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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화. (117/161)

116화.

‘이그나르도의 흑마법이로군.’

일렁이는 검은 기운을 오라를 두른 손으로 잡아챈 베르타스가 손안에서 움직이는 기운을 멀리 내던졌다. 신관을 둘러싸고 있던 기운이 사라진 것을 느끼면서 그가 신관의 옷을 뒤적였다.

“분명 뭔가 있을 거야.”

확신했다. 그냥 보냈을 리가 없었다. 그들은 베르타스가 소드마스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뉘엘이 알려줬을 게 분명했으니. 그의 오라를 노리고 온 것이 틀림없었다. 여태까지 베르타스에게 호의적이었던 것도 이해가 되었다.

‘내 오라를 노리다니.’

황제의 것으로 부족해서 그의 것을 노린 자들이었다. 이쯤 되니 이실리스의 안전이 걱정되었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리 만무하지만, 하루라도 빨리 그녀의 곁으로 가야 했다. 그녀의 곁에서 무사한 모습을 보아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그의 손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이것은!”

신관의 주머니에서 나온 것은 이그나르도의 흑마법진이 그려진 물건이었다. 마법진에 손을 댔다가 오라를 빨아들이는 느낌에 화들짝 놀라 손을 떼었다.

“신관들이 모두 이런 것을 들고 다닌다니.”

굼뜬 그들의 태도가 이해되었다. 라르헨의 마법사들과 겨루었을 때, 그들의 마력 반응도는 상상을 초월했다. 제 것의 마력을 일으켰으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그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던 신관들은 제 것이 아닌 것을 사용하려고 했기에 반응속도가 늦은 것이었다.

“그들이 가진 신력이라는 것이 마력이 확실해지는군.”

아마 저들은 이그나르도의 마법진을 사용하여 다른 사람의 마력을 갈취하여 사용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라르헨의 불순분자들이 사용하던 흑마법을 여기서도 보게 될 줄이야. 대체 이그나르도는 누구인가. 알 수 없는 기분이었다. 이곳은 라르헨과 어떤 관련이 있기에 라르헨과 비슷한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대체 뮤르카 제국은…….”

어떤 곳인가. 못내 궁금했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이실리스를 찾으러 신전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신관들의 힘을 파악했으니 그들의 힘을 와해할 방법도 찾았다. 그들이 지니고 있는 이 마법진을 파훼하면 되었다.

“숨겨져 있어서 쉽진 않겠지만…….”

모르는 것보다 나았다. 냇가로 이어지는 길은 이미 노출되었을 게 분명하니 베르타스는 전에 봐 두었던 계곡으로 향하기로 했다. 계곡은 제법 높은 곳에 있었고 소드마스터의 그의 걸음으로도 한참이 걸리는 곳이었다. 가는 동안 결계가 없는 것이 다행이었다. 결계가 있었다면 시간을 또 낭비했을 테니까. 그때였다. 그에게 길을 안내했던 다람쥐가 보였다. 이번에 베르타스는 지체하지 않고 검을 날렸다.

“흐아악!”

다람쥐의 입에서 나온 소리라고는 놀랄 정도로 사람의 그것과 비슷했다. 

“역시 그랬군.”

“야 이 막돼먹은 놈아!”

소리를 지르는 다람쥐의 입에서 사람의 말이 튀어나왔다. 놀랍지도 않았다. 누군가가 그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죽이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해라.”

“이렇게 가녀린 다람쥐에게 검을 던져? 이 나쁜 놈!”

“죽이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라고 했는데?”

오라를 두른 검을 내보이며 베르타스가 말했다. 그의 협박이 먹힌 것인지 다람쥐가 멈칫했다.

“모습을 드러내라. 숨어서 지켜보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니.”

베르타스의 말에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다람쥐는 짐승의 움직임을 보이더니 수풀 너머로 사라졌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이었다. 아니, 사람과 비슷한 것이었다.

“너는 누구지?”

“나는 이 숲을 수호하는 자. 이 숲을 다스리던 분을 대신하여 이 숲을 지키고 있다.”

“신관들이 이곳을 드나드는 것을 내버려 둔 네가 숲의 수호자라니 웃기는군.”

“그것은 어쩔 수 없다. 그들이 그분의 기운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분?”

“그렇다.”

더는 설명할 수 없다는 듯이 말을 돌리는 남자였다.

“나는 마지막 남은 존재이자 이 숲의 수호자. 궁금한 것이 있다면 물어도 좋다. 저 신관들을 적대하는 너라면 한가지 정도는 알려주겠다.”

“궁금한 것이 없다.”

“뭐?”

실컷 모습을 나타내라고 외치고는 궁금한 것이 없다고 말하는 베르타스를 향해서 남자가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

“아 하나 있군.”

“무엇인가.”

“너는 누구지?”

“내가 누구냐고?”

“그렇다.”

“나는 잊혀진 뮤르카 제국의 황제이자, 이곳의 마지막 남은 마법사. 이베르트다.”

* * *

물이 이실리스의 목 끝까지 차올랐다. 

도움을 요청하느라 소리를 질렀지만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온몸이 무거웠다. 물속에서 허우적대느라 체력은 이미 바닥나 있었다. 마법사인 그녀는 체력이 좋지 않았다. 몸에 힘이 빠지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버티고 또 버텼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자신의 몸에서 빠져나가는 힘을 느끼면서 그녀가 눈을 감았다. 

[눈을 떠라, 아이야.]

“헉!”

비오듯 땀이 흘렀다. 그녀의 몸에서 흐른 땀은 침대를 적시고 있었다.

“이럴 수가…….”

그 모든 것이 꿈이었다니.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서 쓰러지듯 잠이 들었던 그녀였다. 방안에 흐르고 있는 사악한 기운에 이실리스는 몸을 떨었다. 서둘러서 창을 열었다. 그렇게 하면 방안에 흐르는 기운이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귓가에 들려온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정말 죽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다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도와다오.]

“나도 도와주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군. 너는 어디 있나?”

[신전의 가장 깊은 곳.]

거기까지 말을 전한 목소리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무슨 방해라도 받은 것처럼. 귓가에 맴돌았다가 사라지는 목소리. 이제는 그 목소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닌지 궁금해질 지경에 이르렀다.

“나도 서서히 미쳐가는군.”

존재하는지도 모를 것의 소리를 듣고 그 소리에 대답하다니. 어디 있느냐고 묻기까지 하다니. 그래도 목소리의 도움을 받아서 무사할 수 있었다. 아니었다면, 지금쯤 누군가가 그녀의 방에 들어와서 그녀에게 무슨 짓을 했을지도 모르지. 그녀의 마력을 노리든 아니면 다른 짓을 했을지도……. 베르타스가 알았다면 그는 어떻게 했을까.

“또…….”

다시 그에게까지 생각이 닿았다.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금지 구역에서 그네를 본 이후로 계속해서 베르타스가 떠올랐지만 그를 잊으려 다른 곳으로 생각을 돌렸다. 그러나 목소리가 사라지자 그녀의 머릿속을 지배하는 것은 그. 베르타스였다.

아마 그는 그녀를 찾아오고 있겠지. 확신했다. 그가 그녀를 찾아오리라는 것을.

‘그 전에 여기서 모든 일을 마쳐야 해.’

그래야 했다. 여기에 있는 존재를 만나야만 했다. 그 존재를 만나서 그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알아내야 했다. 그 존재를 도울 방법이 있다면 돕는 것도 마다하지 않겠다. 왠지 그 존재가 이 신전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어쩌나 이곳에서 나갈 수 없는데.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느니 방이라도 둘러보는 게 나을 것 같아 이실리스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젯밤과는 사뭇 다른 방의 풍경에 이실리스는 천천히 방을 훑었다. 그러다 문득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자그마한 단 위에 놓여있는 성물이었다. 신의 모습을 형상화한 그것에 절로 눈이 갔다.

“이건…….”

알뤼르가 그녀에게 건네준 통신석과 비슷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왜 몰랐을까 싶을 정도로 비슷한 기운이 흐르는 것이었다. 붉은 마력. 알뤼르의 것과 색은 달랐으나 그녀의 마력색과 비슷한 것이었다. 이실리스는 그것을 향해 손을 뻗었다.

환한 빛이 일었다. 붉은빛이 터져 나오면서 그녀의 시야를 가렸다. 그 빛에서 터져 나온 붉은 마력이 그녀의 손끝에 흡수되었다. 남의 마력을 갈취한다는 흑마법과 비슷한 것 같아 문득 겁이 났다. 아무도 본 사람은 없었다. 깊은숨을 내쉰 그녀가 몸 안의 마력을 운용했다. 마력이 조금 늘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지난번과 같았다. 마뉘엘의 저택에서 초상화에 손을 대었던 그때와 똑같았다. 그때는 이게 마력인 줄도 모르고 흡수했는데 이번엔 달랐다. 손만 대면 마력을 흡수하다니. 그녀에게 무슨 신기한 힘이라도 있는 것인가.

“이럴 수가 있나.”

이실리스는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가만히 신물을 들여다보았지만 이제 그 물건에서 어떤 힘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의 몸 안으로 사라진 기운이 전부라는 것처럼. 이상한 기분이었다. 이그나르도의 흑마법이 다른 사람의 마력을 갈취한다고 하였는데 그녀에게 발생한 이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지.”

상의할 사람도 없었다. 알뤼르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을 알 수 없었고 베르타스도 없었다. 마뉘엘도 없었으며 오로지 그녀 혼자였다.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실리스는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해.’

누구도 그녀를 도울 수 없다면 그녀 스스로가 그녀를 도와야 했다. 불안해할 틈이 없었다. 스스로에게 말하면서 결심했다. 이렇게라도 해서 마력을 늘릴 수 있다면 늘려야겠다. 그래서 그녀가 원래 가지고 있었던 힘을 모두 되찾아야겠다.

“돌아다니면서 성물이란 성물은 다 만져봐야겠어.”

그곳에 담긴 힘이 흡수되는 것인지 아닌지 알아봐야겠다. 계산을 마친 이실리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마침 저녁 식사를 할 시간이니 밖으로 나갈 수 있을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방 앞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신녀님 계십니까.”

이번엔 여신관이 아니었다. 그녀를 부르러 온 다른 신관이 그녀에게 정중하게 물었다. 문을 열고 나서니 하얀 신관복을 입은 남자 신관이 그녀에게 다정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저녁 식사 시간입니다. 저녁을 먹기 전 기도하셔야 합니다.”

“어디로 가면 되나요.”

“본관의 기도실입니다.”

안내하는 신관을 따라서 움직였다. 복도 곳곳에 놓여있는 성물에 흐르는 마력이 보였다. 그녀의 것과 같은 색의 마력도 있었고 다른 색의 마력도 있었다. 붉은 마력이 흐르는 성물들을 유심히 보았다. 그것이 그녀의 몸 안으로 흡수될 확률이 높았으니.

‘한 열 개 정도 되는군.’

그녀의 힘이 될만한 것이 이렇게나 많았다니. 진작에 눈치챘으면 좋았을 것을. 마뉘엘의 집에도 몇 개 있는 것을 보았는데 손대지 않았다.

‘그거도 전부 건드려서 마력을 얻을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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