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7화. (118/161)

117화.

후회해봐야 이미 늦었다. 이실리스는 앞을 보고 걸었다.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는 법. 이제 앞으로의 일을 걱정할 때였다. 입을 열지 않은 이실리스를 향해 남신관이 말했다.

“신녀님이 오셔서 다행입니다.”

“다행이라고 하셨나요?”

“그렇습니다. 보클로엠을 믿는 신도들이 줄어들어 신관도 힘들었습니다. 이제 신녀님이 오셨으니 새로 신도들이 늘어날 것 아닙니까.”

남신관은 여신관과 다르게 그녀에게 호감을 표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도 겉으로 보이는 것일 뿐. 이자도 또한 그녀의 마력을 노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나저나 저 안에서 무엇을 하신 겁니까?”

“네?”

“저 안에서 무엇을 하셨기에 붉은빛이 일었냐고 묻고 싶습니다.”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다만 성물에 손을 대었을 뿐. 그녀에게 배정된 방에서 일어난 일이 이미 다른 사람에게 흘러 들어갔다는 것에 소름이 돋았다. 당연한 사실이었지만 직접 느끼는 것은 달랐다. 의심 어린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신관을 무시하고 계속 걸었다. 알려달라는 듯 그녀에게 말하는 신관이었지만 그녀도 아는 것이 없었다.

“정말 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신력을 흡수하신 것이 저절로 되었다고요?”

“그렇습니다.”

계속 설명해도 그녀의 말을 믿지 않는 남신관을 향해 설명하는 것을 포기했다. 이실리스가 입을 다물자 남신관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둘이 걷는 복도에 정적이 흘렀다.

“이곳입니다.”

기도실로 안내한 남신관은 신관복을 펄럭이면서 사라졌다. 이실리스가 들어간 곳은 제법 큰 기도실이었다. 그 안으로 들어서려다가 정 가운데에 그려진 이그나르도의 마법진을 보고 이실리스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럼 그렇지.’

순순하게 일반적인 기도실로 안내하지 않을 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대놓고 마력을 갈취하겠다고 나서다니. 아니 이 신전에서 신력을 제대로 가지고 있는 자가 있기는 한 것인가. 다른 이들의 마력을 신력이라고 부르면서 스스로를 추켜세우는 자들만 남은 것인가.

“신전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곳이었군.”

신전은 무슨. 신의 이름을 훔쳐 악행을 저지르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목숨을 잃은 자들은 또 얼마나 될까. 갑자기 밀려드는 생각에 이를 악물었다. 그녀가 머물렀던 방이 그랬듯이 바닥에 있는 붉은 얼룩들은 마력을 빼앗긴 사람들의 괴로움과 참담함을 나타내고 있었다.

“이런 곳이 신전이라니.”

이실리스는 붉은 마력을 일으켰다. 그녀의 몸을 휘감은 마력은 이전보다 더 큰 기운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그녀의 몸에 휘감긴 마력이 마법진의 한 부분을 향해 쏘아졌다. 방에 있는 마법진을 상대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었다. 이그나르도의 마법진은 일부를 없애면 그 자체가 파훼 되는 것이었다.

붉은 마력은 바닥에 그려진 마법진의 한 부분에 흠집을 내고 사라졌고 번쩍하고 빛이 일더니 마법진이 힘을 잃었다. 느낄 수 있었다. 이그나르도의 마법진이 파훼 된 것을. 

그 앞으로 천천히 걸었다. 살짝 발을 올렸지만 아무런 힘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 곧 마법진의 이상함을 느낀 교황이 찾아올 것만 같았다. 그가 오기 전에 이곳에 있는 성물의 힘을 흡수해야 했다.

‘어디 있는 거지?’

마음이 급해지니 잘 보이지 않았다. 서둘러서 주위를 살피는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붉은 기운을 띠고 있는 벽이었다. 벽 전체에 붉은 마력이 휘감고 있었다. 이실리스의 눈에 들어온 유일한 붉은 마력. 벽 전체가 마력을 담고 있는 것은 처음이었다.

“벽?”

성물이 아니고 벽이라니. 그렇다면 이 너머에 무언가 있다는 소리인가. 벽의 틈으로 계속해서 붉은 마력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녀를 향해 손짓하는 붉은 마력을 향해 손을 뻗으려는 순간이었다.

[여기다. 어서!]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마치 그녀가 그 벽을 건드려 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더는 망설일 이유도 없었다. 이 너머에 있는 것을 확인해야 했다. 이실리스는 재빠르게 그곳으로 다가가서 벽의 문을 열려고 했다.

“거기서 뭐 하시는 거죠?”

이실리스는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에 그 자리에서 멈추어 섰다. 세드릭의 목소리였다.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빨리 올 줄이야.’

“이게 무슨 짓입니까?”

“네?”

이럴 땐 모른 척이 필수였다. 영문 모를 얼굴로 그를 바라보니 세드릭이 마법진의 한쪽을 가리켰다. 정확하게 이실리스가 파훼를 위해 마력을 쏘아 보낸 그곳이었다.

“신녀께서 한 짓이 아닙니까?”

“저도 모릅니다.”

“이 안엔 어떻게 들어온 겁니까?”

“어느 신관분이 안내했습니다.”

거침없이 나오는 그녀의 답에 세드릭이 눈을 찌푸렸다. 그녀가 거짓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진실을 말하는 것인지 가늠하겠다는 듯 이실리스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왜 그러시죠?”

오히려 물었다. 그녀는 정말로 신관의 안내에 따라서 이곳에 온 것이었으니까.

“아니, 아닙니다.”

확인할 방법이 있다는 듯 그가 무언가를 들어 올렸다. 반짝하고 붉은 빛이 나는 그것을 본 이실리스는 직감했다. 저것도 그녀가 흡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신전을 둘러보면서 안 사실이었다. 그녀가 흡수할 수 있는 마력은 모두 붉은색. 붉은색 이외의 마력은 흡수할 수 없었다. 세드릭의 호출을 받은 누군가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를 안내했던 남신관과는 또 다른 신관이었다.

“신녀께서 어떻게 이 안으로 들어와 있는지 설명하세요.”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그 자리에서 움직이는 신관을 보면서 이실리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그녀를 의심하는 세드릭을 보면서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지금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해도 믿지 않을 테니까.

“이상하군요. 이곳은 신관들 사이에서도 쉽게 올 수 없는 곳인데요.”

“안내가 없었다면 저도 오지 않았을 겁니다.”

그녀를 떠보는 세드릭의 말에 이실리스가 답했다.

“성하!”

세드릭을 부르면서 들어오는 신관의 모습을 보면서 이실리스가 빙긋이 웃었다. 그 이후는 예상했던 대로였다. 그녀에게 이곳을 안내한 신관이 색출되었고 세드릭은 그녀에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번엔 믿어드리죠.”

“전 거짓을 말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무언가 숨기는 것도 사실이죠.”

그녀가 숨기고 있는 것을 대충 짐작한다는 세드릭의 표정에 이실리스는 입을 다물었다. 역시 쉽게 볼 자가 아니었다. 이번 일로 이실리스가 마력을 잃었다면 그것도 좋아할 이였다.

‘놀아날 수 없어.’

힘들게 지금까지 버텼다. 겨우 이틀이었지만 외줄타기를 하는 기분으로 버텼다. 베르타스가 그녀를 구하러 올 것이라는 확신도 있었고 이곳에서 최대한 많은 마력을 모아서 빠져나가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손짓하는 세드릭에게 인사한 신관이 이실리스를 데리고 밖으로 나섰다.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는 그들이었다.

“다행입니다.”

“뭐가 말이죠?”

“신녀님께서 함부로 돌아다닌 것이 아니어서요.”

“제가 그럴 리가 없죠.”

웃어 보이는 이실리스를 향해서 신관이 웃음을 돌려주었다. 그 얼굴이 제법 순해 보여 이실리스도 계속 웃었다. 오랜만에 조금 순수한 자를 보는 것 같았다. 뱀 같은 자들만 보고 있으니 이제 저에게 조금이라도 친절하게 대하는 자들이 순수해 보였다.

‘나도 미쳤군.’

그래, 이대로 가다가는 미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이곳이 어떤 곳인지는 충분히 알았으니 마력을 더 끌어모아 얼른 이곳을 벗어나야겠다고. 알뤼르가 있는 곳을 찾아 그를 구해서 이곳을 빠져나가야겠다고. 이실리스는 그리 결심했다.

“모쪼록 허락되지 않은 곳을 돌아다니시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돌아다니신 분들은 전부 그에 합당한 벌을 받았습니다.”

* * *

“마법사?”

“그렇다, 마법사.”

“이곳에도 마법사가 있을 줄은 몰랐군.”

이베르트라고 스스로 밝힌 자가 마법사라고 한 것을 모두 믿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베르타스는 한 가닥의 희망을 걸어보기로 했다. 마력을 신력이라고 일컫는 자들이 팽배한 이곳에서 새로운 마법사의 등장은 마치 든든한 아군과도 같았다.

“왜 없겠나. 바다 건너서 온 소드마스터도 있는데. 라르헨은 괜찮은가?”

“너…… 라르헨을 알고 있나?”

“당연한 소리를. 나는 마법사이나 이곳의 잊혀진 황제라고 하지 않았나.”

“이곳의 황제 따위 내가 알 바가 아니다.”

베르타스의 말에 불퉁한 표정을 짓는 이베르트였다. 표정이 다채로운 그를 보면서 베르타스는 순간 이자를 믿어도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네가 생각하지도 못할 만큼 오랜 세월을 나는 살았다.”

“마법사가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을 수 없다는 베르타스의 말에 이베르트가 쓰게 웃었다.

“이 또한 내가 원한 것은 아니었다. 나의 반려가 원한 것이었을 뿐.”

“그 반려라는 자는 어디 있나?”

“지금은 만날 수 없다.”

“만날 수 없다고?”

이상했다. 마법사의 반려가 있는데 만날 수 없다니. 그럼 저자는 어떻게 살아있는 것인가. 베르타스의 궁금증을 눈치챈 이베르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내가 그대에게 모습을 드러낸 이유는 단 하나다. 나의 반려를 구해다오.”

“뭐?”

이 제국 사람들은 아무리 생각해도 염치라곤 없는 것 같았다. 다른 제국에서 온 그와 이실리스에게 신전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알아봐 달라고 보내지를 않나, 갑자기 반려를 찾아달라는 자가 있지를 않나. 황당무계한 일들의 연속이었다.

“지금 내가 헛소리를 들었군.”

이베르트가 한 말을 헛소리로 치부하며 베르타스가 입을 열었다. 겸연쩍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던 이베르트는 다급하게 말했다.

“너희들이 이곳으로 온 것도 다 나의 반려의 부름에 이끌려 온 것이 아닌가!”

“뭐라고 했지 지금?”

베르타스의 검에 오라가 둘러졌다. 이곳으로 불렀다는 그 목소리. 혹시 목소리의 존재가 저자의 반려가 맞다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생각하면서 검을 쥐었다. 심상치 않은 그의 기세를 느낀 이베르트가 마력을 일으키는 것이 보였다. 이실리스의 것과 같은 붉은색이었다.

“붉은색?”

“그렇지. 붉은 마력이지.”

이실리스가 그리웠다. 떨어져 있는 순간은 잠시였지만 그녀를 생각나게 하는 마력을 보면서 베르타스는 그가 일으켰던 오라를 순식간에 없앴다.

“라르헨과 관련이 있나?”

“그럴 수밖에 나는 라르헨의 마법사이자 라르헨의 황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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