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1화. (122/161)

121화.

이실리스의 경고에 이베르트가 흠칫하여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베르타스의 몸에서 오라가 피어오르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이실리스가 앞에 없었다면 금방이라도 오라를 쏘아 보낼 것 같은 베르타스의 기세에 이베르트는 몸을 흠칫했다. 그의 마력이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베르타스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으나 지금은 어려웠다. 

그의 반려인 보클로엠에게 거의 모든 마력이 넘어가고 있었고 보클로엠에게 넘어가는 마력은 그가 채울 수도 없는 것이었다. 마법사의 가장 중요한 마력을 넘기는 것. 즉, 생명이라고 불리는 것과 비슷한 마력을 넘기고 있었으니.

“알뤼르를 그렇게 보내는 것이 아니었는데.”

후회되었다. 수석마법사인 알뤼르가 그녀의 곁에 있었다면 무언가 새로운 것을 생각해 낼지도 몰랐다. 그러고 보니 이러고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그녀의 마력이 빠져나가고 있는 순간에도 알뤼르의 마력도 사라지고 있을 터였다. 마력이 고갈된 마법사에게 남은 것은 죽음뿐이었다. 

몸을 구성하고 있는 마력이 하나도 남지 않고 사라지게 되면 마법사 또한 흔적도 없이 먼지가 되어 버린다. 그것이 대마법사의 시신이 남지 않는 이유였다. 알뤼르도 대마법사였으니 마력이 소진되면 먼지로 사라질 것이 뻔했다. 그러기 전에 구해야겠다.

“황제에게 가야겠군.”

“이실리스. 나는…….”

베르타스가 입술을 달싹이다 그대로 다물었다. 탐탁지 않은 그의 표정이 보였지만 방법이 없었다. 황제가 그녀에게 보이는 관심을 이실리스도 잘 알고 있었다. 황제의 힘을 빌리지 않는다면 신전으로 들어가기 어려웠다.

“교황의 손에 다시 걸리면 방법이 없어 베르타스. 가장 안전한 것은 황궁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곳도 안전한 곳인지 알 수 없지만 황궁뿐이었다. 마뉘엘이 신전과 내통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려야 했고. 아니, 그것을 알리려고 가는 것이 아니었다. 황제가 신전에 사람을 심어두었다는 것을 아는 이실리스는 그 사람이 황제에게 연락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당연히 그녀에게 힘을 실어주려고 할 터.

‘그자가 연락을 했을 거야.’

하지 않았을 리 없었다. 신전에 갇혔던 사람이 탈출했다. 이실리스가 유일했다. 그 이그나르도의 흑마법진에서 빠져나온 사람은. 그것이 그녀의 마력 때문이 아니라 목에 걸린 목걸이의 수호 때문이었지만. 

새삼 이 목걸이를 그녀에게 넘겨준 베르타스에게 감사했다. 이게 아니었으면 죽을 수도 있었으니. 생각에 빠진 그녀의 귓가에 베르타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가 믿을 것 같나?”

“아니, 믿지 않겠지.”

“그렇다면 대체 왜?”

“그도 나와 같은 황제이니 알 것이다. 때로는 가장 믿는 자가 그를 겨누는 칼날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아마 의심하고 있을 거였다. 그러니 마뉘엘의 앞에서 이런저런 말을 하지 않고 머저리 같은 모습을 보인 것이겠지. 기억을 잃은 상황을 천천히 돌이켜 보면 그랬다. 황제인 제라드는 타고난 지배자였다. 그녀를 빌미 삼아 마뉘엘에게서 면죄부를 빼앗은 것도 그랬다.

‘그래. 만만한 자가 아니야.’ 

마뉘엘은 그녀를 신전으로 넘기지 않는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제라드에게 면죄부를 내줄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제라드는 그것을 기다렸을 게 분명했다. 눈에 선히 보였다. 면죄부를 먼저 빼앗고 마뉘엘을 친다.

“이미 마뉘엘을 잡았을지도.”

이실리스의 중얼거림에 의아한 표정을 짓는 베르타스를 보면서 그녀가 웃었다. 의뭉스러운 그 웃음에 베르타스가 물었다.

“왜 웃지?”

“새삼 그런 생각이 들어서.”

“무슨 생각?”

“이 나라의 황제도, 라르헨의 황제인 나도, 모두 똑같다는 생각.”

“똑같다고?”

“그래.”

그랬다. 가지고 있는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같았다. 아니, 황제의 위를 노리는 자들에 대한 견제가 같았다.

‘어디든 궁중암투는 변하지 않는군.’

라르헨이 그리워졌다. 그런 암투마저도 즐겁게 즐길 수 있었던 그녀의 고향. 이실리스의 얼굴이 무언가를 그리워하듯 애잔하게 변하자 베르타스가 속삭였다.

“이실리스.”

“에리카는 잘 있나?”

“당연한 소릴.”

“그렇다면 다행이야.”

그게 제일 궁금했다. 그녀의 딸이 무사한지. 그 아이가 저를 그리워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게 궁금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최우선은 이미 라르헨이 아니라 에리카와 베르타스가 되어있었다. 베르타스는 그녀가 늘 라르헨만을 생각한다고 했지만, 실상은 아니었다.

이미 그녀의 마음은 에리카와 베르타스로 가득했으니까.

“베르타스.”

“그 입에서 들리는 이름이 듣기 좋군.”

“내 이름을 불러.”

“뭐?”

그녀의 말에 잠시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던 베르타스는 이내 그녀의 마음을 짐작한 듯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이실리스.”

“그 입에서 나오는 내 이름이 듣고 싶었어.”

이실리스의 입에서 흩어지는 그 말에 베르타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웃는 듯 우는 듯한 그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미소 짓던 이실리스가 마지막 말을 던졌다.

“일단 황궁으로 가야겠다.”

고집하는 그녀를 막지 못하고 베르타스도 이베르트도 황궁으로 향하기로 했다. 신전 근처의 이 숲은 상당히 위험한 곳이었으니 남들이 눈치채지 못하는 밤에 이동하기로 했다. 마법을 사용하여 모습을 감춘 채 움직이느라 운신이 자유롭지 못했다. 황궁으로 가기까지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걸렸고 황궁 앞에서가 문제였다. 그 안으로 들어갈 방법이 없었다.

마뉘엘이 곁에 있을 때는 대공이라는 자가 신분을 보장했기에 황궁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는 이베르트와 베르타스를 보면서 이실리스는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하려고 하지?”

베르타스가 이실리스에게 의견을 물었다. 그의 물음에 그녀가 웃었다.

“어떻게 하긴. 정공법이지.”

거침없이 수도의 한 가운데 위치한 황궁으로 걸었다. 황궁을 감시하는 누군가에게 들킬 확률도 있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황궁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모든 일이 끝나있을 테니까. 화려한 황궁의 문 앞에서 모습을 드러낸 이실리스가 문을 지키는 자에게 말했다.

“보클로엠의 부름을 받았던 신녀가 돌아왔으니 폐하께 알려라.”

긴가민가하던 황실의 수문장이 그녀의 손에 둘러진 붉은 기운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다녀오겠다고 소리치는 수문장을 보며 이실리스는 웃었다. 그녀의 손에 있는 붉은 기운은 잠시 머물다가 사라졌다. 그 마력을 아쉬운 듯 바라보는 이베르트였다.

“난 먼저 가야겠어.”

이베르트의 말에 이실리스와 베르타스가 그를 바라보았다.

“나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으니.”

초대 황제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그에게 가지 말라고 말할 수 없었다. 이베르트는 그의 얼굴을 알 수 있는 사람이라도 만난다면 곤란해진다는 것을 이유로 멀리 도망갔다.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이를 가는 베르타스의 손을 토닥였다. 어차피 도망가도 돌아올 곳은 그녀가 있는 곳이었으니까. 이실리스의 곁이 아니면 보클로엠을 만날 방법은 없었다.

“이렇게 쉬운 방법이 있는데 돌아갈 이유가 없지.”

타고난 전략가라고 베르타스는 생각했다. 그녀의 얼굴을 알고 있는 황궁의 사람들이 그녀를 힐끔거리는 것이 보였다. 이실리스는 그들을 보며 하나하나 눈을 마주했다. 익숙한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의 붉은 마력을 본 자들은 모두 허리를 숙였다.

그들을 보며 웃던 그녀가 손안의 마력을 피어 올렸다. 붉은 새로 변한 마력은 황궁 주변을 날았고, 아마 황궁 안에 있는 황제도 그녀의 붉은 새를 보았을 터였다.

“이러면 나올 수밖에 없지.”

확신하는 그녀의 말에 답하듯 황궁의 시종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모습을 보자마자 이실리스가 빙긋 웃었다.

“귀하신 분을 기다렸습니다.”

그녀를 보면서 놀란 눈을 뜬 시종장에게 희미한 웃음을 보낸 이실리스가 입을 열었다.

“나 또한 폐하의 부름을 기다렸습니다.”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이실리스와 베르타스는 황제에게 안내하겠다는 시종장을 따라서 걸었다. 그들을 힐끔거리면서 쳐다보는 시종과 시녀들의 시선은 덤이었다. 

‘뮤르카 제국의 기강이 걱정되는군.’

황제의 손님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을 아무렇지 않게 쳐다보는 시종과 시녀들은 어디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황당한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우리 안에 갇힌 마물이 된 듯한 기분을 느끼면서 이실리스는 천천히 걸었다. 앞서 걸어가는 그녀의 뒤를 베르타스가 호위하듯 걷고 있었다.

황궁의 정원을 걷는 것은 두 번째였다. 긴장되었던 그때와는 달리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나아가는 그녀를 보면서 담대하다고 생각하는 시종장이었다. 순식간에 사람이 바뀐 것 같았다. 황제의 집무실 앞에서 멈춰선 시종장이 안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귀하신 분이 오셨습니다. 폐하.”

“들라 하게.”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만사가 귀찮은 듯한 그 목소리에 이실리스가 빙긋 웃었다. 그녀의 예상이 빗나가지 않았기에.

‘확실하군.’

마뉘엘의 배신을 안 것이 틀림없었다. 긴가민가하던 것이 사실로 드러나는 것만큼 허탈한 것이 어디 있을까. 그러나 그것은 그의 사정일 뿐 그녀의 사정은 아니었다. 이실리스는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베르타스도 그녀의 뒤를 따랐다.

“오랜만이군.”

기운 없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황제의 표정은 총기 넘치던 그것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자포자기한 듯한 그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릇 황제라면 나라와 명운을 함께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것이 이실리스의 신념이었다.

“주변을 물러 주셨으면 합니다.”

이실리스의 말에 제라드가 힘없이 손을 내저었다. 그의 손짓에 따라서 집무실 안을 지키고 있던 자들이 사라졌다.

“할 말이 뭔가? 무슨 대단한 말을 하려고 주위를 물러 달라고 하는 것인지 내가 들어보지.”

“뮤르카 제국의 황제 제라드 뮤르카. 당신에게 협상을 제안하려고 왔다.”

“허! 신녀랍시고 대접해 줬더니 아주 건방지군.”

그녀를 보면서 코웃음을 치는 제라드를 향해 이실리스가 빙긋 웃었다.

“그럴 법도 하지.”

천천히 걸음을 옮긴 그녀가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그녀에게 앉으라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녀가 라르헨의 황제인 이상 뮤르카 제국의 황제인 제라드에게 굽힐 필요는 없었다.

“다시 내 소개를 해야겠군. 내 이름은 이실리스 라르헨. 라르헨 제국의 황제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