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9화. (120/161)

119화.

그렇다면 움직이지 않으면 벌을 줄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신관들 중에서 교황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자들이 드문 것 같았다. 그들의 눈을 피하려고 벌이라는 이유를 들어 알뤼르를 속박한 것 같았다. 정확하게 추리한 이실리스는 계속해서 머리를 굴렸다. 그렇다면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첫째, 알뤼르와 똑같이 움직여서 잡힌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으나 그나마 알뤼르가 있는 곳을 알게 될 가능성이 제일 컸다. 둘째, 이대로 베르타스가 오기를 기다린다. 가장 마음에 드는 결론이기는 했으나 그녀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누군가가 구하러 오기를 기다린다니.

‘헛소리지.’

그랬다. 힘도 있고 능력도 있는 그녀였는데 왜 남이 구해주기를 바라겠는가. 이실리스는 처음 생각한 대로 움직이기로 했다. 일단 어두운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아까의 복도를 걸으면서 붉은 마력을 흡수한다. 그 뒤에 기도실로 가서 벽을 연다. 그게 그녀의 계획이었다. 어두운 밤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

모두가 잠든 어두운 밤의 시간. 달빛이 그녀의 창가에 찾아들자 이실리스는 눈을 반짝였다. 조심스럽게 마력을 일으켰다. 그녀의 마력이 그녀를 감싸면서 이실리스의 모습을 감추었다. 문이 스르륵 열렸고 그 안에서 빠져나온 그녀의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력을 조금 더 사용할 수 있게 되었어.’

방안에서 일을 겪은 후로 마력이 조금 더 늘었다. 마치 누군가가 그녀에게 마력을 내어주기라도 한 것처럼. 그렇게 노력해도 이마만큼의 마력을 늘리기가 어려웠는데 갑자기 이렇게나 마력이 늘다니.

‘그 목소리와 관계가 있는 것인가.’

달빛이 반짝이면서 복도를 비추고 있었으나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이실리스의 정교한 마법은 그녀가 움직이는 것을 감추었으니. 이실리스의 움직임을 느낄 수 있는 자는 그녀와 비슷한 실력의 마법사가 아니면 불가능했다.

‘알뤼르에게 배워두길 잘했지.’

혹시나 해 그에게 마력 운용법을 배우면서 알아두었다. 모습을 숨기는 마법. 그녀의 마력으로 오랜 시간을 유지하기는 어려웠지만 잠시면 되었다. 마력은 어차피 복도를 지나가면서 흡수할 예정이었으니까. 

기도실로 향하는 복도를 천천히 걸어서 하나씩 성물에 손을 댄 그녀의 몸 안으로 붉은 마력이 흡수되었다. 점점 마력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면서 충만감에 사로잡혔다. 

‘이렇게 쉬운 것을.’

마력의 크기가 점점 커졌다. 교황인 세드릭이 그녀의 움직임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실리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기도실 안으로 들어가 숨겨진 장소를 발견한다면 세드릭도 어찌할 수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섰다. 기도실 벽 너머에 그녀를 부르는 누군가. 그 누군가를 만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만 같았다. 기이한 믿음이었다.

‘일단 나를 부른 자를 만나야 해.’

그래야만 했다. 계속해서 그녀를 부르는 자를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에 휩싸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마력은 점점 커졌고 그녀를 부르는 힘은 점점 더 강력해졌다. 그녀가 본신의 힘을 찾으면 찾을수록 끌림은 점점 커져만 갔다.

‘생각보다 기네.’

낮의 시간보다 긴 복도였다. 하나씩 성물에 손을 대면서 걸었던 탓일까. 더 멀게 느껴지는 기도실의 문을 바라보면서 이실리스는 똑바로 걸었다. 오늘이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녀가 손을 대면 댈수록 그녀의 몸 안에 차오르는 마력으로 인해 꽤 기분이 좋았다.

그게 실수였다. 점점 차오르는 만족감에 휩싸여서 주변을 제대로 살피지 않은 것이. 기도실의 앞에 선 이실리스가 심호흡을 했다. 그 앞을 지키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녀는 천천히 마력을 일으켰다.

‘누군가가 있다면 마력을 쏘아 보내면 돼.’

준비된 마력을 손에 쥐었다. 최대한 많은 마력을 손에 쥔 그녀가 결심한 듯 천천히 그곳의 문을 열었다. 문을 여는 순간 그녀의 몸을 감추고 있던 마력이 흩어졌다. 이상한 기분이 들어 단숨에 손에 모인 마력을 던졌으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던져진 그녀의 마력은 고스란히 마법진 안으로 흡수되었다. 

‘이렇게 빨리 복구했다고?’

적어도 하루 이틀이 걸릴 줄 알았다. 그녀가 본 마법진은 그랬으니까. 그녀가 머무는 방 안에 있는 마법진은 복구되지 않았다. 그게 일부러 내버려 둔 것이었다니. 

당황한 이실리스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자가 있었다. 세드릭이었다.

“올 줄 알았습니다.”

그녀의 바로 앞에서 말하는 세드릭의 사이하게 번들거리는 눈을 보았다. 이실리스를 기다렸다는 세드릭의 말에 그녀는 입을 열 수 없었다.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했겠죠.”

“그…….”

“변명은 그만.”

세드릭의 가벼운 손짓에 이실리스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볼썽사납게 무릎을 꿇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바닥에 거의 엎드리게 하려는 것을 이실리스가 마력을 일으켜 버텼다.

“호, 제법이군요.”

장난스럽게 말하는 그 목소리에 이실리스가 입술을 깨물었다. 계속해서 땀이 흐르고 있었다. 힘들어 보이는 그녀의 모습과는 달리 세드릭의 모습은 산책이라도 나온 것 마냥 평범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날 가지고 놀고 있어.’

이런 모멸감은 처음이었다. 처음 맛보는 패배감이 그녀의 몸을 휩쓸었다. 기억을 잃고 나서 그래도 잘 버텼다고 생각했는데 세드릭이라는 사람은 생각보다 거대한 벽이었다. 

“흠…… 더 놀고 싶지만, 밖에서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요.”

장난감을 가지고 놀 듯 그가 손짓하자 그 자리에 쓰러졌다. 가물거리는 시야로 세드릭이 천천히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게 이실리스가 기억하는 마지막이었다.

* * *

이베르트의 말을 들은 베르타스는 입을 열 수 없었다.

‘반려가 그렇게 했다고?’

다른 이의 기억을 빼앗고 마력을 빼앗을 수 있는 자는 대체 누구인가. 저 이베르트라는 자의 반려는 대체 무엇이기에 이실리스의 모든 것을 빼앗은 것인가. 베르타스는 입술을 짓씹었다. 그의 입가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이실리스의 모든 것을 앗아간 자. 그 원흉의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그래놓고 우리에게 도와달라는 소리를 하는 것인가?”

“나의 반려가 한 짓이 옳지 못한 일이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만큼 다급했다는 것을 알아다오.”

뭐라고 말해도 용서할 수 없었다. 마법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마력이었다. 그 마력을 빼앗아놓고 아무렇지 않게 도움을 청하다니. 이그나르도와 다를 바가 하나도 없지 않나. 지금 제가 들은 말이 사실일까.

‘이기적인 인간.’

이래서 베르타스는 사람을 믿지 않았다. 여태까지의 경험에서 알 수 있었다. 사람은 자신의 이익이 걸린 일이라면 가족마저도 배신하는 존재였으니까. 하물며 아무것도 아닌 남인데 당연하지 않나. 

점점 싸늘해지는 베르타스의 표정을 정면으로 목격한 이베르트가 시선을 피했다. 그도 알고 있었다. 그가 요청한 것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말이었는지. 사지로 밀어 넣은 장본인이 구해달라고 한다면 저였어도 그 상대를 죽였을 테니까. 

그러나 방법이 없었다. 이실리스의 기억을 찾고 마력을 찾으려면 보클로엠을 구해야 했다. 그게 아니라면 그녀는 모든 것을 잃은 채 라르헨으로 돌아가야 한다. 아니, 라르헨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이걸 말하면…….’

베르타스의 분노를 정면으로 마주해야 했다. 

베르타스가 날린 오라는 그에게 상흔을 남기고 사라졌고 그 상흔에서는 아직도 피가 흐르고 있었다. 소드마스터의 오라가 남긴 흔적이라 마력으로 치유할 수도 없었다. 인간의 몸은 가끔 너무 귀찮았다.

그때였다. 번쩍하는 빛과 함께 베르타스의 위에서 무언가가 떨어졌다. 

* * *

정신을 잃은 이실리스의 허리를 붙잡은 세드릭이 그녀를 안아 들었다. 마법진을 복구하는 것은 생각보다 품이 많은 일이었지만 미리 복구시켜 놓기를 잘했다. 왠지 이곳으로 그녀가 찾아올 것 같다는 생각에 이곳에서 기다린 것도 천운이었다.

“황제와 연이 있는 신관을 붙이길 잘했지.”

그 신관이 뭐라고 말했음이 틀림없었다. 그랬으니 밖으로 나왔겠지. 안에서 가만히 있으라는 신관의 충고는 꿈에도 몰랐던 세드릭이 천천히 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를 안아 들고 벽의 한쪽에 기운을 흘려보냈다. 일전에 그랬던 것처럼 스르륵 벽이 열렸다.

이실리스를 안아 들고 꼬불거리는 미로와 같은 복도로 들어선 세드릭이 복도 옆에 늘어서 있는 문들을 하나씩 살폈다. 얼마 전에 들어온 알뤼르라는 사람도 저 안에 있었다. 아직까지 버티고 있는 것을 보니 제법 가진 마력이 커다란 자임에 틀림없었다.

‘아직도 살아있다니.’

끝까지 마력을 소진하고 이미 죽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오래 버텼다. 밖을 내다볼 정신도 없이 마법진과 싸우고 있는 알뤼르의 모습을 스치고 지나간 세드릭이 그 옆의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고 이그나르도의 마법진이 검게 타오르고 있는 한 가운데에 이실리스를 던졌다. 검은 마력이 그녀에게 뻗쳐지면서 그녀의 몸을 끌어당겼다. 순간 세드릭도 끌려들어 갈 뻔했다.

“위험하군.”

이그나르도의 힘은 양날의 검이었다. 제대로 운용만 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그에게 이득이었지만 마법진에 잘못 걸리면 그도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늘 안전하게 이그나르도의 마법진을 파훼할 수 있는 마법무구를 들고 다녔다. 라르헨 제국에서 신관들이 구해온 것이었다.

“여기서 나를 위해 마력을 바쳐라.”

음산하게 뇌까리는 그의 말에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그나르도의 마법진으로 내쳐진 이실리스는 한없이 빨려 들어가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그것은 그녀가 전에도 느꼈던 것이었다.

“안 돼…….”

힘없이 중얼거렸지만, 그녀를 구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렸을 적 느꼈던 그 기분이었다.

‘잠깐…….’

이와 비슷한 상황을 겪은 적이 있다니. 점점 침잠되는 몸을 느끼면서도 머릿속의 생각을 지울 수는 없었다.

‘경솔했어.’

그게 끝이었다. 정신을 잃은 그녀의 몸을 사로잡은 이그나르도의 마력이 서늘하게 빛나고 있었고 그 마력이 게걸스럽게 그녀의 붉은 마력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그 순간 그녀의 목에 걸린 목걸이가 환하게 빛났고 그녀의 몸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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