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2화. (123/161)

122화.

이실리스의 말을 듣자마자 제라드는 웃었다. 

“이젠 헛소리가 들리는군.”

“제대로 들은 것이 맞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제라드의 모습에 이실리스가 마력을 일으켰다. 그녀의 몸에서 붉은 기운이 흩날리자 위세에 눌린 제라드가 표정을 무너뜨렸다가 이내 몸을 바로 했다. 기운을 일으키는 그를 본 베르타스가 그녀의 뒤에서 기세를 일으켰다. 그의 위압감에 짓눌린 제라드가 표정을 구기자 이실리스가 입을 열었다.

“나도 헛소리를 하고자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은 아니야.”

“이게 헛소리가 아니면 뭐라는 거지?”

날카로운 제라드의 말에 이실리스가 웃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이렇게 앉아서 떠들어 봤자 그에게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그래서 기다렸다.

“폐하! 해상제국에서 사신단이 왔습니다.”

저 말을.

이실리스가 베르타스와 함께 뮤르카 제국의 수도로 들어왔던 그 순간, 제국민들이 수군대는 소리를 들었다. 시국이 험난한데 외부인이 들어왔다고. 외부인을 배척하는 뮤르카 제국의 제국민들은 다른 나라에서 온 사신조차도 달갑지 않았다. 그들의 수군거림은 이실리스와 베르타스의 귀까지 닿았고, 그녀가 계획한 대로 움직일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나는 손님을 만나야 하니 이제 나가보게.”

제라드의 말에 이실리스가 붉은 입술을 열었다.

“해상제국의 사람이라면 나도 아는 사람이니 같이 만나도 되겠군.”

꼼짝도 하지 않는 이실리스의 모습에 제라드는 헛웃음을 쳤다. 

‘동생도 나의 등에 칼을 꽂더니 이젠 웬 이상한 여자도 나를 우습게 보는군.’

이런들 어떻고 저런들 어떠하리. 제라드는 이미 모든 일에 대한 의욕을 잃었다. 그의 동생인 마뉘엘이 그를 배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부터 아니, 소드마스터였던 그의 오라를 잃은 그 순간부터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이젠 아무래도 좋았다.

“좋아. 들어 오라 해라!”

망신을 당해도 저 여자가 당하는 것이니 저는 아무 상관이 없다면서 제라드가 밖에 있는 시종장에게 소리쳤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해상제국의 제독이 보였다. 파브리스 이파프. 오랜만에 보는 친우의 얼굴에 이실리스가 손짓했다.

“이실리스 라르헨!”

그녀의 풀네임을 스스럼없이 부르는 파브리스의 모습에 베르타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의 앞에 파브리스만 있었다면 베어버릴 듯한 기세에 이실리스가 베르타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시선을 받자 기세를 줄이는 그를 보면서 제라드가 비웃었다.

“소드마스터 씩이나 되는 자를 호위로 두다니.”

“호위라니. 그는 라르헨의 국부일세.”

이실리스의 눈이 휘었다. 베르타스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서 애정이 넘쳐흘렀다.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는 제라드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실리스가 입을 열었다.

“파브리스.”

“아니, 이게 대체……! 살아 있다면 연락을 할 것이지, 어떻게 된 일이지? 알뤼르는 어디 가고?”

“일이 꼬였네. 파브리스 이파프.”

파브리스의 풀네임을 부르는 이실리스에게 진지한 시선을 던진 그가 시종들이 준비한 의자에 앉았다. 이로써 그녀가 원했던 모든 사람이 한자리에 있게 되었다. 뮤르카 제국의 수도로 들어오는 동안 베르타스에게 모든 일을 들은 그녀였다. 그녀가 알지 못했던 라르헨의 사정까지 들은 이상 망설일 수 없었다. 얼른 해결하고 제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나의 신분을 증명해 줄 자가 왔으니 이제 됐나?”

이실리스가 제라드를 보면서 물었다. 제라드 뮤르카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라르헨의 황제는 뛰어난 마법사라고 들었는데 신녀라니…….”

“신녀? 누가?”

제라드의 중얼거림을 들은 파브리스가 이실리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의뭉스러운 웃음을 짓는 이실리스를 보면서 파브리스는 입을 다물었다.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그녀의 표정을 읽었다.

“그렇다면 라르헨의 황제인 그대가 왜 이곳에 와 있는 것이지?”

“그것은 내가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실리스는 제라드에게 선을 그었다. 사실이었다. 그녀조차 이곳으로 올지 생각하지 못했다. 정말 갑작스러운 사고였다.

‘아니, 사고는 아니지.’

보클로엠이 불러서 온 것이었으니. 그녀를 부른 보클로엠이라는 자의 정체가 궁금했다. 대체 어떤 자이기에 그녀의 마력을 빼앗고 기억을 앗아갔는가.

‘이베르트를 거쳐 마력을 앗아가기는 했지만, 그 정도로 마력이 대단한 자라는 것인데…….’

무려 대마법사인 이실리스의 마력을 종국에는 빼앗은 자였다. 그렇다면 적어도 대마법사이거나 그녀의 마력을 상회하는 마력을 가진 자라는 소리. 그런 존재는 누구일까. 앞에서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하고 생각에 빠진 이실리스를 끌어당긴 것은 베르타스였다.

“왜…… 아, 실례했군.”

이실리스의 말에 파브리스가 묘한 시선으로 둘을 바라보았다.

“라르헨에서는 황제의 몸에 손을 함부로 대는 사람이 있군.”

“그 사람이 국부라면 상관없지.”

베르타스가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이실리스가 선수를 쳤다. 그녀의 말에 굳었던 베르타스의 표정이 풀어졌다. 그녀를 향해서 부드러운 시선을 던지는 그의 눈을 보며 이실리스도 눈을 휘었다. 애정이 넘치는 둘의 모습에 이번엔 파브리스가 표정을 굳혔다.

“여긴 뭐 정상인 것들이 없군.”

파브리스의 시선을 목격한 제라드가 말했다. 그의 말에 시선을 돌린 파브리스를 향해 어깨를 으쓱인 제라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피곤하니 오늘은 이만하지. 시종장, 손님들께 방을 안내해라.”

귀찮은 듯 손짓하는 제라드의 뒤로 시종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실리스와 베르타스 그리고 파브리스에게 방을 안내한 시종장이 이실리스에게 허리를 숙여 말했다.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줄을 당기시면 됩니다.”

“알았다.”

시종장이 밖으로 나가자마자 베르타스가 이실리스를 향해 물었다.

“해상제국의 그자와 잘 아는 사이인가?”

“어릴 적 본 사이지. 해상제국과 라르헨은 밀접한 관계가 있으니까.”

“이실리스.”

불안한 듯 흔들리는 베르타스의 표정이 드러나자 이실리스가 살풋 웃었다. 그녀를 사랑하는 베르타스는 아직도 그녀에 대한 믿음이 굳건하지 않은 것 같았다.

“불안한가?”

침대에 앉은 이실리스가 그녀의 옆자리를 ‘툭툭’ 두들기면서 베르타스를 불렀다. 그 가벼운 손짓에 베르타스가 홀린 듯이 이실리스의 옆에 붙어 앉았다. 기억을 잃은 동안도 그녀의 곁을 지켜준 사람이었다. 베르타스는.

“이실리스. 나는 늘 불안해.”

“내가 늘 말하지 않았나. 내가 선택한 사람이 너라고.”

“나의 황제께서는 너무나도 많은 짐을 지고 계셔서 나 같은 한미한 자는 신경도 쓰지 않는 줄 알았지.”

무심한 듯 툭 던지는 베르타스의 말에 이실리스가 눈꼬리를 접어 웃었다.

“한미한 자라니. 라르헨의 국부가 한미한 자라면 라르헨의 황제인 나는 뭐지?”

“황제는 그 자리에 있는 그것만으로 빛나는 자. 그게 이실리스 너라면 더 그러하지.”

“나는 높게 평가하는 것은 고마우나 그로 인해 너를 낮추는 것은 안 돼. 베르타스. 너는 내 옆에 서야 하는 사람이니.”

“이실리스.”

저의 눈을 바라보는 베르타스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짙은 눈동자가 이실리스에게 하고 싶은 말을 알 것 같았다. 아마도 그가 그녀의 곁에 있는데 왜 늘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냐는 말이겠지. 그것은 그녀로서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라르헨의 황제야.”

“나는 네가 황제가 아니어도 사랑해. 그 사실을 알지 않나.”

이번 사건으로 인해서 확실해졌다. 베르타스는 라르헨의 황제이기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 자체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벅차오르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이실리스가 베르타스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자 그가 다정하게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의 강인한 팔이 이실리스를 감싸자 그녀의 불안감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기억을 찾았음에도 여전히 들었던 불안감. 그 불안은 온전치 않은 마력 때문이었다.

이실리스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느낀 것은 마력의 이상함이었다. 기억이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마력은 돌아오지 않았다. 마력은 본디 자연에 존재하는 것이니 마력을 운용하면 자연스럽게 채워지는 것이었는데 아무리 마력을 운용해도 그녀의 마력은 채워지지 않았다.

“마력은 다 찾은 건가?”

“아니, 아직.”

나지막한 베르타스의 물음에 이실리스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 목소리에서 불안감을 읽은 베르타스가 그녀를 밀었다. 그의 힘에 밀려 침대 위에 누운 이실리스의 몸 위를 베르타스가 올라탔다. 팔 안에 그녀를 가둔 그가 이실리스의 뺨에 입술을 내렸다. 부드러운 감촉이 그녀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고 장난스러운 미소가 입가에 걸렸다.

“나는 이것이 더 마음에 들어.”

“뭐?”

“네가 마력을 찾지 못한 지금이 마음에 든다고.”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네가 영영 마력을 찾지 못해도 괜찮아 이실리스.”

“나라의 결계는 어쩌고!”

이실리스가 항의하듯 외치자 순식간에 베르타스의 시선이 바뀌었다. 조금 더 진지한 시선이 그녀의 눈을 사로잡았다.

“지금은 누가 결계를 유지할 것 같나?”

“…… 어머니겠지.”

“그래. 결국, 라르헨은 네가 아니어도 된다는 소리였어 이실리스.”

“뭐라고?”

베르타스의 말이 벼락처럼 그녀의 귀를 때렸다. 내가 아니어도 된다니. 그럼 지금까지의 나는 뭐란 말인가. 라르헨을 위해서 마력을 사용해야 하고 라르헨을 위해서 키워진 이실리스 라르헨은 대체 뭐란 말인가. 그녀의 표정이 무너지자 베르타스가 다시 다정하게 입술을 내렸다.

“그러나 나에겐 네가 필요해 이실리스. 라르헨의 황제가 아닌 그냥 네가.”

“베르타스.”

흔들리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이실리스는 그녀의 얼굴 곳곳에 입술을 내리는 베르타스의 입술을 느끼면서도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결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만 황제가 필요한 것이었나? 내가 그동안 라르헨을 위해서 한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그동안 내가 펼친 정책과 제국민을 위한 제도들은…… 의미 없는 것이었다고?’

결계 이외의 것에 황제는 필요 없는 것인가? 그럼 나를 왜 황제의 위에 올린 것인가? 나는 대체 왜!

라르헨의 결계는 마력이 강한 사람이 유지해도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라르헨의 혈통을 이은 황족이 지니고 있는 마력이 결계에 가장 적합한 것이었기에 황제들은 대대로 라르헨의 결계를 지켜왔다. 

‘……내가 실종된 지금 라르헨의 결계를 유지하는 다른 사람이 있으니 나는 필요 없다고? 라르헨에 나의 자리는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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