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4화. (125/161)

124화.

알 듯 모를 듯 눈을 깜박이는 이실리스를 보면서 확실하게 말해줄 필요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너의 자신감의 원천이 단지 마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그것은 네가 황제이기 때문도 아니지. 그러니 이실리스. 기운을 내.”

“베르타스…….”

이실리스는 베르타스의 말을 들으면서 마음이 벅차오르는 것을 숨길 수 없었다.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은 그녀의 모든 것이 사라져도 그녀를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마력이 없는 저, 결계를 유지하지 못하는 저를 필요하다고 말해주는 사람은 베르타스가 처음이었다.

‘생각해보면 처음이 아니었던 적은 없었지.’

그와 하는 모든 순간은 처음이자, 최초였다. 그녀의 머리를 빗겨주는 베르타스를 느끼면서 이실리스는 눈을 감았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그래도 마력은 찾아야 해.’

이렇게 지낼 수는 없었다. 일상생활을 하는 데 있어 불편함은 없었다. 그녀가 있는 곳은 라르헨도 아니었으니 더더욱 그랬다. 그녀를 짓누르던 압박감이 그리워질 지경이라니. 결계를 유지하는 동안 빠져나가는 그 마력의 흐름이 그리웠다. 베르타스의 눈치를 보니 오히려 마력이 사라진 것을 반기는 눈치였다.

“베르타스. 그대는 내가 마력이 없는 것이…… 좋은가?”

“아, 눈치챘나?”

“그렇게 티를 내는데 모를 리가.”

거울에 비친 그녀를 바라보고 웃으면서 베르타스가 말했다.

“이실리스. 나는 네가 라르헨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이 싫다.”

“베르타스. 황제가 그 나라를 위해서 힘을 쏟는 것은 당연하다.”

“모든 황제가 그런 것은 아니야. 때로는 사욕을 위해 움직이는 황제도 있고 권력에 미친 암군도 있다. 그러나 이실리스. 너처럼 제국에 헌신하는 황제는 나는 본 적이 없다.”

진지한 눈동자로 바라보는 그를 돌아보았다.

“그런 너도 좋지만 난 늘 걱정이야 이실리스. 제국은 한 개인이 품을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모든 이들이 함께 품어야 하는 곳이야. 이 커다란 곳을 혼자 감당하기엔 너는 이렇게 가녀린 사람이니.”

어깨를 쓰다듬는 그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끝으로 전해오는 따뜻한 온기를 느끼면서 이실리스는 다시 다짐했다. 다시 신전으로 들어가서 마력을 찾겠다고. 저를 설득하는 베르타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것은 아니었으나 마력은 그녀의 힘이었다.

‘내가 왜 내 것을 포기해야 한단 말인가.’

그것은 궤변이었다. 본디 그녀의 것이었던 마력을 누군가 갈취했으니 그것을 찾는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그것을 갈취한 자에게 보여주리라. 그가 탐한 것이 어떤 힘이었는지.

“어쨌든…….”

말을 이으려는 베르타스를 멈추게 한 것은 문밖에서 들려온 목소리였다.

“이파프 제국의 해상 제독께서 찾으십니다.”

“곧 나가지.”

베르타스의 말에 이실리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파브리스에게도 말해둘 필요는 있었다. 그들의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 꼭 필요한 그녀의 마력이 사라졌다는 것을.

‘사라졌으니 제국을 유지하고 싶으면 찾는 데 협조하라고 말해야겠어.’

“가지.”

그녀가 움직이자 베르타스가 방문을 열었다. 시종이 없어 그가 이런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오히려 이곳에서는 그게 편했다. 잘 알지 못하는 이들을 이 안에 들일 수는 없었으니까. 이제 그와 그녀가 이곳에 있다는 소리가 교황에게 들어갔을 것이 뻔했으니 새로운 사람을 곁에 두는 것은 자제해야 했다.

“이실리스. 이파프 제국의 사람에게 사실대로 말할 건가?”

“그래야 해.”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녀의 바로 뒤에서 들려오는 베르타스의 목소리에 그녀가 복도 한가운데에 멈추었다. 그녀의 발걸음을 잡은 그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너의 마력이 사라진 것을 안 이파프 제국에서 저 반대쪽에 있는 신전의 손을 잡을 수도 있다는 것을 왜 모르나.”

“베르타스. 파브리스는 그런 자가 아니야.”

“그야 네가 힘을 가지고 있을 때는 아니었겠지. 허나 사람은 언제나 달라질 수 있지.”

“그건 네 경험에서 나온 말인가?”

순간 아픈 표정을 짓는 베르타스의 얼굴에 이실리스는 입술을 다물었다. 날카롭게 튀어 나가는 말을 다잡을 수 없었다. 계속해서 그녀가 하려는 일을 막으려는 베르타스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영영 마력을 되찾지 못했으면 싶어 이러는 것인가.’

이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베르타스를 의심했다.

“…… 사람은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법이다. 너는 이제 약자에 불과해.”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입술을 깨무는 이실리스를 보면서 한숨을 내쉰 베르타스가 굳은 입매를 숨기지 않으며 말했다.

“그러니 늘 조심해 줬으면 좋겠어. 너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나는 견딜 수 없을 테니까.”

저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라는 것을 왜 모를까. 그러나 계속 마음이 심란했다. 이런 입장이 되어본 것이 처음이라 기분을 다스릴 수 없었다. 그녀는 세상에서 언제나 강자였다. 황제의 위를 이을 자로 태어났으며 강력한 마력을 지니고 태어났다.

그녀를 위협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사이르카 같은 사상을 지닌 자들이 있었으나 그들은 어차피 그녀의 마력 앞에 무릎 꿇은 자들이었다. 패자는 말이 없는 법. 그것은 모두 그녀가 마력을 갖고 있었기에 해결되었던 것이었다.

“베르타스.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그래.”

“저 파브리스가 정말로…… 내가 마력을 잃었다는 것을 알면 신전 쪽에 붙을 거라고?”

“언제 마력을 찾을지 모르는 너에게 기대는 것보다 신전과 손을 잡는 것이 더 빠른 해결책일 테니까.”

단정하는 베르타스의 말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속에서 서서히 의심이 싹트기 시작했다. 아무런 힘이 없는 그녀에게 과연 파브리스는 선의를 베풀 것인가.

“베르타스, 난…….”

“쉿.”

저 멀리서 다가오는 파브리스를 본 베르타스가 그녀에게 속삭였다.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뒤를 돌아본 이실리스가 파브리스를 향해 입을 열었다.

“성격도 급하군.”

“일이 바쁜데 네가 복도에서 서성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 나와보았지.”

“내 부군과 담소를 나누는 것이 언제부터 서성이는 일로 취급되었는지 모르겠군.”

그녀의 말에 빙긋이 웃은 파브리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시종들이 알려주더군.”

“입이 가벼운 자들이로군.”

베르타스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지나가는 자들을 본 적이 없었다. 그랬는데 시종들이 알려줬다니. 말이 되지 않는 소리였다. 이실리스가 오는 시간이 길어지자 재촉하려고 나온 것이 틀림없었다. 새삼 집요한 파브리스의 성격을 떠올린 그녀가 표정을 굳혔다.

“뮤르카 제국의 시종들이 가벼운 입을 가진 것을 내가 어찌할까.”

“이파프는 그렇지 않다고?”

“그야 와 봐서 알 것 아닌가.”

이파프에 가보기는 했지만 오랜 시간을 머무른 적은 없었다. 그러니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어쨌든 어서 들어가지.”

할 말이 많은 듯 이실리스에게 재촉하며 걷는 파브리스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그녀의 뒤에서 걷는 베르타스의 손을 잡아끌어 그녀의 옆에서 걷게 했다.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던 베르타스가 곧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걸었다.

호위 기사처럼 그녀의 뒤를 지키는 베르타스가 싫었다. 그는 대접받아 마땅한 라르헨의 국부였다. 그녀의 곁에 설 자격이 있는. 그 기척을 느낀 파브리스가 걷다가 흠칫하는 것을 이실리스는 볼 수 없었다. 그러나 베르타스는 그 모습을 눈에 담았다.

“이실리스.”

손을 내밀어 그녀를 에스코트하려는 베르타스의 손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 그녀의 손을 꼭 붙잡는 베르타스를 보면서 웃음을 흘렸다. 가끔 미운 말도 하는 사람이었으나 그만큼 그녀를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마력을 잃은 지금도, 마력을 잃지 않았던 과거에도 한결같았던 사람. 그게 베르타스 라르헨이었다.

접견실 안으로 들어간 파브리스를 따라 들어가자 이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제라드의 얼굴이 보였다. 이실리스를 보면서 반갑다는 듯 손을 젓는 그를 보면서 베르타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뮤르카 제국의 황제가 여긴 무슨 일이지?”

“내가 아니었다면 누가 이 접견실을 내어줄까. 나는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이야기 나누게.”

있는 사람을 없는 사람 취급하라는 그의 태도가 어이없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곳은 뮤르카제국이었으니. 떨떠름한 얼굴로 그를 지켜보던 파브리스가 어쩔 수 없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실리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나도 마찬가지야. 알뤼르를 찾아야 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가 얼마나 더 버틸 수 있는지도 모르고.”

“너의 마력이라면 그냥 신전에 쳐들어가서 알뤼르를 찾아오면 될 것이 아닌가?”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파브리스에게 이실리스가 헛웃음을 지었다. 가당찮은 말에 대꾸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마력을 뭐로 생각하는 건가. 신전에 쳐들어가서 알뤼르를 찾아오라니. 그가 어떤 꼴인 줄 알고. 

‘저게 내 친우라고?’

아니, 친우라고 불릴 수가 없는 자였다. 어릴 적 인연으로 인해 가깝게 지내던 자에 불과했다. 이실리스는 마음속으로 선을 그었다. 한없이 가깝다고 생각했던 파브리스조차도 그녀에게 요구하는 것은 같았다. 보다 못한 베르타스가 앞으로 나섰다.

“말 참 쉽게 하는군. 그렇다면 네가 들어가서 알뤼르를 찾아와라. 네가 그를 데려온다면 우리가 이파프 제국으로 가겠다.”

베르타스의 말에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파브리스였다. 파브리스는 마력을 사용하는 라르헨의 마법사들과는 다르게 술법을 사용하는 술사였다. 그중에서도 물을 다루는. 거기다 검도 제법 다룰 줄 알았으니 힘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그랬는데 이실리스에게 마력을 사용하라고 종용하다니.

그가 지닌 힘을 알고 있는 이실리스는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애써 삼켰다. 그의 힘이라면 신전에 들어가 알뤼르를 찾아올 수도 있었다. 그뿐이랴 어쩌면 이그나르도의 마법진을 파훼할 수도 있었다. 이그나르도의 마법진이 소드마스터의 힘을 빼앗았다고 들었으나 술법은 그와 전혀 다른 힘이었으니.

‘결국, 너도 나의 마력 때문에 내가 필요한 것이었나.’

베르타스의 말과 똑같은 모습을 보이는 파브리스를 보면서 이실리스는 회의감에 사로잡혔다. 

“참…… 사람 같지도 않은 것들이 너무 많군. 권력을 잡으면 다들 그렇게 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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