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이그나르도의 마법을 완전히 떨쳐내지 못한 보클로엠이 손목에 검은 마력을 두르고 인간의 형상을 띠고 있었다.
“아이라니…….”
“너무 늦게 왔구나.”
도와준 것에 대한 감사도 없이 늦게 왔다 타박하는 보클로엠을 보면서 베르타스는 기막힌 표정을 지었다.
‘옴짝달싹 못 하는 것을 도와줬더니 뭐가 어쩌고 저째?’
그가 움찔하면서 움직이려는 것을 이실리스가 말렸다. 그의 손을 살짝 잡은 이실리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위대한 존재께서 이런 일을 당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나도 알지 못하였다.”
심드렁하게 말하는 보클로엠의 손목엔 아직도 이그나르도의 검은 마력이 흐르고 있었다. 완벽하게 이그나르도의 마법을 파훼하긴 어려워 보였다. 드래곤의 힘으로도 어쩔 수 없는 것을 이실리스가 무슨 방법으로 없앨 수 있단 말인가.
“어쨌든 수고했다.”
성의 없이 말하는 보클로엠을 보고 베르타스가 칼을 빼들려고 하다가 이실리스의 손에 가로막혔다. 그의 칼집 위로 손을 대는 이실리스를 의문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베르타스를 향해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이제 어디로 가십니까?”
“나의 반려를 찾으러 가야겠다.”
안내하라는 보클로엠의 행동에 베르타스는 벙찐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봐도 이해할 수 없었다. 저런 안하무인 격인 행동을 이실리스가 왜 참아주는지.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자 보클로엠이 그녀를 닦달했다.
“안내해라.”
앞서 걸음을 옮기는 이실리스에게 베르타스가 다가섰다.
“대체 저 헛소리를 왜 듣고 있는 거지?”
“베르타스.”
“대체 왜?”
“드래곤은 우리의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야.”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했지만, 말을 아끼는 이실리스를 보면서 베르타스는 점점 더 혼란스러웠다.
가는 길은 수월했으나 곳곳에 이그나르도의 마법진이 존재했다. 마치 그 마법진을 파훼하기 위해 이실리스를 앞장세운 것처럼 마법진이 파훼되고 나서야 걸음을 걷는 보클로엠의 모습에 베르타스가 이를 갈았다.
신관들이 신력을 일으켜서 달려들려고 하다가 나타나지 않는 신력에 당황하기 일쑤였다. 그뿐이랴. 뒤에서 질질 끌려오는 세드릭을 목격한 신관들은 멀리 줄행랑을 쳐버렸다.
“알뤼르를 찾아야 합니다.”
“나는 그냥 가고 싶다.”
이실리스의 말에 반대하는 보클로엠을 보면서 베르타스가 인상을 썼다. 이 신전에 들어온 진짜 목적은 이실리스의 마력을 찾는 것도 아니오, 보클로엠을 구하는 것도 아니었다. 단 하나, 알뤼르를 구하기 위함이었다.
이실리스의 마력을 찾은 것은 우연이었다. 비밀통로로 들어갔더니 그 끝이 보클로엠이 갇힌 곳이라는 것을 누가 알았겠는가. 알았다면 베르타스는 절대 이 길로 오지 않았을 것이다.
“저는 찾아야 합니다. 그가 없이는 갈 수 없습니다.”
이실리스가 없이 보클로엠은 이곳을 나갈 수 없었다. 이그나르도의 마법진이 여기저기 설치되어 있는 신전에서 안전하게 빠져나가려면 보클로엠은 무조건 이실리스와 함께 해야 했다.
앞서나가는 그녀의 뒤를 따르면서 아무 말도 없는 보클로엠을 보면서 베르타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실리스가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인가.’
지금은 그런 것이겠지. 지상 최고의 존재라는 드래곤이 실제로 있다는 것도 믿기 어려운데 눈앞에 돌아다니는 존재는 그가 생각했던 드래곤이 아니었다.
저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생물. 그게 베르타스가 본 드래곤이었다.
“이쪽이야.”
이실리스의 안내에 따라서 베르타스도 걸었다. 이실리스를 앞장서게 하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알뤼르의 마력 파장을 알고 있는 이실리스만이 그가 있는 곳을 찾을 수 있었으니.
“점점 힘이 약해지고 있어.”
“힘이 약해진다고?”
“이그나르도의 마법진 때문인 것 같군.”
중얼거리듯 말하는 이실리스의 혼잣말이 귀에 꽂혔다. 알뤼르가 마법진에 갇혀 제대로 움직이지 못한다는 소리에 마음이 착잡했다.
이실리스도 마찬가지였다. 이대로 가면 알뤼르는 제대로 마력을 사용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마법진을 파훼해야 해.’
알뤼르의 마력을 쥐고 있는 이그나르도의 마법진을 파훼해야 했다. 그래야 알뤼르의 마력이 정상적으로 돌아온다. 그에게 그녀가 느꼈던 그 공허함과 상실감을 느끼게 할 수 없었다.
‘나로 족해.’
그녀를 구하려다 위험에 처한 충신이었다. 알뤼르는 충분한 자격이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실리스의 앞에 방이 하나 나타났다. 네모난 구멍이 나 있는 방은 고통스러워하는 알뤼르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알뤼르!”
그의 모습을 본 베르타스가 외쳤다.
“비켜서.”
베르타스에게 경고하듯 목소리를 내리깐 이실리스가 마력을 일으켰다. 붉은 마력이 그녀의 몸을 휘감았다가 문으로 향해 쏘아졌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부서지자 이그나르도의 마법진에서 검은 기운이 흘러나왔다. 가늘게 눈을 뜬 알뤼르가 이실리스를 보고 입을 열었다.
“폐……. 폐하.”
작아 들리지도 않을 목소리였지만 이실리스의 귀에는 천둥처럼 커다랗게 들렸다. 그녀의 귀를 때리는 알뤼르의 목소리를 듣자 더는 망설일 수 없었다. 그대로 마력을 일으켰고 이그나르도의 마법진에 마력을 쏘아보냈다.
“이실리스!”
붉은 마력의 위로 검은 기운이 일렁이는 것을 목격한 베르타스가 외쳤다. 그러나 이실리스는 아무런 답을 할 수 없었다. 집중이 깨어지면 모두 허사다.
그녀의 마력 위로 올라오던 검은 기운은 그녀가 마법진의 마력핵을 잡아채자 다른 곳으로 방향을 틀었다. 보클로엠이 있는 곳이었다.
“허헉!”
아무 방비 없이 이그나르도의 검은 마력에 노출된 보클로엠은 그대로 마력을 내어주었다. 보클로엠의 반대쪽 팔에 곧장 검은 마력이 둥글게 둘러졌다. 양팔에 검은 마력을 두르고 있는 보클로엠의 모습은 기이했다.
반항하던 이그나르도의 마력은 보클로엠을 차지하고 나서 잠잠해졌고 알뤼르를 놓았다. 그러나 이실리스는 거기서 끝내지 않았다. 그녀의 마력에 닿은 이그나르도의 마력핵을 끄집어내서 그녀의 마력으로 둘렀다.
“이것은 위험하니 나가서 파괴해야 할 것 같아.”
그녀의 말을 들은 베르타스가 알뤼르를 부축하다 말고 고개를 끄덕였다. 신전 곳곳에 이그나르도의 마법진이 있는 이상, 이곳에서 함부로 마법진의 마력핵을 다루었다가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알뤼르 정신이 드나?”
베르타스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알뤼르를 붙들고 흔들자 이실리스가 입을 열었다.
“지금 당장 정신을 차리기는 힘들 거야. 마력이 다 돌아오지 않았어.”
천천히 마력을 운용해야 모든 마력을 찾을 수 있다. 함부로 마력을 움직였다가 약해진 육신이 되려 마력에 잡아먹힐 수 있었다. 그 말에 잠시 이실리스를 바라보던 베르타스가 알뤼르를 업었다.
이실리스의 마력에 묶인 세드릭이 정신을 차리는 것이 느껴지자 이실리스는 다시 마력을 쏘아보냈다. 그녀의 마력과 충돌한 세드릭의 신력 아니, 마력이 분탕질을 쳤고 그 충격으로 인해 세드릭이 울컥하고 피를 토했다.
“큭!”
피투성이가 된 채로 정신을 잃었으나 그에게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냥 죽이고 가자니까.”
베르타스의 말에 이실리스가 눈짓했다. 보클로엠을 가리키는 그 눈짓에 열리려던 베르타스의 입이 다물어졌다. 그냥 죽일 수 없다는 보클로엠의 의견에 따라 여기까지 마력으로 묶어서 끌고 왔다.
‘스스로 할 것이지…….’
베르타스의 불만은 극에 달했다. 그리고 그 불만은 이베르트를 보았을 때 더 커졌다. 기운을 느낀 이베르트가 신전 앞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서 있었다.
반가워하며 뛰어오던 그가 보클로엠을 발견하더니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반려……. 라더니?’
그 이상한 모양새에 베르타스가 의문 어린 눈으로 이실리스를 바라보았다. 검지를 입에 대는 그녀는 무언가 알고 있는 듯했다.
“기다렸습니다.”
“마력이 부족했다.”
“모두 제 불찰입니다.”
보클로엠의 말에 송구한 듯 말하는 이베르트를 보면서 베르타스는 그가 가졌던 반려에 대한 생각을 바꾸었다. 저건 정상적인 관계가 아니었다.
‘마치 종과 주인의 관계 같지 않은가.’
그러고 보니 이베르트와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다. 산의 주인을 대신해서 이 산을 지키는 자라고 했던가. 그것이 은유적인 표현인 것으로 생각했는데 아니었다니. 말 그대로였다니.
‘드래곤의 반려라는 것은 드래곤을 수호하는 자를 의미하는 것인가.’
베르타스의 의문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내색할 수 없었다. 이베르트를 만난 보클로엠의 얼굴은 한결 편해 보였다.
“고맙다.”
이베르트의 말에서 그들을 향한 감사 인사가 나왔다. 그제야 마음이 조금 풀어졌다. 베르타스는 한숨을 내쉬다가 정신을 차렸다.
‘저들이 잘못한 것이지 내가 잘못한 것이 아니지 않은가.’
고작 감사의 말 한마디만 남기고 둘을 내버려 둔 채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겨 대화하는 그들을 바라보던 베르타스가 이실리스에게 물었다.
“왜 저걸 봐 주는 거지?”
“드래곤은 우리의 사고로 판단할 수 있는 자가 아니야. 모든 마력의 근원이자 라르헨의 근본. 아마 저 보클로엠이 라르헨을 세운 초대 황제의 친우였을 가능성이 커.”
“뭐?”
“그러니 저렇게 당당한 거겠지. 그만큼 은혜를 베풀었으니 받아도 된다는 것.”
“은혜를 베풀어?”
“라르헨의 결계를 세워준 드래곤일 거야.”
“라르헨의 결계를 세워주다니……. 초대 황제가 세운 것이 아닌가?”
“아니. 황제가 되는 자에게만 알려주는 것이지.”
이실리스의 말에 베르타스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초대 황제가 세운 결계로 유명한 라르헨의 결계가 사실은 초대 황제가 아닌 드래곤이 세운 것이라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큰 파장을 불러일으킬 것이 뻔했다.
‘황제에게만 알려주다니.’
새삼 라르헨 황족들의 폐쇄성에 대해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 그 은혜를 이제야 되돌려 받는다고?”
“드래곤의 시간은 우리와 다르다.”
단언하는 이실리스의 말에 베르타스는 말을 잇지 못했다. 저런 자와 계속 같이 다녀야 한다니. 언젠가 분노가 터질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그가 고개를 저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 거지?”
“일단 라르헨으로 돌아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