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7화. (128/161)

127화.

단숨에 벽을 베는 그를 본 기사들이 감탄했다. 벽이 무너지고 그 앞에 아이를 안고 있는 신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이를 놓아라! 그러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공격하지 마십시오! 저는 같은 편입니다!”

신관이 다급하게 외치면서 손을 들었다. 안고 있던 아이를 내려놓으면서 외치는 신관을 빤히 바라보던 이실리스가 그를 알아보았다.

“그때 그…….”

“다시 보니 반갑네요. 신녀님.”

그녀를 향해 신녀라고 일컫는 남자는 이실리스에게 방에서 가만히 있으라고 충고했던 신관이었다. 제라드가 보내서 왔다고 말했던 그 신관.

“여기까지 어떻게 온 건가.”

“급하게 나가는 신관들 틈에 껴서 나왔습니다. 지금이 아니면 신전을 나갈 기회가 없을 것 같았거든요. 그랬는데 황태자 저하를 뵙게 될 줄이야.”

신관이 다정한 눈으로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이도 그 웃음을 돌려주었다. 주변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신관들을 눈으로 훑은 베르타스가 재촉했다.

“가야 해. 이실리스, 시간이 없어.”

그의 기감에 걸려드는 숫자만 여덟이 넘었다. 신관들이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가는 길은 어느 쪽이지?”

“이쪽입니다.”

아이를 안아 든 신관이 길을 안내했다. 먼저 나서는 그를 따라 사람들이 달렸다. 신관은 아이를 안고 있었지만 다른 누구보다 빠르게 달려갔다. 저택을 벗어나 저택에서 조금 떨어진 숲으로 달릴 때였다. 그들의 앞으로 붉은 기운이 쏟아졌다.

“이실리스!”

베르타스의 걱정스러운 외침이 들렸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보호 결계를 만들어냈다. 마력의 움직임이 거세졌고 그녀가 휘청하려는 찰나였다. 결계에 닿은 붉은 기운이 그녀의 결계로 흡수 되었고 그녀의 마력이 안정되었다.

“이게 대체…….”

대마법사인 그녀도 처음 보는 현상이었다. 다른 이의 마력을 흡수할 수 있다니.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그도 잠시뿐, 멀리서 달려드는 신관들을 보면서 이실리스가 마력을 일으켰다.

‘아까보다 마력이 늘었어.’

이상했다. 그렇게 죽어라 애를 쓰고 마력을 운용해도 늘지 않았던 마력이 다른 사람의 마력을 흡수했다고 늘어나다니. 그러나 다른 사람의 마력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본래 그녀의 것인 양 너무나도 친숙했다. 

가볍게 손을 흔들면서 마력을 일으켰다. 마력이 충분치 않으니 대단위 마법을 사용할 수 없었기에 적은 마력으로 정교하게 운용하는 것이 필요했다. 이실리스는 작은 마력을 하나하나를 신관들에게 쏘아 보냈다.

‘미간, 눈, 가슴, 손.’

이실리스의 붉은 마력에 당한 신관들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일어나지 못하는 그들의 뒤로 다른 신관들이 마력을 일으키는 것이 보였다. 이실리스의 뒤에서 오라를 일으킨 베르타스가 가로로 그들을 베었다. 

신관들이 쓰러지고 새로운 신관들이 그 자리를 채웠다. 베어도 베어도 끝이 없는 신관들의 앞을 제라드의 기사들이 막아섰다. 신관들이 덮쳐오는 속도가 조금 주춤해지자 그제야 한숨 돌릴 수 있었다. 

“가십시오! 여긴 저희가 막겠습니다!”

“그대들은 어찌하겠다는 것인가!”

“황태자님을 데리고 가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분이 여기서 다시 잡히면 폐하의 손발이 묶입니다!”

외치면서 앞으로 나서는 다섯의 결심을 막을 수 없었다.

“이실리스!”

베르타스가 외치자 입술을 씹은 그녀가 마력을 일으켰다. 마력이 충분했다면 이렇게 누군가를 버리고 가는 일은 없었을 텐데. 그녀가 없던 곳에서 그녀의 신하들을 잃은 적은 있어도, 전쟁터에서 그녀의 눈이 미치지 않은 곳에서 사람을 잃은 적은 있어도, 지금과 같은 상황은 처음이었다.

이실리스의 붉은 마력이 베르타스와 아이를 안은 신관, 마지막으로 그녀를 감싸면서 환한 빛이 일었고 네 명은 뮤르카 제국의 황궁 앞에 설 수 있었다.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휘청거리는 그녀의 허리를 부여잡으면서 베르타스가 안아 올렸다.

“괜찮나?”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는 베르타스의 시선을 마지막으로 눈을 감았다. 베르타스는 그녀를 안은 팔에 더 힘이 들어가면서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강한 그 팔에 안도감이 들었지만, 이실리스는 정신을 잃었다.

베르타스는 극심한 마력 소모로 인해 정신을 잃은 이실리스를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 마력을 잃은 그녀는 생각보다 더 약했고 보호가 필요한 사람이었다. 위급한 상황이었기에 그녀가 마력을 일으키는 것을 말릴 수 없었던 스스로를 탓했다.

‘그녀에게 약자라느니 어쩌느니 해놓고 나도 별수 없군.’

강한 힘이 필요했다. 소드마스터인 그의 무력도 강했지만, 그보다 더 큰 힘이 필요했다. 그녀를 지킬 힘이.

멀리서 황제의 기사들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고 아이를 안고 있던 신관이 그들을 향해 환한 미소를 지었다.

* * *

이실리스가 눈을 뜬 시간은 아주 늦은 밤이었다. 곁에서 그녀를 지키고 있는 베르타스의 시선을 받으면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몸이 한결 가벼웠다. 부축하는 그에게 손을 저으며 속삭였다.

“병자 취급은 되었어. 쉬면 나아지는 것이니.”

마력이 부족해서 기절한 것은 꽤 오랜만이었다. 어릴 적 마력을 제대로 다룰 줄 몰라 실수로 겪어 본 것을 빼고 처음이었다.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왜 웃지?”

“아니, 아니야.”

한심했다. 마력이 적어 베르타스의 도움을 받다니.

“이실리스.”

“…….”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는 그녀에게 베르타스가 계속 말을 이어갔다.

“네가 아니었으면 그곳에서 빠져나오기가 어려웠다. 그러니…….”

“그만.”

손을 저었다. 그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지만 듣고 싶지 않았다. 무력감이 그녀를 감쌌다. 약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 이실리스는 베르타스에게 말했다.

“혼자 있고 싶어.”

“…… 방앞에서 대기할게.”

따로 방을 배정받지 않았기에 그녀와 함께 있어야 하는 베르타스에게 미안했지만, 지금은 혼자이고 싶었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기억을 되찾고 나서 계속 베르타스와 함께였다. 혼자서 천천히 무언가를 되짚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럴 시간이 필요했다.

‘핑계일뿐…….’

그랬다. 혼자 있고 싶다는 것은 핑계에 불과했다. 그에게 약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것이 진심이었다. 마력이 없어진 그녀를 보고 베르타스는 무슨 생각을 할까. 그마저도 다른 사람과 같이 태도가 변한다면 참 가슴이 아픈 일이었다.

‘그가 그럴 리 없어.’

갑자기 든 불길한 생각에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베르타스는 그럴 사람이 아니다. 그가 그런 사람이었다면 그녀는 그를 선택하지 않았을 거다. 처음과 변함없이 한결같이 그녀의 옆을 지키는 자. 그게 베르타스였다.

“이제야 주변이 눈에 들어오다니.”

알고 있는 것보다 세상은 훨씬 냉정했다. 그녀가 힘을 잃었다는 사실을 라르헨의 제국민들이 알게 되면 어찌 되는 것일까. 아니, 제국민까지 갈 필요도 없었다. 라르헨의 귀족들이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파브리스의 태도를 목격한 이상 가볍게 생각할 수 없었다.

힘을 잃은 그녀에게 폐위하라고 나서는 것보다 무서운 것은 그녀가 결계를 유지할 수 없으니 에리카에게 그 역할을 강요하는 것이었다.

“그것만은 안 돼.”

그대로 둘 수 없다. 마력이 부족한 그녀에게 얻어낼 것이 없는 귀족들의 다음 행보는 뻔했다. 에리카에게 매달릴 귀족들이 눈에 선했다. 마치, 과거의 그녀에게 그랬던 것처럼.

이실리스의 나이가 일곱이었을 적, 이미 그녀의 마력은 다른 마법사들을 상회하고 있었다. 성인들과 비슷한 마력의 수치를 보이는 이실리스의 방에 매일 같이 귀족들이 드나들었고 그들이 찬양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이실리스는 자랐다.

[황태녀님께서는 제국의 기둥이 되실 겁니다.]

[위대한 황제가 되실 겁니다. 지금의 황제 폐하보다 더.]

[나라의 결계를 누구보다 강력하게 시켜주실 겁니다.]

그때는 그게 무슨 소리인지 잘 몰랐다. 저를 추켜세우는 말을 경계해야 한다고 배웠기에 귀족들에게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알 것 같았다. 그들은 이실리스 그녀 자체를 원했던 것이 아니라 마력이 강한 라르헨의 마법사를 원한 것이었다.

“에리카는 안 돼.”

어린 딸에게 그녀가 지고 있던 짐을 넘겨줄 수 없었다. 이실리스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끊임없이 생각했지만 결국 머리만 더 아팠고, 해결책은 나오지 않았다. 라르헨의 근간은 그 나라를 감싸고 있는 결계. 그 결계에 마력을 불어 넣는 것이 황제의 의무였다.

그 황제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자는 황제의 위에서 내려와야 한다. 그게 변하지 않는 라르헨의 규칙이었다. 그리고 이실리스는 지금, 그녀가 그 의무를 다할 수 없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어찌하면 좋은가.”

이런 상황을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녀의 마력이 사라지는 상황이라니. 설령 이그나르도의 마법진에 마력을 빼앗겼다고 할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그 마력이 채워지는 것이 정석이었다. 그랬는데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마력이라니. 초조했다.

“어찌하면…….”

“이실리스.”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깜짝 놀란 그녀가 시선을 돌렸다. 베르타스가 방안으로 들어서서 그녀의 곁에 서 있었다. 그가 들어오는 인기척도 눈치채지 못한 채 생각에 빠져있던 이실리스는 애써 침착한 얼굴로 불안함을 감추었다.

“언제 들어왔지?”

“조금 전에.”

바로 앞에 선 베르타스에게 머리를 기댔다.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이런 불안함도 갖고 싶지 않았고 이런 무기력도 갖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기억을 잃었던 때가 좋았다. 내가 누군지에 대한 불안함은 있었어도 이렇게 손이 떨리는 긴장감은 없었으니까.

“불안해 하지 마.”

그녀의 불안감을 알기라도 한 듯 베르타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자 불안했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그의 손길을 느끼면서 이실리스가 베르타스에게 물었다.

“너는 아무렇지 않나?”

“무엇이.”

“내가 마력을 잃어 평범한 마법사나 다름없게 되었는데…… 너는 아무렇지도 않나?”

“이실리스.”

“그래도 아무렇지 않은 것인가? 이대로 돌아가게 되면 나는 황제의 위에서 쫓겨날 수도 있어.”

입 밖으로 튀어나온 말에 조금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는 베르타스였지만, 이실리스는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그래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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