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1화. (132/161)

131화.

세드릭의 얼굴을 보자마자 베르타스가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도 신력을 일으켜 저항했다. 아니, 마력을 일으켜 저항했다.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붉은 기운을 눈치챈 이실리스가 손을 뻗었다. 그가 사용하는 마력은 그녀의 것이었다.

‘그렇다면…….’

흡수하면 조금 더 나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가느다란 손이 세드릭을 향해 뻗어졌다. 그렇게 하면 저 마력을 가져올 수 있을 것 같았다. 손에 닿지 않는 마력을 향해 손을 더 힘껏 뻗었고 그것을 눈치챈 베르타스가 세드릭의 마력을 오라로 쳐냈다.

“이실리스!”

그의 부름을 들은 이실리스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있는 곳으로 날아오는 마력을 목격한 이실리스는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간의 집중이 깨져 이그나르도의 마법진 안으로 더 많은 마력이 새어 들어갔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힘이 확 풀리고 무릎이 꺾였다. 이마에서 땀이 비 오듯이 쏟아졌다. 뽑혀 나가는 마력을 채워야 했다. 일어난 그녀가 다시 한번 손을 뻗었다. 베르타스가 쳐낸 마력이 그녀의 손끝에 간신히 닿았다. 

마력이 그녀의 손에 닿자마자 환한 빛과 함께 그녀에게 흡수되었다.

‘됐어!’

차원이 다른 힘이었다. 제 몸 안에 차오르는 충만감을 느끼는 이실리스의 얼굴에 미소가 그려졌다. 이실리스의 마력과 보클로엠의 마력 그리고 이그나르도의 마력이 한데 뭉쳐 마법진 안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마력의 상성이 좋은 것이 이상하다는 의문을 가지기도 전에 이실리스는 마력을 움직이며 환하게 웃었다. 그 얼굴을 정면으로 본 세드릭이 외쳤다.

“안 돼!”

마법진으로 흘러 들어가는 마력을 확인한 그녀가 동그랗게 걸리는 무언가를 찾았다. 마법진의 핵심이 되는 마력핵이었다. 그것을 찾은 그녀의 얼굴에 더욱더 짙은 미소가 걸렸다. 그녀의 마력을 끌어들이는 그곳으로 일부러 마력을 집어넣은 이실리스가 마력핵을 뽑아냈다.

“끼이이익!”

귀를 찢는 듯한 마찰음에 베르타스가 황급히 오라를 둘렀다. 망연자실한 표정의 세드릭은 잠시 주춤했다가 이실리스를 향해 마력을 쏟아부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검게 일렁이던 이그나르도의 마법진에서 검은 기운이 솟구쳤다.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듯 보클로엠의 마력을 끌어당기는 이그나르도의 마법진을 보면서 모두 말을 잃었다.

방의 천장까지 치솟은 검은 마력이 그대로 머리 위로 쏟아지다가 흩어졌다.

“…….”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보클로엠의 움직임에 모두 시선을 빼앗겼기 때문이었다. 거대한 몸이 조금씩 움직이다가 이내 그 움직임이 점점 커졌다.

“안 돼! 안 돼!”

갑자기 발작적으로 소리 지르는 세드릭의 외침에 보클로엠의 눈동자가 그를 향해 돌아갔다. 서늘한 그 눈빛에 세드릭이 흠칫하는 것이 보였다. 잠시 멈칫하던 그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이그나르도의 마력이 들어있는 물건이었다. 그것을 본 이실리스가 손을 뻗어 마력을 쏘아 보냈다. 순간적으로 손에 힘이 풀린 그가 물건을 떨어뜨리자 보클로엠의 마력이 그것을 감싸 물건을 끌어당겼다.

‘펑!’하는 소리와 함께 보클로엠의 앞에서 물건이 터졌다. 그것을 본 세드릭이 환희의 미소를 지었다.

“너는 절대 빠져나갈 수 없다!”

외치는 그의 목소리에 광기가 서려 있어 이실리스와 베르타스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던 베르타스가 그를 향해 검을 휘둘렀고 세드릭의 마력이 그의 검을 잡아채려다 흩어졌다. 보클로엠의 마력이 더는 세드릭의 말을 듣지 않았다. 마력을 믿고 제대로 방어하지 않던 세드릭은 베르타스의 검에 깊게 상처를 입었다.

“크윽!”

어깨를 베인 그가 소리를 질렀다. 커다랗던 보클로엠의 움직임은 서서히 잦아들었다. 앞에서 이그나르도의 마력석이 터진 것이 그 이유였다. 마력석에서 쏟아진 이그나르도의 마력이 보클로엠을 휘감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이실리스가 그녀의 마력을 급히 회수하기 위해 움직였다.

‘지금이 아니면 기회는 없어.’

그녀의 판단은 정확했다. 이그나르도의 마력은 보클로엠을 붙들고 있었고 마법진을 회복하기 위해 꿈틀거리고 있었다. 둘의 마력이 충돌하는 틈을 타 이실리스는 그녀의 마력을 찾아냈다.

“드디어!”

원래 지니고 있던 모든 마력을 찾아낸 이실리스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처절하게 버티던 세드릭과 검을 휘두르던 베르타스의 움직임이 느려졌다. 휘몰아치는 이실리스의 붉은 마력이 주위를 짓눌렀다. 

가볍게 손을 저은 그녀가 세드릭을 향해 말했다.

“꿇어라.”

이실리스의 마력에 짓눌린 세드릭이 어깨에 피를 흘리면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녀의 마력은 그가 어찌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이것은……!”

“이게 네가 탐했던 나의 마력. 보클로엠이 나에게서 빼앗은 것.”

그녀의 손안에서 붉은 소용돌이가 일었다. 그동안 이것이 없어서 얼마나 마음 졸였던가. 아니, 약자의 위치에서 약자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꼈던 이실리스였다. 

‘가만히 두지 않겠다. 나를 능멸했던 보클로엠과 이베르트도.’

그녀의 싸늘한 시선이 이그나르도의 마력과 싸우고 있는 보클로엠을 향했다.

이그나르도의 마력이 보클로엠을 놓아주지 않으려고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마법진으로 다시 흡수되는 보클로엠의 마력을 본 이실리스가 혀를 찼다. 마력의 시초라는 존재가 왜 이렇게 약한 것인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유독 이그나르도의 마법에 힘을 쓰지 못하는 것은 왜인가.

“죽어라!”

그녀의 마력에 짓눌려 있던 세드릭이 그녀를 향해 뛰어들었다. 예의 주시하고 있던 베르타스가 이실리스의 앞으로 달렸고 세드릭이 숨기고 있던 칼에 팔을 내어줬다.

“베르타스!”

그의 이름을 부르는 이실리스의 목소리가 석실 안을 울렸고 곧바로 붉은 마력이 세드릭을 향했다.

“크아악!”

거대한 마력의 움직임에 세드릭은 정신을 잃었다.

“괜찮은가?”

흔들리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그녀의 앞에서 쓰러지려는 베르타스를 마력으로 부여잡은 이실리스가 급하게 그의 안색을 살폈다. 눈을 감고 쓰러진 그의 입술이 검은색으로 변해있었다.

‘독!’

평범한 검이 아니었다. 검날의 끝에 독이 묻어 있었던 듯했다. 이실리스가 급하게 해독마법을 시전했고 순식간에 검은색으로 변했던 그의 입술의 색깔이 되돌아왔다. 흘러내리는 피를 지혈하려고 이실리스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때였다.

마력을 이용해 피를 지혈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것을 사용하면 소드마스터인 베르타스에게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다. 마력으로 피를 멈추게 하면 그녀의 마력이 그의 몸 안 곳곳을 헤집어야 하니까. 우왕좌왕하다가 문득 깨달았다.

‘아…….’

그랬지. 베르타스는 그녀에게 소드마스터의 맹세를 했다. 그 맹세로 인해 그의 오라와 그녀의 마력이 한데 어우러졌었다. 쉽게 말해 그녀의 마력 일부가 베르타스의 몸에 흐르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베르타스의 상처가 서서히 아무는 것이 보였다. 해독마법을 미리 건 것이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평생 독과 함께 지냈어야 했을 테니.

마력으로 치료하기 전에 해독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중독되었을 때 해독을 하지 않고 섣불리 마력으로 치료를 한다면 그 사람은 일평생 독을 해독할 수 없다. 치료마법의 기초 중의 기초였다.

“하아.”

베르타스에게 그런 일이 생기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오라를 사용하는 소드마스터의 몸 안에 독이 남아있게 된다면 앞으로 오라를 사용할 수 없었을지도 모르니까. 

그의 눈꺼풀이 흔들리면서 감았던 눈이 열렸다.

“베르타스. 정신이 드나?”

“…… 이실리스.”

“그래, 나야.”

그의 상체를 안고 있던 그녀가 더 깊게 그를 끌어안았다. 하마터면 그를 잃을 뻔했다. 순간의 판단이 잘못되었다면 평생토록 괴로워하는 그를 볼 수도 있었다. 이실리스는 울컥하는 마음을 다잡으면서 그를 안았다. 그의 몸에서 풍겨오는 진한 남자의 향취가 그녀를 사로잡았다. 안도했다. 그가 무사한 것에.

“세드릭은…….”

“저기 쓰러져 있다.”

이실리스의 마력을 정면으로 맞은 세드릭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그나르도의 마력과 싸우는 보클로엠도 마찬가지였다.

“도와줘야 할 것 같군.”

“다쳤는데 그런 게 눈에 들어오나?”

그를 향해 소리 지르는 이실리스를 느낀 베르타스가 희미하게 웃었다.

“이제 마력도 다 찾지 않았나.”

전혀 아프지 않았다. 마력을 회복한 이실리스가 그를 치료한 것인지 칼에 찔린 상처도 멀쩡했다. 오히려 더 가벼워진 몸을 느끼면서 베르타스가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실리스의 품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를 끌어안고 있는 그녀가 좋았다.

아직 전투가 제대로 끝나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지금 이 상황이 마음에 들었다. 그녀가 그를 안고 있고 그녀의 품에 안길 수 있는 사람은 그가 유일하다는 이 상황. 저를 걱정하는 이실리스를 보는 것이 좋았다. 아니, 좋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실리스는 그에게 유일무이한 존재였으니.

“베르타스.”

저의 이름을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에 그가 그녀와 시선을 마주했다.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 그녀의 표정에 모른 척 그가 입을 열었다.

“저대로 둘 건 아니지?”

“해결은 해 줘야겠지.”

지금 당장은 하기 싫다는 이실리스의 말에 베르타스가 웃었다. 그럴 수밖에 저 보클로엠 때문에 이실리스가 고생했던 것을 생각하면 절대 도와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어쩌겠나. 뮤르카 제국을 빠져나가려면 저 보클로엠의 힘이 필요했다. 보클로엠이 고군분투하는 시간이 계속되고 있었다. 마침내, 이그나르도의 마력이 보클로엠을 집어삼키려는 듯 강력한 힘을 발휘하자 이실리스가 움직였다.

손안에 수인을 그려 마력을 쏘아 보냈다. 이그나르도의 마력이 보클로엠을 집어삼키려다 말고 이실리스를 향해 달려드는 것이 보였다. 당황한 베르타스가 그녀의 앞을 막아서려고 했으나 이실리스가 그를 말렸다.

“괜찮아.”

이그나르도의 마력이 그녀를 향해 달려들자 이실리스는 그 마력을 제 붉은 마력으로 감쌌다. 아까의 마법진에서 흐르는 마력에 비하면 별것 아닌 힘이었다. 

‘겨우 이 정도 마력에 제대로 힘을 못 쓸 정도로 약해졌다는 건가.’

보클로엠에 대해서 판단을 마친 이실리스가 이그나르도의 마력을 흩었다. 마력석으로 만들면 또 똑같은 위험에 처하게 될 수 있는 보클로엠을 향한 배려였다.

“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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