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이번 사건이 아니었다면 뮤르카 제국은 앞으로도 교류가 없을 제국이었다. 그런 제국보다 교류가 있는 이파프 제국에 신경 쓰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괜한 소리를 하여 이실리스의 마음을 복잡하게 만든 저 제라드 뮤르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의 심기를 어지럽혔으니 편하게 유유자적하도록 할 수는 없지.
“그럼 앞으로 마뉘엘 뮤르카는 어떻게 되는 거지?”
그의 말 한마디에 만찬장의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뮤르카 제국의 황태자라고 하는 아이가 들고 있던 식기를 내려놓았고, 제라드 뮤르카도 움직이던 손을 멈추었다.
‘밥이 넘어가다니.’
앞에서 귀하신 분이라고 추켜세우더니 심기를 어지럽히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해? 이쯤 되면 저 제라드 뮤르카가 의도적으로 그녀의 마음을 어지럽게 만든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저자도 아군이라고 부르기엔 속을 알 수 없는 자. 이곳에서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지금이야 어쩔 수 없는 상황이어서 손을 잡았다지만 알뤼르를 구하고 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이 제국을 떠나리라.
“그는 황족이니 처벌은 외부인에게 알려줄 수 없다.”
“그렇다면야.”
어깨를 으쓱하면서 와인잔을 집어 든 베르타스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그려졌다. 마뉘엘을 언급하자마자 표정이 굳어진 제라드의 얼굴이 볼만했다. 이실리스를 저렇게 심각하게 만들어 놓고 날름날름 음식을 집어 먹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움직이던 식기가 멈춘 것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식기를 던져놓자 시종들이 다가와 재빠르게 제라드의 앞에 놓인 음식들을 치웠다.
“음식이 괜찮은데 그만 드시는 겁니까?”
“그런 소리를 해놓고 먹으라니. 비위도 좋군.”
“황제는 사사로운 정에 끌려서는 안 되는 법. 그렇게 끌려다니니 배신도 당하고 그러는 거 아니겠습니까?”
“자네는 그래 본 적이 없다는 것처럼 말하는군.”
“전 황제가 아니어서.”
당연하지 않냐는 베르타스의 말에 제라드가 눈을 찌푸렸다. 옆에서 눈을 반짝이는 황태자의 얼굴을 본 제라드가 그에게 말했다.
“식사를 마쳤으면 가서 공부하거라. 나보다 나은 황제가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
“알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바로 그곳을 벗어나는 황태자의 달려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흐뭇한 미소를 짓는 제라드에게 이실리스가 물었다.
“벌써, 제왕학을 다루는 것인가?”
“그렇지.”
“아이가 꽤 영특한가 보군.”
“그야 그렇지만…… 라르헨의 황제께서 신경 쓰실 일은 아니지.”
제라드의 말에 뭐라 말을 이으려던 이실리스가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을 전부 지켜본 베르타스는 직감할 수 있었다. 이실리스는 지금 에리카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와 그녀의 딸인. 비슷한 또래의 아이를 보니 에리카 생각이 더 간절한 것 같았다.
“이실리스.”
“괜찮아.”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부르니 애써 답하는 그녀였다.
“이번 주에 준비를 마쳐주겠네.”
잠시 그녀의 표정을 살피던 제라드가 이실리스에게 확답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밖으로 나서자 베르타스가 이실리스를 바라보았다.
“무슨 준비?”
“베르타스. 내가 저 신전 안에서 느낀 것이 뭔지 아나?”
“…….”
“저 신전은 마법사가 움직이기에 가장 불편한 곳.”
“불편하다니…….”
“이그나르도의 마법진이 가득한 곳이지. 남은 시간 동안 그대에게 이그나르도의 마법진을 파훼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겠어.”
“그게 다인가?”
“별로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었네. 그냥 우리가 신전에 들어가야 하는 그 날짜에 교황을 밖으로 나오게 해 달라는 거였지.”
“그래?”
둘이 나눈 이야기를 모두 말한 것은 아닌 것 같았지만 베르타스는 더 묻지 않았다. 지금의 이실리스는 불안정했다. 생각에 빠진 그녀에게 물어보아도 제대로 된 대답이 돌아올 것 같진 않았다.
“그렇다면 이실리스, 이베르트를 만날 건가?”
“뭐 하러?”
“신전에 대한 정보는 그자가 제일 많이 가지고 있는 것 같아서 말이야.”
“아니, 만나지 않는다.”
“왜지?”“그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의 반려 하나 구해내지 못한 자가 지금이라고 해서 구할 수 있는 계획을 세웠다고 생각하지 않아.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여 다른 이의 마력이나 빼앗는 자에게 도움을 청할 수는 없지.”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는 이실리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웃으면서 그를 올려다보는 그녀의 얼굴이 보기 좋았다. 그의 손 위에 손을 올리는 이실리스의 부드러운 손등을 쓰다듬으면서 베르타스가 입술을 내렸다.
“가실까요.”
“어디로?”
“당연히 둘만 있을 수 있는 곳으로 가려고 합니다. 폐하.”
오랜만에 듣는 호칭에 이실리스의 눈꼬리가 휘었다.
천천히 복도를 지나 황궁 정원으로 간 둘은 걸으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대화를 나누기엔 이보다 더 적합한 방법은 없었으니까.
“이베르트 때문에 너의 마력이 사라진 건가?”
“정확히는 아니지.”
“아니라고?”
“나의 마력은 이베르트가 아닌 보클로엠이 사용하고 있다. 그러니 이그나르도의 마법진에 의해서 추출된 보클로엠의 아니, 내 마력을 사용하는 자들이 나에게 마법을 사용해도 작동하지 않는 거야.”
“아, 그래서…….”
베르타스는 아이를 구하기 위해 나섰다가 공격당했던 그때를 기억했다. 결계를 사용한 이실리스를 덮은 신관들의 붉은 기운이 그녀의 결계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신관들이 너의 마력으로 공격을 한다면…….”
“나의 마력을 찾게 되는 거지.”
“그러면 더 나은 것 아닌가.”
“문제는 그 마력은 본디 나의 것이지만 나의 것이 아닌 마력도 상당히 섞여 있다는 것.”
“그렇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저 신전 안으로 들어가서 보클로엠이 가져간 나의 마력을 찾아야 한다.”
단호한 그녀의 말에 베르타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막고 싶었다. 신전으로 들어가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다. 신전 안에 들어가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랐으니 혼자 들어가겠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저렇게 반짝거리는 눈으로 제게 말하는 이실리스에게 차마 하지 말라고 말할 수 없었다.
‘마력을 찾을 수 있다면 뭐든 하려고 하겠지.’
그게 지금 이실리스의 심정이니까. 그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지금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겠지. 보클로엠을 찾아간다고 해서 그녀의 빼앗긴 마력을 찾을 수 있다는 보장은 없었다. 순순히 마력을 내어줄지도 의문이었고. 내어주지 않는다면 강제로 되찾아야 하는데 그게 가능한 것인지도 묻고 싶었다.
그러나 베르타스는 입을 다물었다. 괜한 소리를 하여 밝게 웃고 있는 그녀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얼마 만에 보는 그녀의 환한 웃음인가. 기억을 찾고 나서 이실리스는 거의 웃지 않았다. 보이는 것은 옅은 미소뿐. 저리 환한 웃음은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이었다. 기억을 잃었을 때도 그러했지만 찾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베르타스.”
앞에 보이는 정원의 나무들을 바라보면서 이실리스가 그를 불렀다.
“제라드 뮤르카도 믿을 만한 자는 아닐세.”
“나도 알아.”
“우리가 힘을 찾게 되면 우리를 놓아주지 않으려고 할 수도 있어.”
“그럴 수도 있겠지.”
“최대한 이곳을 벗어날 방법을 찾아야겠어.”
“찾아보지.”
그들이 타고 온 잠수정은 마뉘엘 뮤르카가 가지고 있었다. 이실리스가 마력을 찾게 된다면 마력으로 바다를 건너가는 방법도 있었고 그게 아니라면 잠수정을 타는 방법도 있었다. 마뉘엘은 잡혀 들어갔지만, 그 잠수정은 아직 대공저 인근 바닷가에 숨겨져 있을 테니까.
“이베르트도 문제로군.”
하나도 해결하지 못했는데 문제는 첩첩산중으로 쌓여있었다. 보클로엠을 구해달라는 이베르트의 요청을 거부하고 마력만을 찾아 이곳을 벗어나면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었다.
“그 문제는 천천히 생각하도록 해.”
이실리스의 귓가에 다정하게 속삭이면서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저길 봐. 이실리스. 정말 아름답지 않나?”
“라르헨보다는 못하지만.”
베르타스는 이실리스의 말을 듣고 웃었다. 참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흐드러진 나무들 사이를 지나가는 바람 소리가 귓가에 스치었고 반짝거리는 햇빛은 초록의 나뭇잎을 더 새파랗게 만들었다. 그 비현실적인 광경에 이실리스도 베르타스도 웃었다.
“라르헨은 지금쯤…….”
“페일러스도 있고, 선황 부부도 있어. 거기다 나도 다한 경을 남겨두고 왔으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지금쯤 겨울이겠지.”
이실리스의 말에 베르타스는 입을 열 수 없었다.
“그곳의 눈이 보고 싶군.”
“곧 그렇게 될 거야 이실리스.”
“그 계절이 끝나기 전까지 돌아가야 해.”
“네가 원한다면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렇게 만들어 주겠다.”
“돌아갈 수 있겠지?”
“물론.”
네가 원한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 * *
베르타스와 이실리스가 신전으로 향하는 날이 되었다. 황궁이 조용한 것 같은 기분에 이실리스가 그녀의 몸단장을 도와주는 시녀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 있나?”
“황궁에 손님이 오셨습니다.”
“그렇군.”
제라드 뮤르카가 그녀에게 약속했던 대로 교황을 황궁으로 부른 것 같았다. 이실리스는 조금 더 서두르기로 했다. 그녀가 모든 것을 마치고 밖으로 나서자 베르타스가 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어서 가지.”
황궁의 불안한 기운을 눈치챈 그가 그녀를 향해 말했다.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인 이실리스는 그 자리에서 마력을 일으켰다. 순식간에 황궁 밖에 있는 숲속에 나타난 그 둘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그때 보았던 그 신관이었다. 아이를 구할 때 함께 있었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베르타스와 그녀에게 준비된 말 두 마리를 넘기면서 신관이 속삭였다.
“서두르셔야 할 겁니다. 교황을 잡아둘 수 있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으니까요.”
어서 가라고 말하는 신관에게 고개를 끄덕인 베르타스가 말 위에 올라타서 이실리스를 끌어당겼다. 그의 힘에 의해 순식간에 말에 올라타게 된 이실리스가 그에게 항의하듯 말했다.
“혼자서도 탈 수 있어!”
“알지만 내가 이러고 싶어서.”
“두 사람이 타면 말에 무리가 간다고.”
“안 돼.”
고집스럽게 말을 달리는 베르타스를 이길 수 없었다. 그의 승마술은 확실히 뛰어났다. 마력을 이용하느라 설렁설렁 승마를 배운 그녀와는 다르게 확실히 실전에 적합한, 전쟁터를 뛰어다니며 배운 말을 다루는 기술이었다.
‘돌아가면 나도 승마를 다시 배워야겠군.’
라르헨으로 가면 할 일이 꽤 많아질 것 같았다. 배워야 할 것도 다시 생각해야 할 것도 너무 많았다.
‘돌아갈 수 있다면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