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세드릭은 어떻게 할 거지?”
이를 갈면서 말하는 이베르트의 음산한 목소리를 들은 제라드가 그를 향해 얼굴을 돌렸다. 세드릭은 현재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실리스의 마력이 그의 내부를 분탕질 쳤기에 앞으로도 마력의 사용이 불가능했다.
“그것은 왜 물으십니까.”
“내가 처리하고 싶다.”
“그것은 안 됩니다. 제국의 안위를 위협한 자이니 당연히 제가…….”
“그냥 조용히 넘어가는 것이 좋을 텐데?”
경고하듯 목소리를 낮추어 말하는 이베르트에게 눈을 크게 뜬 제라드가 물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뭘 어쩌려는 건가. 신전은 알고 보니 제대로 된 집단이 아니었다. 그래서 교황을 죽이려고 한다? 그렇게 한들 어느 누가 믿어줄 거라고 생각하나?”
“그것은…….”
“증거는 어디 있지?”
되려 세드릭의 말에 넘어가는 제국민들을 보고 싶은 게 아니라면 넘기라는 이베르트의 말에 잠시 망설이는 제라드였다.
“넘긴다면 너의 오라를 찾아주마.”
“제…… 오라를 찾을 수 있다고요?”
“그렇다.”
고개를 끄덕이는 이베르트를 보면서 이실리스는 직감했다. 제라드의 오라를 가져가 사용한 것도 보클로엠과 이베르트였다.
‘어찌 저런 자들이…….’
이 제국의 선조라고 불릴 수 있단 말인가. 아니, 라르헨에서 넘어온 자들이었으니 그녀의 선조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자신들이 위험에 처하자 그들이 보여준 그 이기적인 행태에 이실리스는 입을 다물었다. 믿을만한 자들이 아니었다. 그것이 드래곤이라 할지라도.
잠시 고민하던 제라드가 이베르트를 향해 물었다.
“정말입니까?”
“거짓은 말하지 않는다.”
다만, 진실을 숨길뿐. 입 밖으로 터져 나오려는 말을 속으로 삼킨 이실리스가 둘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제라드의 표정을 보니 이베르트의 말에 완전히 넘어갔다.
‘세드릭을 처리하면서 대체 뭘 할 생각이지?’
이쯤 되니 세드릭에게 무슨 중요한 것이 있는 게 아닌가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좋습니다.”
제라드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입꼬리를 기이하게 올리는 이베르트를 볼 수 있었다. 아주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진 표정이었지만 이실리스도, 베르타스도 그 모습을 보았다. 이실리스가 고개를 돌려 베르타스와 눈을 마주치자 베르타스가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서지 말라는 그의 생각은 그녀의 생각과 일치했다.
‘아무래도 이베르트가 숨기는 것이 있군.’
이실리스가 제라드에게 뭐라 말하려던 찰나, 시종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폐하. 해상제국의 제독께서 오셨습니다.”
이실리스와 눈을 마주하고 뒤에 서 있는 이베르트와 보클로엠에게도 시선을 잠시 둔 제라드가 입을 열었다.
“잠시 기다리라고 해라.”
제라드는 이베르트를 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천히 걸어서 벽 한쪽을 만진 그가 비밀통로를 열었다.
“여기로 들어가시죠. 끝에…….”
“알고 있다. 내가 만들었으니.”
“…… 그럼 말이 쉬워지는군요. 모두 나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외부인의 시선에 노출되는 것을 최대한 줄이고 싶다는 그의 말에 다들 걸음을 옮겼다. 알현실을 빠져나와 서니 시종장이 그들을 맞이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 *
배정받은 알뤼르의 방으로 들어온 이실리스와 베르타스는 몸 상태가 좋지 않은 그를 침대 위에 눕혔다.
“괜찮나?”
침대에 눕자마자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마력을 운용하고 있는 알뤼르를 향해 이실리스의 걱정이 쏟아졌다.
“이래 봬도 나름 괜찮은 마법사입니다. 저.”
그의 말에 쓴웃음이 흐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녀의 표정을 본 알뤼르의 표정이 더 흐려지자 이실리스는 애써 표정을 바로 했다.
“이런 모습을 보여드려 송구할 뿐입니다.”
“그런 말은 말게.”
“얼른 회복하겠습니다.”
“얼마가 걸려도 좋으니 천천히 모두.”
“명심하겠습니다. 폐하.”
좋지 않은 몸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침대에서 내려와 그녀의 앞에 무릎 꿇고 손등 위에 입술을 내리는 알뤼르를 보면서 이실리스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를 위해 희생한 알뤼르. 진정한 충신의 행동에 쉬라는 말을 남기고 그의 방을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괜찮나.”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을 눈치챈 베르타스가 그녀에게 물었다. 알뤼르를 본 후 기분이 점점 가라앉는 이실리스를 그가 끌어당겼다. 그녀의 허리를 쥔 베르타스가 바로 옆에 배정된 방으로 들어갔다. 방문이 닫히자 이실리스의 귓가에 입술을 내렸다.
“왜 그러지?”
“베르타스. 내가…….”
“왜.”
“내가 저런 충성심을 받을 정도의 사람인가?”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자신감 없는 이실리스의 목소리에 귓가를 핥으려는 것을 멈추고 베르타스가 시선을 내렸다.
“이실리스.”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을 피하면서 이실리스가 그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가려져 보이지 않는 그녀의 얼굴에 그가 이실리스의 어깨를 부드럽게 쓸었다.
“왜 그런 말을 하지?”
“마력이 없었던 나를 알잖아. 그때의 난 아무것도 아니었어.”
“아니, 그렇지 않아.”
이실리스의 머리카락에 입술을 내렸다.
“너는 라르헨의 황제이자 라르헨을 이끄는 사람. 네가 마법사가 아니었어도 상관없다.”
“나의 제국민들은 내 마력을 보고 믿고 따르는 거겠지.”
낮게 속삭이는 그녀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자꾸 어두운 쪽으로 생각하는 그녀에게 베르타스가 웃으며 물었다.
“왜 마법으로 날아가지 못하지?”
“…… 좌표를 잃어버렸다.”
“좌표를?”
이동마법은 좌표를 사용하여 움직이는 마법. 라르헨의 전역을 지배하는 광역 결계는 이실리스의 마력으로 움직이는 것이었기에 자유자재로 이동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다. 힐렌튼으로 넘어갈 때는 대단위 마법이었기에 마법진이 필요했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실리스는 보클로엠에게 마력을 빼앗겼다가 회복한 상황. 그녀가 가진 좌표, 심어놓은 마력은 모두 사라졌고 지금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사람은 선황이었다.
“나는 할 수 있는 게 없군.”
“이실리스.”
“이런 자를 어떻게 황제라고 믿고 따를 수 있단 말인가.”
그래도 베르타스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나는 너의 마력을 보고 따르는 것이 아니야.”
“베르타스.”
“이런 나로는 부족한가? 우리 황제 폐하께서는 욕심이 많으시군.”
“그런 소리가 아니라……!”
이실리스를 안아 올려 그대로 침대 위에 눕힌 그가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내렸다.
“나로는 부족하냐고.”
“그게 아니고…… 하읏!”
귓가를 할짝이면서 말하는 베르타스의 낮은 목소리에 이실리스가 얕은 신음을 뱉었다.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자조 섞인 목소리는. 제국민이 안 따르면 어떠한가, 내가 있는데. 저 좋을 대로 생각한 베르타스는 이실리스의 몸을 움켜쥐었지만, 다시 마력을 발동하는 그녀를 느껴야만 했다.
* * *
안내하는 기사를 따라 걷던 이베르트와 보클로엠은 지하 감옥 앞에 섰다. 쇠사슬에 묶인 세드릭의 모습이 쇠창살 너머로 보였고 그의 밑에서 환히 빛나고 있는 또 다른 이그나르도의 마법진을 볼 수 있었다.
“자네는 그만 가보게.”
이베르트가 기사를 향해 말하자 잠시 그의 얼굴을 바라보던 기사는 감옥의 열쇠를 넘기고 사라졌다. 제라드에게서 뭐든 원하는 대로 해 주라는 말을 들은 기사였다. 저 멀리 기사의 기척이 사라지자 보클로엠이 이베르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오라를 정말 돌려줄 건가? 그게 없으면…….”
“보클로엠님.”
제라드의 오라는 보클로엠과 상성이 제법 맞아떨어지는 것이었다. 그 흡수한 오라를 보클로엠이 지니고 있었다. 그 오라를 내준다는 것은 보클로엠의 힘이 그만큼 사라진다는 것을 뜻했다.
“소를 내주고 대를 취해야겠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제라드의 오라를 내주고 세드릭의 것을 취해야죠.”
입꼬리를 올려 웃는 이베르트의 얼굴은 흡사 광인의 그것과 같았다.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본 보클로엠마저도 몸을 흠칫할 정도로 기이했다.
‘설마 광기에 사로잡힌 것은 아니겠지.’
드래곤의 반려가 드래곤의 넘쳐나는 마력을 제대로 견디지 못하고 미쳐버리는 경우는 종종 있었다.
‘마력이 강한 이베르트였기에 그럴 일이 없을 것이라 여겼는데 아니었나.’
이대로라면 동료 드래곤들에게 돌아가기 전에 이베르트를 버려야 할 수도 있었다. 드래곤의 반려란 그런 것이었으니. 소모품에 지나지 않았다. 반려가 마뜩잖다면 새로운 반려를 맞이하면 되는 것. 더 강한 힘을 가진 자로. 반려와 하는 드래곤의 맹약은 드래곤의 마력이 반려보다 강하다면 드래곤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었다.
설령 생을 같이하는 둘이어도 드래곤이 원한다면 일방적으로 깨어질 수 있는 것. 그것이 드래곤의 반려맹약. 지금의 이베르트는 보클로엠과의 맹약이 깨진다면 바로 먼지로 변할 것이 분명했다. 그는 너무 오래 살았다.
‘이그나르도가 딱이었지.’
반려로 맞이하려는 보클로엠의 기색을 눈치챈 이그나르도가 되려 반대로 보클로엠의 마력을 가로챈 것이었다. 이베르트와의 맹약은 이그나르도의 마법진에 갇히기 직전이었다. 보클로엠의 주변에 이베르트보다 나은 자가 있었다면 그와 맹약을 맺지 않았을 터. 생각할수록 아쉬웠다.
지하 감옥의 문을 연 이베르트가 천천히 세드릭을 향해 걸었다. 이그나르도의 마법진에서 검은 기운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 기운을 목격한 보클로엠이 질린 표정을 지었다. 이그나르도의 마법진은 끝이 없었다. 이 정도 마법진을 구축한 이그나르도의 마력은 대체 얼마나 강력했다는 것인지.
“세드릭.”
이베르트가 조용히 그를 불렀다. 세드릭은 마법진에 갇혀 힘겹게 숨을 내쉬고 있었다.
“이그나르도의 마력이 담긴 그 물건은 어디 있지? 네가 계속 들고 다니던 것 말이다.”
“내…… 내가, 내어 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말하는 세드릭은 회생이 불가능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실리스의 마력이 움직이면서 그의 마력이 흘러가는 길을 망가뜨렸고, 이그나르도의 마법진에 갇히자 비정상적인 마력의 흐름이 점점 강해졌다. 누군가 그를 죽이지 않아도 그는 곧 생을 다한다.
“어차피 너에겐 필요 없는 물건이 아닌가.”
그를 향해 작게 속삭이는 이베르트의 눈에서 광기가 흘렀다.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보클로엠이 이베르트를 향해 의아한 듯 물었다.
“그것이 뭔가?”
“이그나르도의 마력. 그 마력의 정수를 담은 마력석입니다.”
“그런 것이 있다고?”
“그렇습니다.”
잠시 생각한 보클로엠이 이상한 표정으로 이베르트를 바라보았다.
“이그나르도의 마력은 나와 맞지 않는 것으로 변질되었는데 그게 필요하다고?”
“상극인 것은 서로 통하는 법. 그게 있으면 보클로엠님께 도움이 됩니다.”
무슨 도움이 된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보클로엠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반려의 맹약을 맺은 이베르트가 해가 될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일방적인 헌신을 요구하는 것. 그것이 바로 드래곤의 반려 맹약이었다.
“줄…… 줄 수 없다.”
“너는 내놓게 될 거다.”
이베르트가 세드릭을 향해 손을 뻗었다.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는 세드릭을 보면서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만큼 중요한 것이라면 몸에서 떼어둘 리 없지.’
세드릭의 몸을 잡은 이그나르도의 마법진을 천천히 살폈다. 마법진에 가까이 가는 순간 그도 위험할 수 있었기에 이베르트는 마법진에 손을 대지 않으려 노력했다. 이그나르도의 정수를 담은 마력석이 필요했다. 그게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환희에 찬 그 순간을 이베르트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게 있으면…… 보클로엠의 마력을 차지할 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