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3화. (134/161)

133화.

“괜찮으십니까?”

“아니, 안 괜찮아.”

보클로엠은 이베르트의 말에 즉답했다. 이런 꼴을 당한 것은 처음이었다. 아들과도 같았던 이그나르도의 배신으로 인해 생긴 일이었다. 인간을 믿으면 안 된다는 동료들의 말을 무시하고 인간과 함께 생활했다 벌어진 일에 보클로엠은 이를 갈았다.

“내가 그들에게 어찌했는데!”

“진정하십시오.”

반려라고는 하나 드래곤과 인간과의 관계는 일반적인 반려와는 달랐다. 드래곤과 드래곤의 수호 기사. 그게 반려였다.

보클로엠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 모멸감을 잊을 수 없었다. 이그나르도는 보클로엠이 처음으로 마음을 주었던 자였다. 함께하는 시간이 길었고 라르헨을 함께 떠나자는 그의 부탁에 기꺼이 이곳, 뮤르카 제국으로 넘어왔다. 허나, 전부 그의 속살거림에 속은 것이었다.

“처음부터 이러려고 나를……!”

“진정하셔야 합니다.”

분노하는 보클로엠을 다독이면서 이베르트가 속삭였다.

“아직 마력이 다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나도 알아. 영원히 회복되지 않는다는 것도.”

이그나르도의 마법진은 보클로엠의 마력에 커다란 상처를 남겼다. 비정상적으로 흘러간 마력의 흐름이 분탕질 친 보클로엠의 몸은 정상으로 돌아오기 힘들 터였다. 뼈아픈 실책이었다. 그를 믿어 그에게 마력을 내준 것이.

“보클로엠님.”

작은 목소리로 부르는 이베르트의 말에 보클로엠이 시선을 돌렸다.

“라르헨으로 갑시다.”

“라르헨?”

“그곳에 만들어 놓은 결계. 그 결계는 보클로엠님의 마력으로 유지된 것이 아닙니까. 그 마력을 회수하면 됩니다.”

“이베르트.”

낮은 목소리로 그를 부르는 보클로엠에게 이베르트가 어깨를 으쓱했다.

“뭘 망설이십니까.”

“…….”

“라르헨의 이그나르도가 보클로엠님을 이렇게 만든 것 아닙니까.”

그의 말에 보클로엠이 이를 갈았다. 그랬다. 이그나르도 또한 라르헨의 사람이었다. 은혜를 베풀었는데 그 은혜를 악의로 갚았다. 

‘이래서 사람을 믿지 말라고 한 것인가.’

하나를 내줬더니 더 많은 것을 원했다.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머나먼 타국에서 보클로엠은 마법진에 묶였고, 마력을 빼앗겼다. 풀려난 지금도 제대로 마력을 사용할 수 없었다. 평생을 이런 상실감을 느끼면서 살아가야 했다.

“그러나 나는 저들의 도움을 받았다.”

“저들이 도움을 주는 것은 당연합니다. 당신을 구하지 않았다면 마력도 되찾을 수 없었으니까요.”

“그래도…….”

“평생 이렇게 사실 수는 없습니다. 반쪽짜리 드래곤으로 생을 마감하실 겁니까?”

제 상태를 정확하게 파악한 이베르트의 말에 보클로엠은 갈등했다. 뭐라 말하기가 어려웠다. 복잡했다. 스스로를 위한다면 라르헨의 결계에 심어 있는 마력을 회수하는 것이 맞았다. 그러나 저들은 생면부지인 보클로엠을 위해서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도 도움을 주었다.

“이그나르도의 일을 잊으신 것은 아니지요? 저들도 언제든 등을 돌릴 수 있습니다.”

“그것은 너도 마찬가지 아닌가.”

“그들과 저는 다릅니다. 당신께 맹세한 수호 기사 아닙니까.”

“…….”

속살거리는 이베르트의 말을 그냥 넘길 수 없었다. 마력을 되찾는 가장 쉬운 방법이었다. 그 방법을 두고 돌아간다는 것은 말이 되질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보클로엠이 이베르트에게 말했다.

“일단 라르헨으로 간 후, 결정한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이베르트가 보클로엠에게 고개를 숙였다. 이게 맞았다. 드래곤을 수호하는 이베르트의 입장에서 중요한 것은 라르헨이 아니었다. 마력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드래곤은 잘못하면 다른 마법사들의 연구 대상이 된다. 보클로엠이 연구 자료가 되어 생을 마감한다면 이베르트도 무사할 수 없었다. 이것은 생존의 문제였다.

* * *

보클로엠과 이베르트, 이실리스와 베르타스 그리고 알뤼르는 세드릭을 끌고 뮤르카 제국의 황성으로 향했다. 황성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제라드는 잡혀온 세드릭을 보고 놀랐고, 이베르트의 얼굴을 보고 다시 한번 놀랐다.

“아니……!”

주변에 보는 눈이 많았기에 입을 다무는 그를 보면서 이실리스가 빙긋 웃었다. 생각보다 라르헨으로 돌아가는 일이 쉬워질 것 같았다. 모든 것을 해결하고 제라드에게 간다고 해도 그가 라르헨으로 그들을 돌려보낼지 의문이었다.

“어떻게 된 거지?”

주변 사람들을 물리자마자 묻는 그의 목소리엔 다급함이 묻어났다. 당황하는 그 얼굴을 본 이실리스가 웃었다. 

“보는 그대로.”

더는 설명하지 않는 그녀의 말에 제라드가 외려 당황했다.

“저자는 누구인가?”

“선조에게 저자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후손이라니.”

이실리스의 앞으로 나선 이베르트가 제라드에게 핀잔을 주었다. 그의 말을 듣고도 믿기지 않는 표정을 짓는 제라드에게 이베르트는 쐐기를 박았다.

“나는 이 뮤르카 제국을 건설한 초대 황제. 이베르트 뮤르카다.”

“…… 말도 안 돼.”

중얼거리는 제라드는 거의 넋이 나가 있었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이 제국을 세운 사람이 살아있다는 말은 누구도 믿지 못할 말이었다.

“그렇다면 설마…….”

그러다 이베르트의 옆에 있는 보클로엠에게 눈이 갔다. 그 얼굴을 확인한 제라드가 ‘헉’하는 소리와 함께 숨이 멈추었다. 생각이 멈추고 아무것도 판단할 수 없었다. 설마가 사실이었다.

“아마 황실 서고에 있는 책을 읽었겠지? 내가 드래곤과 반려의 맹약을 맺었다는 것을 말이다.”

확언하는 이베르트에게 제라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믿어지지 않는다는 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놀라 넋이 나가 있었다.

‘저들을…….’

그의 치세에 나타난 저 둘을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드래곤과 그의 반려라니. 제국민들이 안다면 반길 것이 분명했다. 

‘아니, 나를 밀어내려고 하겠지.’

힘이 없는 황제는 필요 없었다. 교황이 잡혀 온 것을 직접 본 제라드였다. 개 같이 끌려온 그의 모습을 본 제라드는 말을 잃었다. 평생을 적대하던 라이벌이었다. 그랬는데 저들의 손에 질질 끌려온 모습을 보니 그들의 위용을 알만했다. 너절한 교황의 모습을 본 황궁 사람들의 입을 단속하느라 그의 기사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그랬는데…… 이런 상황이라니.”

한숨을 내쉬면서 한탄하듯 읊조리는 제라드의 말에 이실리스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의 사정이 어떠하든 이베르트의 말이 이어졌다.

“이곳 뮤르카 제국을 노리는 마물들은 저 세드릭이란 자가 내가 관리하던 것을 빼낸 것이다.”

“마……물 말입니까?”

“그렇다.”

어쩐지. 신전이 등장할 때마다 마물들을 물리치는 것을 보고 이상함을 느꼈다. 왜 항상 마물은 신전의 힘이 약해질 때 등장하여 그들의 무력을 보여주는 수단이 되는 걸까. 궁금하게 여겼던 모든 수수께끼가 해결되었다. 생각에 잠긴 제라드를 향해 이실리스가 입을 열었다.

“제라드 뮤르카. 그대에게 청이 하나 있다.”

“무엇이지?”

“우리가 라르헨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다오.”

“라르헨? 이파프 제국이 아니고?”

이파프 제국이 아닌 라르헨으로 돌아가게 해달라는 이실리스의 말에 의문을 느끼는 제라드에게 깊게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파브리스의 이중적인 면을 본 이상, 그에게 인정을 베풀 필요는 없었다. 

이파프 제국을 도왔던 것은 라르헨과 이파프의 계약 때문이었다. 그 계약은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것. 그 신뢰가 깨진 이상, 그 계약이 무사할 리 없었다. 그리고 먼저 신뢰를 깬 것은 파브리스였다.

“라르헨으로.”

아직 베르타스와 이실리스가 알뤼르를 데리고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지 못한 파브리스였다. 그가 그 소식을 듣기 전에 이 뮤르카 제국을 벗어나야 했다. 그게 이실리스의 생각이었다.

이실리스의 말을 들은 베르타스는 생각에 잠겼다. 그녀가 이파프 제국을 돕는 것은 탐탁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약속했다. 도와준다면, 이파프 제국이 잠기지 않도록 돕겠다고. 이실리스의 결정을 지지하면서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개인을 위해 이실리스가 움직여야 하는가.’

이파프 제국의 파브리스는 이실리스의 신뢰를 잃었다. 그가 아는 그녀는 신뢰가 없는 자에게 도움을 베푸는 사람이 아니다. 이실리스는 호불호가 확실한 사람이었다. 지금 이파프 제국에 대한 그녀의 감정은 불호였다.

그렇다고 그냥 두자니 약속이 걸렸다.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라르헨을 보호하는 것조차 싫어했던 그가 이실리스를 향해서 다른 제국을 도와달라는 소리를 하다니. 그럴 수는 없었다.

“지금은 갈 수 없다.”

“지금은 갈 수 없다고?”

“그렇다.”

제라드의 말에 이실리스의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그런 그녀를 불만스러운 눈으로 바라본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바닷길이 막혔다.”

“바닷길이 막히다니.”

“이파프 제국에서 이곳을 나갈 수 있는 모든 해로를 막았다고. 협상이 끝날 때까지 아무도 나갈 수 없다.”

“뭐?”

사실을 알지 못했던 이실리스가 당황했다. 금방 라르헨으로 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니. 파브리스가 어떤 ‘협상’을 위해서 이곳에 온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협상’이 아니라 ‘협박’이라니.

‘이렇게 해적질을 하고 있던 거였군.’

몰랐던 다른 이면을 알게 된 이실리스가 고개를 저었다. 파면 팔수록 끝이 없었다. 이파프 제국의 도적질은.

“그런 자들을 위해서 내가…….”

“뭐라고 하였나.”

“아니.”

이실리스의 중얼거림을 제대로 듣지 못한 제라드가 물었으나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제국 간의 거래였지만 그녀가 제공한 마력을 갖고 다른 제국을 등쳐먹는 짓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들이 바닷길을 열어야 라르헨으로 갈 수 있다.”

“방법이 없나?”

“그대들이 타고 왔던 잠수정은 이미 없어.”

“뭐?”

“신력을 불어 넣으면 다른 곳으로 넘어가게끔 작동이 되어있었더군. 신관 한 명이 잠수정을 타고 다른 곳으로 도망갔다. 그자를 쫓고 있지.”

제라드의 입에서 나온 말에 이실리스의 얼굴이 굳었다. 하다 안 되면 잠수정이라도 타고 나갈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되면 파브리스를 마주하지 않고는 이곳을 빠져나갈 수 없었다. 그녀의 말에 이상함을 느낀 베르타스가 의문 어린 눈으로 이실리스를 바라보았지만 그에게 자세한 것을 이 자리에서 설명할 수 없었다.

“협상이 끝날 때까지…… 얼마나 걸리지?”

“적어도 한 달은 걸리겠군. 해상 제독의 요구가 생각보다 들어주기 힘든 것이어서.”

그 말을 들은 이실리스가 생각에 잠겼다. 파브리스와 마주하고 싶지 않아 몰래 빠져나가려고 했는데 이렇게 되면 방법이 없었다.

‘약속은 약속이었으니.’

이파프 제국의 중추에 마력을 넣어주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나도 변했군.’

이전의 그녀였다면 책임감에 무조건 해결하려고 했을 거다. 그랬는데 이번 일을 겪고 나서 생각하는 것이 약간 변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약간’이지만 베르타스가 보기엔 ‘많이’인 변화. 그녀가 정했던 틀을 깨고 한 걸음 세상 밖으로 나섰다.

이실리스의 세상은 그렇게 더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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