묵직하게 누르는 의심을 외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저들을 강제할 수 있는 수단은 없었으니. 상대는 드래곤과 그의 호위 기사였다. 어떻게 강제할 수 있을까. 그러다 그녀의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보클로엠의 양 손목이었다.

아직도 손목에 흐르는 검은 기운을 떨쳐내지 못하는 보클로엠에게 물었다.

“그것은 왜 아직도…….”

“이그나르도의 마력은 나의 마력을 좀먹는 것으로 변하였다.”

그 말에서 숨겨진 진의를 파악할 수 있었다. 이그나르도의 마력은 보클로엠이 떨쳐낼 수 없는 마력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이그나르도가 강력한 마법사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랬는데 저 드래곤도 꼼짝하지 못할 정도의 마력이라니. 흑마법사로 알려진 이그나르도에게 숨겨진 무언가가 더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그 사람은 대체 누구기에…….”

“내가 마지막으로 믿었던 인간.”

더는 이야기 꺼내기 싫다는 듯 입을 다물어 버리는 보클로엠을 향해 말을 꺼내기 어려웠다. 그녀 또한 인간이었기에.

‘마지막으로 믿었던 인간이라면…… 배신당했다는 소리로군.’

보클로엠이 왜 저렇게 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인간을 아끼던 드래곤이었을지도 모른다. 저 보클로엠은. 그러나 그 믿음이 배신으로 돌아왔고, 그 배신으로 인해 마력을 빼앗겼다면 인간에 대한 원한이 얼마나 깊을지 짐작되었다.

그러나 그 말을 그대로 믿을 수도 없었다. 드래곤의 일방적인 주장이었다. 그것도 저들의 입맛대로 곱게 포장된. 이그나르도에 대해 재연구가 필요할 것 같았다.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라르헨으로 간다고?’

라르헨으로 가서 대체 무슨 일을 하려고 그러는 것인가. 안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생각에 이실리스는 사고의 흐름을 멈추었다.

‘너무 비약인 거겠지.’

그래. 너무 나갔다. 나라의 근간을 세워준 드래곤이 라르헨에 해를 끼칠 이유는 없겠지. 말이 없는 이실리스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는 이베르트의 시선에 입을 열었다.

“들으신 대로 내일 출발한다고 하니 같이 가시면 됩니다. 라르헨에 도착하시면 어디로 가실 예정입니까?”

“그것을 너에게 알려줄 의무는 없다.”

보클로엠의 말을 들은 베르타스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얕은 숨을 내쉰 이실리스가 보클로엠을 향해 말했다.

“제대로 말하지 않으시면 함께 갈 수 없습니다.”

“함께 갈 수 없다?”

“그렇습니다. 저는 라르헨의 안위를 책임지는 황제. 그러니 알아야겠습니다.”

“…… 라르헨 전역을 둘러보려고 한다.”

그게 다가 아닐 것 같다는 강렬한 느낌이 그녀를 휘감았다. 그것은 마법사의 직감이었다.

“…… 알겠습니다.”

내키지 않는 대답이었지만 이실리스는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달리 무슨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한 걸까. 이실리스는 나가보겠다는 둘을 잡을 수 없었다. 이베르트의 입가에 드리워진 미소가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베르타스.”

“나는 네가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모르겠다.”

그녀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는 그의 말에 이실리스가 희미하게 웃었다.

“라르헨의 모든 것은 저 보클로엠이 세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후대를 위해 베푼 것이 있는 선대이니 이 정도는 해 줄 수 있지.”

“그런 것치고 표정이 불안해 보이는군.”

이실리스의 상태를 정확하게 짚어내는 베르타스의 말에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 불안한 마음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냥 마음이 조금…….”

“좋지 않은 거로군.”

“이상하게 불안해.”

저들을 라르헨으로 데리고 가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게 불안함에 기인한 것인지 아니면 알 수 없는 이유 때문인지. 

그녀의 떨리는 손을 눈치챈 베르타스가 속삭였다.

“그렇다면 이곳에 두고 가. 이곳에 두고 간다고 해도 누구도 뭐라고 할 수 없을 거다.”

“그럴까…….”

이실리스의 말에 오히려 베르타스가 놀랐다. 그녀라면 어떻게든 해 보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

‘조금 변했군.’

고민하는 그녀에게 베르타스가 웃으며 손을 잡았다.

“괜찮을 거야.”

“그래야지.”

* * *

이파프 제국에 도착한 이실리스는 어느새 거의 회복된 마력석을 마주했다.

“멀쩡해졌군.”

“그럴 수밖에.”

이베르트의 목소리에 이실리스가 그를 돌아보았다.

“저 마력석에 있는 너의 마력을 꺼내 쓴 것은 우리였는데 보클로엠이 풀려났으니 더는 저 마력석을 건드릴 필요가 없지.”

“이……!”

베르타스가 참지 못하고 주먹을 휘둘렀다. 베르타스의 주먹에 얼굴을 내준 이베르트가 그를 향해 빙글거렸다.

“이것으로 진 빚은 갚은 거로 하지.”

일부러 맞아준 그를 보면서 베르타스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더 세게 쳤어야 했는데.’ 

얼굴에 슬쩍 멍이 들었지만 바로 마법을 사용하는 이베르트를 보면서 이를 갈았다. 

천천히 회복되는 마력석 탓에 아직 제대로 수평을 이루지 못한 이파프 제국이었다. 서서히 수평을 찾아가던 기울어진 제국의 땅이 이실리스의 매만짐으로 인해 바로 원상태가 되었다. 이미 마력석이 제법 회복된 사실을 알지 못했던 파브리스가 이실리스에게 다가와서 기쁜 듯이 말했다.

“역시. 라르헨의 황제께서는 못하는 게 없으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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