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제라드의 말에 파브리스의 날카로운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내 끼어들지 않으려고 했는데 듣자 하니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이지. 이파프 제국에서는 다른 제국의 황제에게 아무렇지 않게 도움을 청하는군. 맡겨 놨나?”
“뭐라고?”
“해결책을 맡겨놨냐고 물었지. 그도 아니면서 왜 저 라르헨의 황제에게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난리인가. 그저 하고 싶은 대로 두면 될 것을.”
“그것은……!”
파브리스는 차마 이실리스가 해야 하는 일이 이파프 제국의 명운이 걸린 일이라는 것을 말하지 못했다. 그 말을 하는 순간 저 뮤르카 제국의 허수아비 황제에게 얕잡아 보일 테니까.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제라드가 거 보라는 듯 웃었다.
“골치 아프니 헛소리는 그만하고, 이제 내 용건을 말하지.”
제라드가 입을 열어 뭐라 말하려는 찰나였다. 밖에서 시종장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대공이 드십니다!”
급박하게 들려오는 그 목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마뉘엘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보나 마나 시종장이 말리는 것을 밀치고 들어온 것이었다.
“이게 무슨 행패냐. 마뉘엘.”
그의 버르장머리 없는 행동에도 제라드는 한마디만 할 뿐 더 이야기하지 않았다.
“폐하. 이분들이 왜 여기에 있습니까?”
마뉘엘은 이실리스와 베르타스가 황궁에 있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참지 못하고 황궁으로 찾아왔다. 교황이 말했던 대로 그들의 신변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이분들?”
“그렇습니다. 신녀님과 그분의 호위 기사 말입니다.”
“아, 그렇군. 너는 아직 모르는군.”
무시하듯 말하는 제라드를 향해 화난 표정을 지어 보이는 마뉘엘이었다. 그러나 아랑곳하지 않고 제라드가 입을 열었다.
“인사해라. 라르헨 제국의 황제시다.”
“다시 보는군. 마뉘엘 뮤르카.”
이실리스가 가볍게 고개를 움직였다.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은 채 마뉘엘의 시선을 받은 그녀와 베르타스 그리고 파브리스였다. 그들 중 누구도 마뉘엘을 향해 달가운 시선을 보내는 사람은 없었다.
한참 대화하던 중에 방해를 받은 파브리스는 물론이고 신전과 내통한 것이 분명한 마뉘엘을 맞이해야 하는 베르타스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 멍청한 표정으로 이실리스를 바라보는 마뉘엘을 향해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나의 물건들이 대공저에 있었군. 이리 가져오겠나?”
“뭐라고 하셨습니까?”
마뉘엘에게 완전히 하대하는 이실리스를 보면서 그가 인상을 찡그렸다. 그런 마뉘엘을 향해서 베르타스가 기세를 쏘아보냈다. 기에 눌린 마뉘엘이 그 자리에 무릎을 꿇자 후련한 듯 베르타스가 말했다.
“황제의 앞에 와서 인사도 제대로 안 하고 용건부터 꺼내다니. 이곳에 너보다 신분이 낮은 자는 없다. 제대로 예를 갖추도록.”
“한낱 호위 기사 주제에 감히!”
마뉘엘의 말에 이실리스가 손끝에서 마력을 피어 올렸다. 붉은 꽃이었지만 그녀의 손끝에서 마뉘엘에게 날아가는 순간 그 꽃은 붉은 열기로 변해서 마뉘엘의 옷을 태웠다. 화들짝 놀란 그가 황급히 손으로 옷을 털자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라르헨의 국부에게 함부로 말을 하고도 그 목이 온전한 사람은 그대뿐이다. 이것으로 그대가 우리에게 베풀었던 호의는 갚은 것으로 하지.”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중죄를 덮겠다는 이실리스의 말에 제라드가 눈꼬리를 휘었다.
“라르헨의 황제는 자비롭기도 하시군요.”
“두 번은 없습니다.”
다음엔 어림도 없다는 그녀의 말에 날카롭게 눈을 홉뜨는 마뉘엘이었다. 제라드는 한때 사랑했던 동생이 저렇게 변한 것을 보니 심기가 편치 않았다. 그의 마음을 눈치라도 챈 듯 베르타스가 말을 돌렸다.
“바로 사람을 보낼 테니 폐하의 것을 내놓아라.”
그렇지 않으면 대공저로 당장 달려갈 듯한 베르타스의 모습에 마뉘엘이 흠칫했다.
“그리고 건방지게 굴지 마라. 지금까지 너를 봐준 것은 네가 신전의 사람이라는 것을 몰랐기 때문이지 네가 대공이어서가 아니다.”
대공이라도 신전의 사람이었다면 이미 죽여 없앴을 것이다. 이실리스에게 해가 되었다면. 베르타스는 저자에게 속아 넘어간 것이 못내 안타까웠다. 진심으로 나라를 걱정하는 자인 줄 알았으나 아니었다.
저자에게 속아 알뤼르를 신전으로 들여보냈고, 그래서 그를 잃었다. 알뤼르는 아무것도 모른 채로 신전으로 들어갔을 테고 저자에게 모든 것을 들은 교황은 그를 사로잡기 쉬웠을 거다.
‘상황이 그려지는군.’
알뤼르 같이 강력한 마법사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는 것이 말이 되질 않는다 생각했는데 이게 이유였다니. 내부의 적이 가장 무섭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던 베르타스였으나 작정하고 속이는 자를 어찌할까.
‘내가 조금 더 생각했어야 했던 것을.’
후회는 이미 늦었다. 계속해서 드는 생각을 지우기 위해 베르타스는 제라드에게 말했다.
“라르헨의 황제께서 처음 이곳으로 올 당시에 지니고 계셨던 귀물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찾을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좋습니다.”
베르타스의 말에 일언반구도 하지 않고 허락하는 제라드였다.
“형님!”
“폐하라고 불러라. 그리고 너는 물건을 가져올 때까지 이곳에서 나갈 수 없다.”
“어떻게 그런! 이것은 부당합니다!”
“언제 내가 합당한 명령을 내린 적이 있었느냐?”
마뉘엘의 말에 웃으면서 제라드가 삐딱하게 앉았다. 제라드도 막연하게 의심하고 있었다. 동생이 그를 배신했을 수도 있다는 것을. 그래서 그가 가진 면죄부를 빼앗으려고 했다. 의심이 확신으로 변했으니 이제는 봐 줄 필요가 없었다. 명령을 들은 황실 기사가 접견실을 벗어나는 것이 보였다. 그의 등 뒤에 대고 제라드가 소리쳤다.
“반항하는 자는 베어라!”
마뉘엘에게 한 방 먹일 기회였다. 그동안 그를 속인 것도 모자라서 아무렇지 않게 얼굴을 드러내다니. 용서할 수 없었다. 이렇게 되면 의심은 더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대체 언제부터였는가.’
그를 배신한 것은.
“설마 나의 힘을 앗아간 것도 교황과 짠 것은 아니겠지.”
제라드의 중얼거림을 들은 마뉘엘이 몸을 흠칫했다. 그 모습을 정면으로 목격한 사람들이었다.
“뮤르카 제국도 별수 없군.”
파브리스의 말에 제라드의 얼굴이 붉어졌다. 아까 제라드가 한 말을 마음에 담아 둔 것이 분명했다. 그 모든 상황을 지켜본 이실리스가 베르타스에게 속삭였다.
“뭐하러 그 물건들을 찾아오라고 하였는가. 그것은 너무나도 흔한 것인걸.”
“폐하껜 중요한 것입니다.”
저 대답 앞에 ‘지금의’라는 말이 생략되었다는 것은 그도 이실리스도 알 수 있었다. 베르타스에게 고개를 끄덕인 이실리스가 마뉘엘을 향해서 입을 열었다.
“왜 교황을 따르는 것인가. 그대들의 나라를 통치하는 자는 황제인데.”
“주신 보클로엠의 힘은 대단하다! 일개 인간이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황제라고 하나 인간에 불과할 뿐, 신을 이길 수는 없다.”
마뉘엘의 말은 흡사 광신도의 그것과 같았다. 희번덕거리는 그의 눈동자를 본 제라드는 확신했다. 그의 동생은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건넜다는 것을.
“마뉘엘.”
제라드의 부름에 마뉘엘이 그를 바라보았다.
“나는 절반뿐이지만 피를 이은 너를 믿었다. 그랬는데 그 대가가 겨우 이거라니…….”
“폐하. 주신이신 보클로엠에게 힘을 바친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하십시오. 주신께서 폐하를 영광된 길로 이끌 겁니다.”
“하아.”
터져 나오는 한숨을 숨기지 못한 제라드가 고개를 저었다. 이실리스도 마찬가지였다.
‘저런 자에게 속았다니.’
본색을 드러내기로 한 이상 더는 숨길 것이 없다는 듯 신앙심을 드러내는 마뉘엘을 보면서 베르타스가 이를 갈았다.
영양가 없는 무미건조한 말들은 근위 기사가 그녀의 물건을 찾아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여기 있습니다.”
가져온 물건을 공손하게 제라드에게 바치는 기사를 보면서 베르타스가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아직 이곳에 희망은 있었다. 힘을 잃은 황제를 보호하고 존중하는 기사들이 있었다.
기사가 가져온 물건들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던 제라드가 물건들을 이실리스에게 넘겼다. 그녀가 로브를 받자마자 로브는 스스로 움직여 그녀의 몸을 감쌌다. 나머지 물건들은 직접 착용해야 했다.
“호오. 신기한 물건이로군.”
“라르헨의 사람들이 만든 물건이지. 하나 줄까?”
“그게 나에게도 좋은 것인가?”
“물론.”
이실리스가 제라드에게 손에 들린 보석을 하나 내밀었다. 방어마법이 걸린 보석이었다. 이 보석을 가지고 있으면 어떤 기운이든 한 번은 막아줄 수 있을 거다. 그녀에게 쉴 곳을 내어준 것에 대한 보답이었다.
보석을 받아들고 이리저리 살피는 제라드를 바라보며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그것의 효능에 대해 이 자리에 있는 마뉘엘이 듣기라도 한다면 또 교황에게 가서 말할 것이 뻔했으니까. 이실리스의 얼굴을 본 제라드가 잊고 있었다는 듯 손을 저었다.
“아, 그렇군. 마뉘엘 너는 가보아라.”
“형님!”
분노하면서 소리를 높였으나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제라드의 기사들이 그를 포박했기 때문이었다.
“싫다면 감옥으로 가던가.”
제라드의 말이 끝나자마자 근위 기사들이 그를 잡아끌었다.
“황궁의 가장 깊은 곳에 가두어라. 신력도 닿지 않는 어두운 곳에.”
“알겠습니다. 폐하.”
질질 끌려가면서도 마뉘엘은 입을 쉬지 않았다.
“교황께서 알면 가만히 계시지 않을 겁니다!”
“그건 나도 알아.”
대수롭지 않게 손을 젓는 제라드에게 베르타스가 말했다.
“자비롭기도 하군요. 제국을 기만한 자의 목숨을 살려두다니.”
죽여서 후환을 없애야 한다는 그의 말에 제라드가 쓰게 웃었다.
“나의 가장 소중한 것을 데리고 있는 자이기에 어쩔 수 없는 것을.”
씁쓸한 그의 표정을 보고 입을 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실리스도 입을 꾹 다물었다. 저렇게 아파 보이는 자에게 무슨 말을 하겠는가.
“그렇게 소중한 것이라면 손에 쥐고 놓지 말았어야지.”
비꼬는 듯한 파브리스의 말에 제라드가 머리를 흔들었다. 그의 충직한 기사가 파브리스를 향해 검을 빼어들다가 제라드의 움직임에 행동을 멈추었다. 뒤돌아 있던 파브리스는 그 사실을 알 수 없었다.
“그랬어야 했지. 내가 제정신이었다면 그렇게 했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