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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화. (124/161)

123화.

생각에 잠긴 이실리스를 보면서 베르타스는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의문이었다. 그러나 이실리스는 달랐다. 그였다면 벌써부터 라르헨이라는 제국의 이상한 점을 눈치채고 그 점을 고치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한 사람의 희생으로 커진 나라. 라르헨.

희생한 사람이 그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베르타스는 그 나라의 밑바닥부터 뜯어고칠 의향이 있었다. 그래야 더는 라르헨을 위해서 이실리스가 희생하지 않을 테니까.

‘정작 그녀는 별다른 생각이 없는 것 같지만.’

여태까지는 그랬다. 이실리스는 그녀가 라르헨을 위해서 희생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도 못했다. 다만 황제의 숙명 같은 것으로 여겼을 뿐. 베르타스가 보기에 정상적이지 않은 것을 정상으로 받아들이는 이실리스. 그래서 말 한번 꺼내지 못했다.

‘지금이 기회야.’

다시 없을 기회였다. 지금이 아니면 이실리스에게 이런 경각심을 줄 수도 없었다. 누가 생각했을까. 라르헨의 황제인 이실리스 라르헨이 마력을 잃을 것이라고. 역대 라르헨의 황제 중 누구도 마력을 잃은 황제는 없었다. 이실리스가 처음이었다.

“베르타스…….”

“라르헨으로 돌아가기 전에 알아둬야 할 것 같아서.”

비겁하고 이기적인 자들의 속내를 알고 라르헨을 포기하면 좋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쉽지 않겠지만 뭐든 처음이 어려운 법. 베르타스는 흐트러진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면서 속삭였다. 그의 검은 속내를 눈치채지 못한 이실리스의 표정이 흐려지는 것이 보였다. 그게 마음 아팠으나 베르타스는 한 번 입 밖으로 낸 말을 포장하려 노력하지 않았다.

그저 기다릴 뿐. 그녀의 판단이 끝나기를.

무슨 생각을 그리 오래 하는지 계속해서 말이 없는 이실리스를 보니 심술이 돋았다. 생각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그의 생각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사랑하는 여자가 기억을 찾았고 지금은 둘뿐인데 제가 아닌 다른 무언가를 생각하느라 저에게 시선도 주지 않는다는 상황은 꽤 짜증 났다.

“이실리스.”

그의 부름에도 대답이 없는 그녀의 얼굴을 살짝 어루만졌다. 눈동자에 빛이 돌아오고 그에게 시선이 닿자 그가 속삭였다.

“이제 우리 둘뿐인데 계속 다른 생각만 할 텐가?”

“여긴 라르헨이 아니야. 베르타스.”

“그럼 라르헨이라고 생각하면 돼.”

당황한 듯 이리저리 몸을 피하려는 이실리스의 몸을 부여잡았다. 기다리고 기다렸던 순간이었다.

* * *

세드릭은 늦은 밤 마뉘엘의 방문을 받았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찾지 못했습니다.”

마뉘엘의 말에 세드릭이 분노했다.

“저 안에서 빠져나갈 정도면 신력이 상당하다는 소리인데 그 신력을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습니다. 그것은 신전의 것입니다.”

“성하 일단 진정하시고…….”

“대체 저 안에서 어떻게 나간 거냐고!”

분노한 세드릭이 앉아있던 의자를 내려쳤다. 커다란 소리에 놀란 신관들이 밖에서 접견실의 문을 열고 들어왔지만, 세드릭의 표정을 보고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다. 마음을 가라앉히려는 듯 깊은숨을 내쉬는 세드릭을 향해 마뉘엘이 입을 열었다.

“이번 일로 황제가 눈치를 챘습니다.”

“이미 힘을 빼앗긴 자가 눈치챘어도 할 수 있는 일은 없지.”

“그야 그렇지만…….”

마뉘엘은 형님이 평생 모르기를 바랐다. 주신 보클로엠의 힘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 힘을 직접 목격한 그로서는 신전에 협조할 수밖에 없었다. 주신의 힘이란 것은 그를 억누르고 짓밟을 정도로 대단한 것. 그 힘을 목격하지 못한 자들이 저 밖을 돌아다니면서 신전을 욕할 때마다 나서서 신전을 대변하고 싶었으나 참았다.

그에게 주어진 사명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사명은 신과 적대하는 척하면서 신을 믿지 않는 황궁의 숨겨진 자들을 색출해 내는 것이었다. 마뉘엘 만큼 신실한 자도 없을 터였다. 그는 교황 세드릭의 밀명을 받은 자였으니. 

“마뉘엘.”

세드릭의 부름에 그가 고개를 돌렸다.

“가서 황제의 동태를 파악하고 오세요.”

“형님을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대에게 가지 않았다면 황제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들이 도움을 청할 곳은?”

“이미 사람을 보냈습니다.”

“역시 그대는 신실한 신의 종입니다.”

세드릭의 극찬에 마뉘엘이 얼굴을 붉혔다.

“아닙니다. 저는 다만 주신 보클로엠님의 뜻을 따를 뿐.”

“그대와 같은 사람들이 많아져야 할 텐데요. 요즘 들어 주신의 뜻을 따르지 않는 자들이 너무 늘어서 말입니다. 얼마 전에도 그렇습니다. 감히 신전의 마차를 습격하다니.”

“그자들은 모두 죽지 않았습니까?”

“죽었지만 다음 일을 획책하고 있는 자들이 있는 듯합니다.”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진심으로 분노한 듯 손을 부들부들 떠는 마뉘엘을 보면서 세드릭이 웃었다.

“물론 그런 자들도 품어야 하는 것이 신의 뜻을 받드는 우리의 사명이 아니겠습니까.”

“교황님은 너무 자비로우십니다.”

마뉘엘의 말에 주변을 둘러보던 세드릭이 그에게 손짓했다. 그의 손짓을 따라 가까이에 온 마뉘엘에게 세드릭이 속삭였다.

“그 불순한 무리들이 황궁에 있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혹여 황제에게 헛소리라도 하면 어쩝니까. 그 무리들에게 황제가 넘어가기라도 한다면…….”

“그럴 리가 없습니다! 형님은 신의 힘을 직접 경험하신 분입니다!”

“세월이 지났으니 잊었을 수도 있죠.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니까요.”

입꼬리를 올려 웃는 세드릭을 향해 마뉘엘이 다짐했다.

“제가 형님 주변에서 헛소리를 지껄이는 자들을 모조리 색출해서 잡아 오겠습니다.”

“저런…… 그런 자들도 믿음으로 감싸야 하는 것이 신전인데요.”

“아니, 저는 신관이 아니니 제가 할 수 있습니다. 제가 하게 해 주십시오.”“정 그렇게 원한다면.”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밖으로 나서는 마뉘엘의 뒷모습을 보며 세드릭이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마뉘엘이 어렸을 적, 신전에 잘못 발을 들인 적이 있었다. 신전을 헤매다 보클로엠이 있는 곳에 들어가게 된 것은 정말 우연이었다. 그리고 세드릭이 그 안에 있었던 것도.

보클로엠이 인간의 형상이 아닌 마물과도 가까운 존재라는 것은 대대로 교황에게만 전해져 오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보클로엠의 몸에서 신력을 빼내는 작업을 목격한 마뉘엘은 마법진에 묶인 ‘것’이 보클로엠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주신 보클로엠을 형상화한 그림은 완벽한 인간. 붉은 머리카락의 군청색 눈을 지닌 인간이었으니. 모든 것을 목격한 마뉘엘에게 세드릭은 거짓으로 설명했다.

‘이것’은 보클로엠의 뜻을 어겨서 이렇게 된 것이라고. 그래서 보클로엠의 힘에 묶여 나갈 수 없는 것이라고. 영원히 이곳에 갇혀 살아야 한다고. 어린 나이에 끔찍한 장면을 목격한 마뉘엘은 세뇌당하기 쉬웠고, 금방 길들었다.

‘다른 이들에 비하면 정말 쉬웠지.’

마뉘엘처럼 충직한 부하가 어디 있을까. 그가 가져올 새로운 소식을 기대하면서 세드릭은 의자에 편하게 몸을 기댔다. 아쉬웠다. 

‘그 여자의 신력이라면, 그곳을 빠져나갈 정도의 힘이라면…….’

해가 뜨는 것도 모른 채 세드릭은 생각에 잠겨 밤을 보냈다.

‘그 힘을 차지해야 해.’

결정은 쉬웠고, 행동도 빨랐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신관들에게 말했다.

“황궁으로 가야겠다.”

* * *

깜박. 그리고 다시 깜박. 눈꺼풀을 들어 올리기가 어려웠다. 몸을 뒤척이는 그녀의 등을 쓰는 부드러운 손길이 느껴지자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더 자도 괜찮아. 여긴 라르헨이 아니니.”

햇살이 창의 절반을 넘어온 것으로 보아 해가 뜬지 한참이었다. 두리번거리는 그녀를 향해 들려오는 다정한 목소리를 들은 이실리스가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베르타스가 애정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실리스. 좀 더 쉬어야 해.”

“떨어지게.”

손에서 마력을 일으키는 그녀를 보면서 베르타스가 양손을 들어 올렸다.

“아무리 나라도 네가 그걸 던지면 죽고 말 거야.”

“그만하라고 하지 않았나.”

“얼굴은 달아올랐고 눈꼬리에 눈물을 달고 있었는데? 진짜 그만했어야 했나?”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기면서 귓가에 속삭이는 베르타스를 이길 수 없었다. 어느새 그녀의 손안에 있던 마력은 흔적 없이 흩어졌고 그의 품에 안긴 이실리스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 때문에 몸을 움직이기 힘들어.”

“마력으로 치료해도 될 텐데? 아, 그렇군.”

알만하다는 얼굴로 베르타스가 그녀를 보며 웃었다.

“어젯밤에 소리를 차단하는 데 마력을 너무 많이 사용한 거로군.”

베르타스의 말에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의 마력이 정상적이었다면 하다못해 이곳이 라르헨이기만 했다면 아무렇지 않게 움직였을 터인데 이곳은 다른 제국의 황궁이었다. 손님에게 내어준 방에서 아무렇지 않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몰염치하진 않았다.

“그나저나 놀랍군.”

“뭐가?”

“이실리스 네가 마력이 부족해서 치료마법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게 놀라워.”

어두워지는 이실리스의 얼굴을 보면서 아차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계속해서 상기시켜 주는 것이 좋았다. 이제 이실리스는 대마법사가 아니었다. 본신의 마력은 어디로 갔는지 사라져버렸으니 보클로엠이라는 자를 만나면 찾을 수 있다는 것도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니 계속 알려줘야 했다. 그녀는 이제 끝도 없이 마력을 쓸 수 있는 자가 아니라는 것을. 혹여 전과 같이 행동하다 잘못될 수도 있었기에 베르타스는 조금 미움을 받더라도 그녀에게 끊임없이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도 알고 있네.”

한숨을 내쉬는 이실리스를 보면서 베르타스가 그녀의 옷을 들었다.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그의 행동에 그녀가 당연스럽게 팔을 뻗었다. 스스럼없이 그가 입혀주는 옷을 입는 그녀를 보니 실감 났다. 그녀의 기억이 돌아왔다는 것이. 가끔 잠자리 후에 옷을 입혀줬던 예전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그가 하나씩 그녀의 의복을 챙겼다.

“내가 영영 마력이 돌아오지 않으면 어찌해야 할까.”

“…….”

한탄하듯 나온 그 말에 베르타스는 답하지 않았다. 저에게 한 말이 아니었다. 답답한 마음에 속마음을 입 밖으로 낸 듯싶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 그녀를 거울 앞에 앉혔다. 어젯밤에 흥분에 젖어 있는 이실리스를 비추던 그 거울이었다.

“베르타스!”

몸을 틀어 벗어나려고 하는 이실리스의 어깨를 잡았다. 그리고 속삭였다.

“이게 너야.”

“뭐라고?”

“붉은 머리카락에 군청색 눈동자를 지닌 너. 내가 사랑하는 너. 그 자체다. 나는 너의 모든 것을 사랑해 이실리스. 마력이 돌아오지 않아도 나에겐 상관이 없다. 나는 네가 마력을 갖고 있어서 사랑한 것도 아니고, 라르헨의 황제라서 사랑한 것도 아니다. 다만 내가 사랑하는 너는 그 자체로 빛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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