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6화. (127/161)

126화.

이실리스가 뭔가 생각난 듯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설마 그…….”

“나의 아이가 있는 곳을 아는가?”

이실리스가 마뉘엘의 대공저에 머무르던 시기였다. 서재를 들락날락하며 책을 읽는 것을 즐겼던 그녀의 눈에 글자가 들어오지 않았다.

[휴…….]

이실리스의 교육을 위해 가르칠 사람이 붙었지만, 그 사람은 더는 가르칠 것이 없다면서 떠나버렸다. 마뉘엘은 바쁜지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그녀에게 남은 것은 서재를 둘러보는 것뿐이었다.

책꽂이의 책을 하나하나 훑어보던 이실리스는 일반적인 책들과 높이가 다른 책을 한 권 발견했다. 제법 높은 곳에 있는 그 책을 꺼내 들기 위해 손수 의자도 옮겼다.

의자 위에 올라가 책을 꺼내자마자 책장이 스르르 움직였고 그 뒤에 숨겨진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랜 시간 서재에 있었으나 처음 보는 공간이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이실리스는 걸음을 옮겼다.

평상시의 그녀였다면 절대 하지 않을 짓이었다. 기억을 잃은 그녀는 늘 조심했으니까. 그러나 그날은 너무나도 무료한 날이었다. 그래서였다. 충동적으로 걸음을 옮긴 것은.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통로에서 이실리스는 천천히 걸었다. 벽에 손을 대고 한참을 걸으니 무슨 소리가 들렸다. 천진난만한 아이의 웃음소리였다.

그 소리가 잦아들고 누군가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혼자 남게 된 아이가 말하는 것이 들렸다.

[또 못 가게 해.]

외로움이 가득한 목소리에 이실리스는 저도 모르게 앞으로 나설 뻔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나설 수 없었다. 아이를 혼자 두지 않으려는 듯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벽 너머로 모든 소리를 들은 이실리스는 천천히 왔던 길을 되돌아서 걸었다. 다행히 그녀가 서재로 돌아올 때까지 그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없었고, 그날의 일은 해프닝으로 끝났다.

그때의 기억을 되돌려 말하는 이실리스에게 표정이 사라진 제라드가 물었다.

“어디였나 그곳은?”

“대공저로 가면 알 수 있을 것 같군.”

단언하는 이실리스였다.

“내가 지금 대공저를 친다면 신전과의 전면전을 벌이겠다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 모든 것을 감수할 정도로 나의 아이는 소중하다. 세상을 떠난 그녀가 남긴 유일한 아이이니까. 나에게 확신을 줄 수 있나?”

“물론.”

이실리스의 말이 끝나자마자 제라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대공저에 있는 나의 아이를 찾아서 데려온다면 뭐든 도와주겠다.”

“폐하, 저는…….”

베르타스가 이실리스를 향해 뭐라 말하려는 것이 보였으나 그녀가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았다. 그가 하고 싶은 말을 알 수 있었다. 위험하니 가지 말라는 것이겠지.

그러나 그녀가 마력을 찾기 위해서 제라드의 도움이 필요했다. 신전의 깊은 곳에 있는 보클로엠을 만나야 하는데 막무가내로 신전에 쳐들어갈 수는 없었다. 그뿐이랴. 모든 신관들을 상대하기도 어려웠다.

신전에 사람을 심어 놓은 제라드라면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교황이 있는 곳까지 사람을 심어 놓은 제라드였다. 분명 숨은 저력이 있었다.

“좋아.”

이실리스의 말이 떨어지자 파브리스가 그녀에게 물었다.

“이실리스! 지금 급한 것은……!”

“알뤼르를 찾는 것이다. 너의 용건은 그다음이야. 파브리스.”

이파프 제국에 호의를 보일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마력이 충만하여 거칠 것이 없었을 때였다. 지금의 그녀는 그만한 마력이 없었다. 주변의 도움이 필요했다.

새삼 저의 위치를 다시 확인하게 된 이실리스였다.

‘그랬군.’

베르타스가 한 말이 이제야 이해되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세상은 강자의 세상이었다.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입장이 되자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 그녀가 세운 세상은 허상이었다는 것을.

그녀가 믿었던 사람들은 그녀의 힘에 복종한 것이었다. 진심으로 그녀를 존경해서가 아니라. 물론 아닌 이들도 있겠지만 이실리스의 상황을 알게 되면 그들이 돌아서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 없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마력이 강한 황제였으니. 아무것도 없는 그녀가 제국으로 돌아가면 어떤 취급을 받을지 그제야 눈에 보였다.

“결국, 모든 것은 나의 바람일 뿐이었나.”

이실리스의 한탄과도 같은 읊조림을 들은 베르타스가 눈을 감았다. 선연하게 전해지는 그녀의 아픈 감정을 느낀 그는 입을 열 수 없었다.

“내가 돕겠다.”

파브리스도 어쩔 수 없이 돕겠다고 나섰다. 그로서는 최대한 이곳의 일을 해결하고 이파프 제국으로 이실리스를 데려가야만 했다. 잘못하면 제국이 가라앉을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이었다.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자는 이실리스 한 명뿐이었는데 그녀가 움직이지 않겠다니 별수 없었다. 알뤼르를 구해서 빠르게 이파프 제국으로 간다.

“나의 기사들과 함께 가게.”

제라드가 손짓하자 그의 앞에 즉시 무릎을 꿇는 다섯 명의 기사들이 있었다.

“너희들은 가서 나의 후계를 구해오라.”

“명 받듭니다.”

“그대에게 이런 부담을 갖게 해서 미안하게 되었다. 나의 아이를 구해준다면 내가 꼭 보답하겠다.”

간절한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는 제라드를 향해 이실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파브리스가 같잖다는 듯 제라드를 우습게 보는 것이 보였다.

‘이실리스의 힘을 모르니 저렇게 말하는 것이겠지.’

그녀라면 손짓 한 번으로 사람을 찾을 수 있었다. 그랬는데 저렇게 간절하게 말하다니. 파브리스는 제 것도 아닌 그 힘에 대해 제멋대로 판단했다. 그 모든 것을 지켜본 베르타스가 눈을 빛냈다.

“다녀오지.”

걱정하지 말라는 말도 하지 않은 채 이실리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베르타스도 못마땅한 표정으로 움직였다. 그녀와 그의 뒤를 황실 기사 다섯이 따랐다. 파브리스는 뒤늦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을 따라가지 않는 파브리스에게 제라드가 물었다.

“이파프 제국의 제독께서는 가지 않는가?”

“내가 뭐하러.”

“방금 돕겠다고 한 것이 아니었나?”

“나는 알뤼르를 찾는 것을 돕겠다고 했다.”

파브리스의 말에 제라드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이파프 제국의 제독은 제정신이 아닌 것 같군.”

“허수아비 황제 따위가 할 말은 아니지.”

“해상제국의 제독이 앞뒤 분간을 못 하는 자라는 것은 처음 알았군. 이제라도 알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어디서 감히!”

술법을 일으키는 파브리스의 앞에 숨어있던 제라드의 근위 기사들이 나타나서 검을 겨누었다. 검이 그의 목 끝에 닿자 제라드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잘 생각해야 할 걸세. 허수아비 황제인 나를 왜 신전에서 건드리지 못하는지.”

* * *

접견실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꿈에도 모른 채 이실리스는 황성의 정원 부근에서 파브리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돕겠다고 하였는데?”

“올 리가 없어. 이실리스.”

베르타스의 말에 이실리스는 그럴 리 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 둘의 대치를 지켜보던 제라드의 기사가 다가와서 말했다.

“해상제국의 제독께서는 방으로 돌아가셨답니다.”

“……그렇군.”

이실리스는 눈을 감았다. 친우라고 부르기도 아까운 자였다. 그런 자에게 마음을 조금이나마 내보였다니. 사람이라는 것이 이렇게나 간사했나.

흔들리는 이실리스의 마음을 눈치챈 베르타스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손에서 손으로 넘어오는 온기에 상실감이 조금 덜어졌다. 너무 빤히 보이는 사람들의 속내가 그녀를 아프게 했다.

‘이럴 수가 있나.’

“우리끼리 가지.”

뒤에서 대기하고 있는 기사들에게 베르타스가 말했다. 실상 이실리스에게 하는 말과 같았다. 베르타스의 말에 이실리스가 움직였다.

“아이를 찾아야지.”

“그 아이가 그곳에 아직도 있을까?”

“황제는 대공에게 시간을 주지 않았다. 그러나 황궁에도 사람을 심었을 테니 대공이 구금되었다는 것을 신전은 알 수도 있어. 어차피 시간 싸움이다.”

서둘러야 한다는 이실리스의 말에 베르타스가 표정을 굳혔다. 기사들이 준비한 말이 도착하자 베르타스가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의 허벅지를 밟고 말 위에 올라탄 이실리스의 뒤로 베르타스가 훌쩍 뛰어올랐다.

“가자!”

급하게 말을 모는 사람들에게서 다급함이 느껴졌다. 성문이 열리고 말발굽 소리가 울렸다. 수도안을 가로지르는 말들을 목격한 제국민들이 놀란 표정으로 길을 만들었다.

수도의 끝에 있는 대공저까지 가는 길은 그리 멀지 않았다. 휙휙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을 감상할 시간도 없이 익숙한 저택 앞에 멈췄다.

“문을 열어라! 폐하의 명이다!”

기사 한 명이 앞으로 나섰고 황제의 인장을 들어 보이는 그에게 아무런 말도 없이 저택의 문이 열렸다. 그녀에게 익숙한 곳이었는데 느낌이 달랐다.

“조심!”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 앞에 붉은 기운이 쏟아졌다. 신력이라고 일컫는 그 기운을 칼로 쳐내는 기사들과 함께 대공저 안으로 들어갔다.

“어느 쪽이지?”

“오른쪽!”

베르타스의 물음에 이실리스가 답했다. 말을 끌고 저택 안으로 들어선 그들을 반긴 것은 신전의 신관들이었다. 다행인 것은 교황이 없다는 것이었다.

“더는 못갑니다!”

붉은 기운을 일으키면서 저항하는 신관이 말발굽에 차였다. 거침없이 밀고 들어가는 그들을 막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붉은 기운이 쏟아지려는 찰나 이실리스의 보호 마법이 발동했다.

“이실리스!”

마력을 일으키고 몸에 힘이 빠지는 그녀의 허리를 강하게 잡은 베르타스가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정말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이를 악물었다. 이 정도의 마력을 썼다고 쓰러질 수는 없었다. 신관들이 계속해서 나타났고 이실리스는 방향을 외쳤다.

“오른쪽! 왼쪽! 그대로 달려!”

대공저를 뛰어다니는 말들의 앞에서 신관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서재의 문을 열자마자 이실리스는 그대로 말 위에서 뛰어내렸다. 그때 보았던 그 책을 향해 손짓하는 그녀를 본 베르타스가 책을 뽑아 들었다.

그들의 앞에 통로가 모습을 드러냈고 기사들과 베르타스는 이실리스의 안내를 따라 걸었다. 신관들이 서둘러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

한쪽 벽면을 가리킨 그녀를 향해 베르타스가 말했다.

“위험하니 물러서.”

그리고는 그대로 오라를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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