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8화. (119/161)

118화.

“뭐?”

“라르헨의 황족이지만 바다를 건너와 이곳에서 나라를 세운 자다. 네가 가진 검도 알고 있지. 그거 목걸이가 아닌가.”

그를 향해 말하는 이베르트를 보면서 베르타스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결국, 뮤르카 제국도 라르헨의 사람들이 세운 곳이라니. 아니, 그런 곳이 왜 신력이 어쩌고저쩌고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저 신전은 뭐지?”

그의 말에 숨겨진 뜻을 알아챈 이베르트가 입을 열었다.

“이곳에 와서 나라를 세웠으나 바다를 건너 이곳으로 온 자는 나 혼자가 아니었다. 이그나르도 그자도 함께 왔지.”

간발의 차이로 이그나르도보다 먼저 도착한 이베르트가 뮤르카 제국을 세웠고 그의 피를 이어받은 자들이 제국을 지배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바다를 건너온 이그나르도는 신전을 세웠고 흑마법을 사용하여 마력을 갈취하기 시작했다. 그가 만든 커다란 마법진은 신전 깊숙한 곳에서 끊임없이 마력을 빼앗고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마력을 빼앗기는 자는 누구지?”

“나의 반려. 보클로엠.”

“그게 신이 아니라고?”

“그렇다. 나의 반려이자 나의 오랜 연인.”

먼 곳을 바라보는 이베르트의 표정엔 그리움이 가득 담겨있었다.

“대체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마뉘엘의 말에 의하면 신전이 득세한 것은 일 이년이 아니었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신전에서 신력을 사용하여 권력을 잡은 것이었는데 그 시간 동안 이베르트는 무엇을 한 것인가.

“나도 그녀를 구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지.”

후회가 가득 담긴 그의 목소리에 알 수 없는 그리움이 묻어나 베르타스는 아무것도 물을 수 없었다. 베르타스가 입을 열었다 닫았다 하자 이베르트는 희미하게 웃으면서 먼저 손을 내밀었다.

“이 손으로 그녀를 봉인할 수밖에 없었지. 그렇지 않았다면 그녀는 이미 죽었을 거야. 마력을 모두 빼앗겨서.”

“봉인?”

“그렇다. 내가 그녀를 봉인한 곳에 저들이 신전을 세웠고 계속해서 그녀의 마력을 갈취하고 있는 것이지.”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마력이 나온다고?”

“그럴 수밖에. 그러나 이제 그것도 거의 고갈되기에 이르렀다. 이대로라면 그녀가 위험해. 그래서 내가 그리고 그녀가 너희들을 불렀다. 정확히는 라르헨의 황제를.”

신전 안으로 이베르트는 들어갈 수 없다고 말했다. 그가 들어가는 순간 이그나르도의 마법진이 발동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의 마력마저 저들에게 넘어가게 된다고. 그렇기에 그는 이도 저도 못 하고 계속해서 괴로워하는 반려의 목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고 베르타스에게 설명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실리스를 부른 것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야!”

분노가 치밀었다. 평안했던 그들의 삶이 왜 이렇게나 먼 곳에 있는 자들에 의해서 깨져야만 했나. 게다가 이실리스의 기억마저 사라졌다. 분노한 베르타스의 몸에서 소드마스터의 기운이 폭사 되자 마력을 일으켜 제 몸을 보호하는 이베르트를 보면서 이를 갈았다.

“그렇게 바라보지 말아라.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니. 나도 라르헨의 황제를 불러올 생각은 없었다.”

일의 발단은 이러했다. 반려의 마력이 고갈되기 시작하자 이베르트는 심각해졌다. 이대로 가면 그의 반려가 모든 마력을 잃고 죽을 수도 있었다. 그가 마력을 보내주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저에게 마력이 없어도 반려는 죽고 반려에게 마력이 없어도 그는 죽었다. 그들은 운명공동체였다.

“그때였다. 해상제국의 중추에서 우리의 마력과 비슷한 마력의 흐름을 목격한 것은.”

해상제국을 유지하고 있는 마력석에서 반려의 마력과 비슷한 마력을 발견했다. 아니, 쌍둥이라고 불려도 좋을 정도로 똑같은 마력의 흐름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베르트의 흐름과도 같았다. 그래서 그 중추에 있는 마력을 빼앗았다.

“이럴 수가.”

망연자실한 표정의 베르타스를 보면서 이베르트는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이 모든 것이 저들의 짓이었다니. 서로밖에 모르는 저런 이기적인 자들 때문에 이실리스와 그가 이렇게 된 것이었다. 치솟아 오르는 분노를 더는 숨길 수 없던 베르타스가 오라를 일으켰다. 이베르트도 서둘러서 마력을 일으켰지만 베르타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마력을 갈랐다.

“크흑!”

이베르트의 보호 마법이 갈라지면서 베르타스의 오라가 그의 몸에 상처를 입혔다.

“붉은 피가 흐르는 것을 보니 인간이 맞았군.”

너 같은 자를 인간으로 쳐주기도 아깝다고 말하는 베르타스에게 이베르트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었다. 너무 급했으니.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나의 반려는 죽었다. 나는 내 반려를 죽게 내버려 둘 수 없었어!”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다. 너 때문에 나의 반려가 위험해 처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너를 내버려 둬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겠지?”

“나와 내 반려가 죽게 되면 너 또한 너의 반려를 찾을 수 없다. 그래도 괜찮은가?”

“뭐라고?”

검에 짙게 오라를 두르고 휘두르려 했던 베르타스는 이베르트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듣고 멈칫했다.

“마력을 잃은 신전의 다음 목표는 누가 될 것 같은가. 지금 신전 안에 있는 너의 반려가 아닐까?”

“이 비겁한……!”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베르트의 말이 맞았다. 어떻게든 이실리스를 신전 안에서 빠져나오게 만들어야 했다.

“내가 너의 앞에 모습을 나타낸 이유도 단 하나. 신전으로 들어가는 길을 알려주기 위해서다.”

“바라는 게 있겠지. 그게 다가 아닐 테니까.”

“내 반려를 구해다오.”

“너도 못 구하는 것을 내가 어떻게?”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는 듯 베르타스가 코웃음을 쳤다. 길을 알려준다면 이실리스만 데리고 나올 생각이었다. 저들의 뜻대로 움직일 생각은 전혀 없었다. 이실리스를 찾으면 그때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이곳을 빠져나갈 심산이었다.

“내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다. 그러나 이번 한 번만 도와다오. 나의 반려를 구해준다면 그대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겠다.”

“원하는 것?”

“그게 무엇일지라도 들어줄 수 있다. 나의 반려와 내가 저 이그나르도의 마법진에서 벗어난다면 그럴만한 힘이 있으니.”

“새삼 웃기는군. 흑마법사의 마법진 하나도 벗어나지 못하는 자들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이그나르도를 우습게 보지 말아라, 그는 시대를 풍미하는 대마법사였다. 단지 길을 잘못 들었을 뿐.”

평생토록 이름을 남기고 싶어 했던 그가 나라를 세우는 것에 실패하자 차선책으로 쓴 방법이었다. 라르헨에선 그의 이름이 악명이 되었고 이곳에서 그의 이름은 흔적도 남지 않았다. 다만 보클로엠의 이름만이 남았을 뿐.

“이도 저도 아닌 이였군.”

그토록 원했던 이름을 남기는 것에 성공했으나 악명뿐이었다. 영광된 대마법사의 이름은 없었다.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라르헨에 흑마법사들이 나타난 이유가 무엇인지. 이곳에서 마력을 빼앗아 신력으로 바꾸기 위한 신관들이었다. 이그나르도의 흑마법을 쓰는 마법사들은 그들에게 현혹된 것이고.

분명히 모두 없앴다고 생각했는데 끊임없이 나타나는 이그나르도의 무리를 발본색원하려던 찰나였다. 그랬는데 이곳에서 실마리를 잡다니.

“도와다오.”

베르타스는 그의 앞에 무릎을 꿇은 이베르트를 향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실리스가 가장 중요했다. 그에게 확답을 줄 수 없었다. 이실리스의 안전이 확인되면 바로 이곳을 떠나고 싶은 것이 그의 마음이었다.

“어차피 너희들은 이곳에서 나갈 수 없다. 저곳을 지키는 교황이 너희들을 순순히 놓아줄 리도 없고, 저들이 가진 정보망을 피해서 도망칠 수도 없다. 이미 너희가 타고 온 잠수정은 마뉘엘이라는 자의 손에 넘어갔고 너희가 그곳으로 가는 순간 다시 잡힐 것이다.”

“이미 알고 있다.”

마뉘엘이 그들의 편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미리 눈치채지 못한 것이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다만 곱게 넘어가지는 않겠다.

‘가만히 두지 않겠어.’

베르타스는 속으로 곱씹었다. 마뉘엘의 손에 놀아난 스스로가 한심스러웠다.

“그러니 도와다오. 너희들만이 나의 희망이다.”

“이실리스는 마력을 잃었다. 그것도 네 짓인가?”

“아니, 나의 짓이 아니다.”

확답하는 이베르트를 보고 기분이 약간 풀리려는 순간이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만 아니라면.

“나의 반려인 보클로엠이 그리했다.”

* * *

그녀의 방으로 안내하는 신관의 말에 이실리스를 귀를 기울였다. 허튼짓을 하지 않기를 바란다는 그의 말에 진심이 담겨있었다.

“허튼짓이라니.”

“정말 부탁드립니다. 신녀님. 제발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그냥 가만히 계시면 이곳에 있다가 황궁으로 돌아가실 수 있을 겁니다.”

“황궁?”

“그렇습니다. 저는 폐하의 명을 받고 이곳으로 온 자. 그러니 제발 가만히 계세요.”

신관의 말에 이실리스는 입을 다물었다. 지금 그녀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저기 황제가 보냈다고 하는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앞에서 자리를 안내하면서 움직이고 있었지만 검은 속내를 지니고 있을 줄 누가 알겠는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잘 생각해. 이실리스.’

스스로 이름을 부르면서 그녀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신관의 말은 그녀를 흔들리게 했다. 그냥 기다리면 되는 것일까. 이곳에서 빠져나가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그냥 기다리면 되는 것인가.

‘믿을 수 없어.’

그래, 믿을 수 없었다. 그녀가 이 이상한 나라에 떨어지고 믿는 것은 오로지 베르타스와 알뤼르 그 둘뿐이었다. 그들은 이상하게 그녀에게 확신을 주었다. 그녀와 처음 만난 마뉘엘도 그녀에게 그 둘과 같은 믿음을 주지 못했다. 그랬는데 처음 그녀에게 접근한 사람을 믿으라니. 헛소리였다.

이실리스는 방에 앉아 곰곰이 생각했다. 돌아다니던 자들이 합당한 벌을 받았다. 그것은 그녀를 겨냥한 말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를 걱정해서 한 말이었다. 그녀에게 그 말을 한 신관의 눈동자엔 두려움이 가득했다. 힘에 짓눌린 자의 모습이었다.

“무언가 알고 있군.”

알뤼르도 그녀와 마찬가지로 방을 배정받았을 것이 분명했다. 사명감에 불타오른 그였으니 다음날 바로 활동하기 시작했을 거고 그의 움직임을 짐작한 교황이 그를 가만히 뒀을 리 없었다. 

‘움직였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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