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8화. (129/161)

128화.

“베르타스.”

“그래도 정말 괜찮다.”

그의 서툰 위로에 이실리스는 눈을 감았다. 조심스럽게 그녀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그의 손길에 불안했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아직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어, 이실리스.”

“그렇지.”

“알뤼르를 찾아야지.”

“그래, 그래야겠지.”

한숨처럼 뱉어지는 그녀의 말이 둘을 감쌌다. 불안해하는 이실리스를 다정하게 끌어안은 베르타스가 그녀에게 속삭였다.

“눈을 감아. 곁에 있을 테니.”

“…….”

바람 소리마저 들리지 않는 늦은 밤. 달빛은 환하게 방안을 비추고 있었고 고요함이 방을 감싸 안았다. 이윽고 이실리스의 고른 숨소리가 들려오자 베르타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것을 바란 것은 아니었어, 이실리스. 나는 다만…… 네가 알아차리기를 바랐다. 이 현실을.”

‘네가 불안해하길 바란 것은 아니었어.’

너무 쉽게 생각했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책임감을. 항상 자신감에 넘쳐있는 그녀였기에 괜찮을 줄 알았다. 그랬는데 아니었다니. 불안해하는 이실리스를 보니 마음이 어수선했다. 이런 상황임에도 제 품에 안겨있는 그녀를 보니 이런 점은 마냥 좋았다.

‘비겁한 놈.’

스스로를 그렇게 칭하면서 베르타스도 눈을 감았다. 어쩐지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 * *

이실리스와 베르타스는 제라드의 만찬에 초대받았다. 그의 곁에는 그때 구했던 아이가 앉아있었다.

“그대들 덕분이야. 고맙네.”

제라드의 말에 이실리스가 고개를 저었다.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이었으니 고맙다는 소리를 들을 이유는 없는 것 같군.”

“그래도 그대가 아니었다면 황태자가 있는 장소를 몰랐겠지. 황태자를 빌미로 계속 끌려다녔을 테고.”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듯했으나 고마움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쑥스러운 기분이었다. 누구도 그녀에게 도와주어 감사하다는 말을 직접적으로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려운 일을 그녀가 해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힘이 있었으니까.

“정말 고마워.”

진심이 담긴 제라드의 말에 이실리스는 몸 둘 바를 몰랐다. 마음이 간질거리는 기분이었다. 그녀의 분위기를 눈치챈 베르타스가 제라드를 향해 물었다.

“기사들은 어찌 되었지?”

“다섯이 갔으나 셋이 돌아왔지.”

“셋이라도 돌아왔으니 다행이군.”

신관들의 숫자에 비하면 셋도 과했다. 숨겨진 힘이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 정도로 대단한 저력을 갖고 있었던 기사들이라니. 베르타스가 나섰다면 희생을 더 줄일 수도 있었지만, 그는 이실리스를 지켜야 하는 몸이었으니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신관들은?”

“거의 죽었으나 다시 돌아가 보니 흔적이 없었지. 신전에서 처리한 것 같아.”

한숨을 내쉬는 제라드를 보고 이실리스가 용건을 꺼냈다. 

“뮤르카 제국의 황제인 그대에게 도움을 청할 것이 있다.”

“나에게? 아, 알뤼르라는 자를 구하는 데 힘을 보태 달라는 소리로군.”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이실리스를 향해 제라드가 호쾌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비록 허수아비 황제에 불과하나 은혜를 모르는 자는 아니니 도와주지. 무엇을 해 주면 되겠나?”

“잠시…….”

소리를 차단하는 마법을 사용하여 말을 주고받는 이실리스와 제라드의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것은 베르타스도 마찬가지였다. 내용이 궁금했으나 그는 기다렸다. 이실리스라면 그에게 말해 줄 것이 분명했으니까.

“좋아,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

“그렇다면 나와 베르타스 둘이 가겠다.”

“시기는 언제쯤으로 정했지?”

“다음 주.”

황태자를 빼앗긴 신전에서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적어도 이실리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패 하나를 뺏긴 신전, 거기다 마뉘엘도 잃었다. 그렇다면 교황은 어떻게 나올 것인가.

“이쪽도 생각하고 있는 바가 있지.”

“…… 뮤르카 제국의 일은 그대가 알아서 하게. 나는 알뤼르의 일만으로도 바빠서.”

“역시, 그대라면 선을 그을 줄 알았지. 헌데 이상하군. 라르헨의 일도 아닌데 이파프에서는 왜 그대를 찾지?”

제라드의 물음에 이실리스는 입을 다물었다. 무표정한 그녀를 향해 웃음을 던지면서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말하기 곤란한 문제인가.”

“너무 깊게 파고들지 않는 것이 그대에게 좋을 수도 있지.”

“그렇다면 좋아. 내 알아서 찾아보지.”

제라드의 시선이 아이에게로 향하자 이실리스의 시선 또한 아이에게 향했다. 만찬에 함께한 황태자는 조용히 대화를 경청하고 있었다. 아이를 보면서 에리카의 생각에 빠지려는 찰나 제라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찾는다면 이파프 제국의 약점을 쥐게 될 거 같거든.”

그녀가 이파프 제국의 해상제독과 친분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그의 모습에 이실리스가 의아한 듯 그를 바라보자 제라드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번 일로 인해서 해상제국과 라르헨의 관계가 변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거든. 저 바다를 장악하고 있는 해상제국 때문에 우리도 바다로 나갈 수 없으니 상당히 답답해서 말이지.”

“해상제국에서 바다를 장악했기 때문에 교역을 할 수 없다고?”

“당연한 것 아닌가. 바다를 점령하고 그 바다를 지나갈 때마다 통행료를 요구하는 저자들 때문에 우리도 상당히 곤란하던 차라고.”

제라드의 말에 이실리스는 생각에 잠겼다. 이파프 제국이 바다 위의 무역을 독점하고 있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독점에서 라르헨은 예외였다. 그녀가 이파프의 마력석에 마력을 공급하는 것이 그 조건이었다. 

이파프에서 요구하는 금액을 들은 이실리스가 눈을 크게 떴다. 놀란 것은 그녀뿐이 아니었다.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베르타스의 입에서 말이 튀어나왔다.

“그자들이 미쳤군.”

“물론 라르헨에서는 이 사실을 몰랐겠지. 그자들이 라르헨에 그 돈을 요구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거의 약소국의 일년치 예산이 아닌가!”

“강자에겐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자들이 저 해상제국이지. 말이야 바른말로 해상제국의 뿌리는 해적이 아닌가. 바다 인근의 제국들을 약탈하던 것도 모자라 이제는 아예 바다 위에 자리를 잡고 통행세를 걷으니 기가 차더군.”

두고 보다 한 번쯤 갚아줄 생각이었다고 말하는 제라드의 얼굴엔 희미한 미소가 번져있었다.

“저들에게 라르헨 제국이 아주 중요한 것으로 보여 내 이간질을 좀 하였네. 귀에 더럽게 들렸다면 미안하군.”

전혀 미안하지 않은 얼굴로 말하는 제라드에게 가볍게 고개를 저은 이실리스였다. 이파프 제국에 베푼 선행은 그녀가 베푼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녀의 윗대에서 아니 그보다 더 위인 선선황제 때에 벌어졌던 일이었다. 그때 당시 라르헨의 황제가 어떤 사유로 이파프 제국에 마력 장치를 달아준 것인지 알 수 없었으나 베풀었던 호의가 다른 제국에겐 재앙이 되었다는 소리에 이실리스의 마음이 복잡해졌다.

그 마음을 눈치챈 베르타스가 힐끗 그녀의 표정을 살폈으나 겉으로 보인 얼굴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그렇다고 이파프 제국의 사람들이 모두 바닷속으로 수장되도록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마력을 잃고 나서 알게 된 사실들은 이래저래 그녀의 마음을 심란하게 만들 뿐이었다.

‘어느 것 하나 쉬운 일이 없군.’

원래 세상의 모든 일은 쉬운 것이 없다. 그동안은 라르헨의 안에서만 있었으니 주변국의 상황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최강의 마법사 부대와 누구보다 마력이 강한 황제인 이실리스가 라르헨을 지키고 있었으니 주변국에선 알아서 고개를 조아렸다.

황제가 여자라고 깔보는 국가는 있었으나 그녀의 앞에서 대놓고 조롱하는 자들은 없었다. 모두 제국의 힘에 고개 숙인 것이었다. 그랬는데 그녀의 마력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되면 저들은 어떤 식으로 나올까.

‘당장 이파프부터 문제로군.’

마력을 잃은 자신이 한스러웠으나, 강한 마력 때문에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이실리스 그녀도 그랬으니까. 가장 강대국인 라르헨에서 누군가에게 고개를 숙일 처지가 될 리 없었으니 주변국의 사정을 헤아릴 필요가 없었다. 라르헨에서 원하면 주변국은 그 요구를 들어줘야 했다.

‘흠…….’

차츰 주변국의 상황도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을 땐 보이지 않던 것들이 그 힘을 잃으니 보이다니. 속으로 스스로를 비웃었다. 힘에 취해 주변을 보지 않는 폭군과 무엇이 달랐을까. 이제야 제 위치가 확연하게 보였다.

바다 너머의 나라가 이파프 제국 때문에 고통을 받는 것은 몰랐다. 아니, 알았다고 해도 신경 쓰지 않았겠지. 라르헨은 모든 것이 충분한 나라이니까. 라르헨에서 마도구로 벌어들이는 금액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것은 모두 그녀의 충성스러운 마법사들이 이루어낸 것.

‘혹, 내가 마력을 잃어 앞으로 회복할 수 없다고 한다면…….’

그녀를 따르던 마법사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라르헨이 마법사들의 구심점이 되어서 똘똘 뭉칠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 이실리스가 강력한 마법사였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선황 시절, 라르헨에 소속된 마법사들도 많았지만 그렇지 않고 다른 나라로 망명한 마법사들도 많았다. 마력을 추구하는 마법사들. 그것은 달리 말하면 힘을 추구하는 것과 같았다.

“괜찮은가?”

이실리스가 말이 없자 제라드가 그녀를 향해 물었다. 혼자 있는 곳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그녀가 그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안 괜찮을 리가 있나.”

“다행이야. 귀하신 분의 심기를 어지럽힌 줄 알고 마음이 무거웠거든.”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말하는 제라드의 얼굴에서 미안한 기색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실리스도 애써 웃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베르타스가 입술을 달싹였으나 그도 입을 열지 않았다. 

눈앞에 차려진 맛있는 음식들을 입으로 가져갔으나 그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은 그녀의 마음이 무겁기 때문인가 아니면 알뤼르에 대한 걱정 때문인가. 이실리스는 음식을 억지로 삼켰다. 그나마 먹고 기운을 내는 것이 중요했으니.

베르타스는 음식을 넘기는 이실리스를 보면서 못마땅한 시선을 감추지 않았다. 안 그래도 입이 짧은 그녀인데 앞에 놓인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 것 같았다. 그뿐이랴. 조금 전 저 뮤르카 제국의 황제가 말한 내용을 신경 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모든 것을 다 아우를 수는 없다, 이실리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