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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화. (121/161)

120화.

베르타스는 그가 기다리던 사람이 왔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목걸이가 빛났으니까.

“이실리스!”

떨어지는 그녀의 몸을 낚아챈 베르타스가 정신을 잃은 이실리스를 끌어안고 그녀의 이름을 외쳤다. 차가운 그녀의 몸에 손끝에서부터 싸늘함이 전해지는 기분이었다. 베르타스는 정신을 잃은 이실리스를 끌어안았다.

‘무사하니 됐어.’

차마 입 밖으로 나올 수 없는 말을 삼키면서 베르타스가 형형한 눈을 빛냈다. 그의 품 안에 들어온 이실리스를 놓을 수 없다는 듯 꼭 부여잡고서.

* * *

눈을 뜬 곳은 낯선 천장이었다.

‘대체 이 낯선 천장을 몇 번을 보는지.’

이실리스는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분이 묘했다. 

“정신이 드나?”

“베르타스. 내가 얼마나 누워있었지?”

“오랜 시간이 지난 것은 아니야.”

“그렇군.”

“이실리스…….”

왠지 변한 것 같은 그녀의 분위기에 베르타스는 말을 아꼈다.

“이렇게 쉽게 당했다니. 멍청했어.”

“이실리스.”

“가만히 두면 안 되는 거였는데 감히…….”

눈을 빛내며 주먹을 쥐는 이실리스의 모습은 라르헨의 황제였다. 베르타스는 직감할 수 있었다. 그녀의 기억이 돌아왔다고. 반가운 마음에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뭐 하는 겐가!”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는다는 듯 외치는 그녀의 목소리가 반가웠다. 베르타스는 이실리스를 꼭 끌어안은 채로 놓아주지 않았다. 그녀를 안고 숨을 들이쉬었다. 그가 기다리고 기다렸던 순간이었다. 이 순간을 위해서 얼마나 참았던가.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것 마냥 그녀를 끌어안고 숨을 쉬었다. 이제야 살 것 같았다.

“기억이 돌아왔다니. 이실리스.”

“짝없는 사람은 눈꼴 시니까 당장 떨어져.”

놀리듯이 말하는 이베르트의 말을 들었으나 베르타스는 그녀의 몸을 놓지 않았다. 지금 이실리스를 놓는다면 영영 그녀를 잃을 것만 같았다. 

“잠시 놓게.”

이실리스가 베르타스를 만류했다. 떨어지기 싫다는 듯 고개를 젓는 그의 등을 쓰다듬었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의 불안함과 두려움을. 이실리스는 그의 등 너머로 보이는 사람을 향해 눈을 빛냈다. 그녀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한 남자가 그녀의 눈을 피했다.

“이거 참. 대단한 기세를 가졌군.”

이실리스를 향해서 말하는 이베르트의 목소리가 들리자 베르타스는 그제야 그녀를 끌어안았던 팔을 풀었다. 손을 꼭 붙잡고 있는 베르타스의 손을 힘있게 잡은 그녀가 눈앞에 있는 남자의 시선을 맞받아쳤다.

“그쪽이 할 말은 아니군.”

이그나르도의 마법진에서 빠져나온 후유증이 컸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마력을 빼앗기는 그 끔찍한 감각 덕분에 잃었던 기억을 찾았으니까. 후유증보다도 그녀가 기억을 잃었던 상황을 돌이켜 보자 모든 것이 보였다. 저 남자가 원흉이었다.

그녀가 물속에 빠졌을 때도 똑같이 누군가의 부름을 들었다. 그랬는데 그녀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저 남자. 저 남자에게 그녀는 마력을 빼앗겼다. 그리고 기억도 함께. 아니, 저 남자가 아닌 다른 존재에게 그녀의 마력이 넘어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놓고 도와달라고?”

싸늘하게 터져 나온 이실리스의 말에 베르타스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베르트도 놀란 눈으로 이실리스를 바라보았다. 모든 것을 파악한 그녀의 말에 베르타스와 이베르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실리스의 눈이 분노로 타오르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 순간 이베르트가 경고하듯 입을 열었다.

“그렇지 않으면 너는 마력을 찾을 수 없다.”

협박 아닌 협박이었다. 마력을 내어주지 않겠다는 말에 이실리스도 입을 다물었다. 저렇게 나오는 자들에게 그녀가 도움을 주어야 한다니.

“남의 마력을 가져가 사용해 놓고 헛소리를 하는군. 그 마력은 알아서 찾으면 그만이다.”

“신전으로 들어가서 보클로엠을 만나지 않는 한 마력을 찾을 수 없어.”

이베르트의 말이 맞았다. 보클로엠에게 빼앗긴 아니, 넘겨준 마력을 찾으려면 보클로엠을 만나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그녀의 마력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은 그것이 유일했다. 화를 내도 소용없었다. 보클로엠을 만나서 마력을 건네받는다.

“이실리스…….”

“알뤼르는 아직 살아있어 베르타스. 나는 그를 두고 이곳을 떠날 수 없다.”

단언하는 이실리스의 말에 베르타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기억이 돌아온 이상 그녀를 이길 방법은 없었다.

“모든 것은 너의 뜻대로.”

“이리 와.”

섭섭해 보이는 베르타스의 표정에 이실리스가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순순히 그녀의 손을 잡는 베르타스의 입술에 가볍게 입술을 대었다.

“고마워.”

가볍게 닿았다 떨어지는 부드러운 감촉을 믿을 수 없는 듯 바라보는 베르타스를 향해서 맑게 웃었다. 그녀가 기억을 잃은 순간에도 그녀를 지켜준 사람이었다. 먼 라르헨에서 그녀를 찾기 위해 이곳까지 달려온 사람. 어찌 사랑스럽지 않으리. 이실리스를 멍한 눈으로 바라보던 베르타스가 이내 그녀의 허리를 부여잡았다. 

순식간에 그녀의 입술을 집어삼킨 베르타스는 그녀의 입술을 갈구하고 또 갈구했다. 원하고 원했던 순간이었다. 가능하다면 그녀의 모든 것을 씹어 삼키고 싶었다. 입안 가득 차오르는 황홀감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이실리스의 향기가 그의 모든 것을 사로잡았다. 기다리고 기다렸던 순간이었다. 그녀의 입술을 거칠게 탐하면서 베르타스는 그가 있는 곳을 잊었다. 오로지 이실리스 그녀뿐이었다.

“흠!”

옆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렸으나 아랑곳하지 않고 서로의 입술을 탐하는 둘이었다. 이베르트가 그들이 있는 장소를 벗어날 때까지도 둘의 입맞춤은 계속되었다. 입술을 타고 넘어오는 열기에 사로잡힌 둘이었다. 그 뜨거운 감각이 둘을 휩쓸고 지나갔고 이실리스가 천천히 그의 가슴을 두들기자 아쉬운 듯 그녀의 입술을 혀로 쓸고 떨어지는 베르타스였다.

“이실리스.”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베르타스에게 답하지 않았다. 알고 있었다. 그의 감정도 그리고 그가 하고 싶은 말도. 그래서 이실리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랑해.”

“나도.”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그의 진심에 그녀는 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의 입 밖으로 튀어나온 말을 들은 베르타스는 다시금 이실리스의 입술을 삼켰다. 

* * *

“없어지다니!”

세드릭은 이실리스가 사라졌다는 소리에 분노했다. 옆에 놓인 협탁을 치는 그를 보고 흠칫한 수석 신관이 그에게 말했다.

“정말입니다. 성하. 성하께서 말씀하신 그곳에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디로 갔다는 말인가! 그곳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너도 알지 않나!”

“저도 압니다. 그러나 정말 없었습니다.”

억울하다는 듯 말하는 수석 신관의 말에 세드릭은 분노로 몸을 떨었다. 불안하긴 했다. 신녀랍시고 나타나서 신전을 휘저어 놓더니 그 자리에서 사라지다니.

‘정말 보클로엠과 관련이 있다는 것은 아니겠지.’

그게 의문이었다. 저 밑에 숨 쉬고 있는 그들의 신과 정말로 관련이 있는 자라면 곤란했다. 이그나르도의 계시록에 나와 있는 것처럼 그들의 신전을 파괴할 수도 있었으니까. 보클로엠은 영원히 신전에 종속되어야 마땅했다. 그에게서 뿜어지는 신력, 아니 마력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 마력으로 누린 모든 것들을 포기하기엔 너무 늦었다. 권력의 참맛을 알아버린 세드릭의 눈이 번들거렸다.

“가서 마뉘엘에게 그들을 잡아 오라고 명해라.”

“알겠습니다.”

거칠 것이 없었다. 이미 모든 것이 알려진 이상 저 신녀라는 사람을 잡아넣지 않으면 그들이 위험했다. 그의 명령을 받은 수석 신관과 이단 심문관들이 자리를 피하는 것을 본 세드릭이 기도실의 벽을 열었다. 거침없이 길을 걸어간 그가 보클로엠이 갇힌 방문을 열었다.

“당신 짓입니까?”

그의 물음에 눈도 뜨지 않는 보클로엠을 보면서 세드릭은 이를 갈았다. 보클로엠의 짓이 분명했지만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이미 여자는 그의 손을 벗어났고 이곳에서 얻은 정보로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었다. 불안감이 그의 몸을 휘감았다. 

신전에서 아니, 이 뮤르카 제국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는 그로서는 처음 겪는 불안감이었다. 차오르는 분노를 풀 곳이 없었다. 

‘아니, 왜 없어.’

눈앞에 있지 않나. 보클로엠이라는 훌륭한 것이. 세드릭은 이그나르도의 마법진을 조금 더 강하게 작동하게 만들었다. 고통스러운 울음소리가 들렸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고통으로 점철된 소리를 들으면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던 모든 것들이 사라지기라도 할 것 마냥 보클로엠에게서 마력을 뽑아냈다.

* * *

“또 들리는군.”

이실리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에게 다가와 묻는 이베르트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소리가 들리지?”

“보클로엠이 괴로워하는 소리가 들려.”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이실리스를 향해서 아픈 표정을 짓는 이베르트였다.

“나의 마력을 묶어 놓은 자가 보클로엠이 괴로워한다는 소리를 듣고 아파하다니. 웃기는군.”

비꼬는 그녀의 말에 이베르트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사실이었으니까. 이실리스의 마력을 보클로엠과 묶은 것은 이베르트 그였다.

“이실리스.”

걱정스러운 베르타스의 표정에 이실리스가 손을 저었다. 생각해보니 아웅다웅할 일이 아니었다. 라르헨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그녀의 마력을 되찾아야만 했다. 그래야 그녀의 딸인 에리카가 안전했다. 에리카가 자라서 황제의 위를 물려줄 때까지 이실리스는 완전해야만 했다. 그게 그녀가 딸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유산이었다. 완전무결한 황위의 이양.

이베르트가 그녀와 보클로엠의 마력을 묶어 놨기에 그녀의 마력은 현재 이그나르도의 마법진에 묶여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보클로엠의 마력이 얼마나 남아있는지 알 수 없었으나 지금 이 순간도 그녀의 마력은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녀가 느꼈던 충만감은 별것 아니었다. 본래 지니고 있던 마력을 생각하니 아주 자그마한 것에 불과했다.

‘겨우 그걸 가지고 기뻐하다니.’

모자랐던 스스로를 탓하면서 이실리스는 계속 생각했다.

‘방법이 없을까.’

그녀의 마력을 되찾을 방법이. 고민하는 이실리스를 향해 이베르트가 말했다.

“신전으로 가야 한다니까.”

“그대가 나의 선조라는 것을 알지만 더 말한다면 나의 실낱같은 인내심이 사라질 것 같으니 그만 닥치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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