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라르헨의 상황은 속으로 곪을 대로 곪아 있었다. 황제의 부재는 생각보다 커다란 문제를 일으켰다. 타르토스가 결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귀족들 사이에서 불만이 팽배했다.
“황제께서 안 계신데 황태녀님은 만나지도 못하게 하다니 이런 법이 어디 있는가?”
그 불만은 황제의 위를 이을 후계를 만나지 못하게 하는 선황 내외를 향했다. 기실 황태녀의 방문을 지키고 있는 자는 베르타스의 수하들이었으나 그들에게 불평을 내보였다가 그 자리에서 즉결 처형당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검과 힘은 가까운 법. 그들에겐 아무런 불만도 표출하지 못하는 귀족들이었다.
전령으로 보낸 자들이 주검이 되어 돌아오거나 팔다리를 잃고 돌아오니 귀족들도 두려움에 휩싸였다. 황태녀에게 사람을 보낼 때마다 경고의 의미로 밤에 찾아오는 자객들을 상대하다 보니 진저리가 날 지경이었다.
“어젯밤 내 방에 자객이 들었소이다!”
“그 전날엔 나였소!”
의견을 나누고 있는 귀족들은 차마 목소리를 크게 내지 못했다. 어디서 누군가 듣고 있기라도 한 듯. 적시에 자객을 보내 귀족들에게 경고하는 다한 경의 움직임은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 오늘은 이곳이었으나 다음은 저곳. 이 모든 것은 다한 혼자서 하는 일이 아니었고 페일러스의 전폭적인 지지하에 이루어지는 일이었다.
페일러스도 선황 내외의 허락을 얻어 이참에 아직 남아있는 불순분자들을 뿌리 뽑을 예정이었다. 이실리스가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해 그렇게 노력을 했는데 아직도 불만을 가진 자들이 남아있다는 것이 탐탁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한 경. 고생했네.”
“뭐 이런 걸 가지고 그러십니까.”
황태녀의 방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팔을 휘젓는 다한을 보면서 페일러스가 그의 어깨를 두들겼다.
“베르타스가 부럽군. 자네 같은 수하가 있어서.”
“뭐, 우리 각하께서 대단하신 분이라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무렇지 않게 베르타스를 추켜세우는 다한의 말을 들으면서 페일러스의 표정이 구겨졌다. 베르타스의 수하들이 그를 찬양하는 것은 아무리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었다. 처음 들었을 때 얼마나 놀랐던가. 그 음험한 놈을 찬양하다니.
“됐네.”
떨떠름한 얼굴로 대화를 끝내버리는 페일러스를 향해 다한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귀족들 사이에서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기다리고 있었어. 말이 나오는 순간 저들은 모두 처리할 것이다.”
눈을 번뜩이는 페일러스의 몸에서 한기가 흘러나왔다. 이실리스가 자리를 비우고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제 욕심만 채우는 귀족들이 곱게 보일 리 없었다. 이미 선황 내외도 그의 생각에 동의했으니 조만간 모조리 색출해서 마탑에 처넣을 예정이었다.
“그 순간이 오지 않았으면 합니다.”
다한의 말에 페일러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바램은 바램일 뿐, 현실이 되지 않았으니까.
* * *
세드릭의 뒤를 따라서 숙소까지 가는 길은 제법 멀었다. 그녀의 곁에서 저를 살피며 걷는 세드릭이 신경 쓰여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으십니까?”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녀의 물음에 세드릭이 의외라는 듯 이실리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눈을 가늘게 뜬 그가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신녀께서 가지고 계신 그 힘은 어디서 난 것입니까?”
“어디서 나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뭐, 모른 척할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습니다.”
그녀에게 별다른 대답을 기대하고 물은 말은 아니라는 뉘앙스에 이실리스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불안감이 엄습했다. 입꼬리를 올려 웃는 세드릭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하니 더더욱 그러했다.
“다 왔군요.”
이실리스가 머무는 숙소의 바로 앞까지 도착하자 세드릭이 직접 방문을 열었다. 왠지 들어가서는 안 될 기분이 들었다.
“모쪼록 푹 쉬시길.”
“감사합니다.”
안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지만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애써 떼고 안으로 들어갔다. 마음 한구석이 서늘했다. 엄습하는 불안감을 애써 내리누르면서 그녀가 한 발짝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감과 동시에 그녀의 몸을 짓누르는 무언가를 느낄 수 있었다.
“흑!”
이그나르도의 흑마법과는 달랐다. 몸을 내리누르는 이것은 마력의 힘이었다. 이실리스는 애써 버티면서 그녀의 마력을 일으켰다. 다행히 마력을 빼앗는 것은 아니어서 금방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마에서 비오듯 흐르는 땀이 채 식기도 전에 다음 상황이 벌어졌다.
“이런……!”
그녀의 방 천장에서 쏟아지는 물줄기에 당황했다. 어디서 물이 들어올 만한 곳도 보이지 않았는데 물이 한없이 쏟아졌다.
“대체 어디서 물이!”
당황한 그녀가 우왕좌왕하며 헤매었다. 문을 열어보려고 했으나 달칵거리는 소리만 들릴 뿐 문이 열리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발목까지 물이 찼다. 어디선가 서늘한 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아니, 서늘하다는 것은 잘못된 표현이었다. 시린 바람이 불었다.
차가운 바람과 함께 물의 온도가 서서히 낮아졌다. 뼛속까지 한기가 파고들었다. 시린 기운이 그녀를 감싸면서 물도 함께 차올랐다. 그녀의 허리춤까지 차오른 물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마력을 사용했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고 창도 빠져나가기엔 너무 좁았다.
‘하다못해 마력이라도 제대로 운용할 줄 알았다면!’
이동이라도 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러기엔 마력이 턱없이 부족했고 그것을 사용하는 방법도 알지 못했다.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지기라도 한다는데 이루어지기는커녕 계속해서 차오르는 물을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 * *
베르타스는 숲을 헤매고 있었다. 숲에 들어서는 순간 기이한 기운이 감돌았다. 기감을 열었으나 제대로 된 방향을 알 수 없었다. 분명 마뉘엘이 보여준 지도대로 움직이고 있었는데 어느새 보면 제자리였다.
“이것은…….”
그가 표시해 놓은 천 조각이 보였다. 이번이 벌써 세 번째였다. 이 정도면 이곳에 뭔가 있다는 소리였다.
“마뉘엘이 설마…….”
신전의 끄나풀인 것은 아니겠지. 합리적인 의심을 한 베르타스가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이대로 계속 걷다가 지쳐 나가떨어질 것 같았다. 하늘을 올려다봤다. 햇빛이 변한 것으로 보아 그가 돌아다닌 시간을 가늠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오래 돌아다녔군.”
이대로 마뉘엘이 권했던 냇가로 갈 수 없었다. 그가 원하는 곳은 계곡 근처의 길. 그 길도 지도상에 있는 길이라 신전 사람들이 지키고 있을 수도 있었다.
“여길 빠져나가야 하는데.”
이 숲을 빠져나가야 했다. 그래야 냇가든 계곡이든 찾아갈 수 있었으니. 이리저리 살피는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자그마하고 날쌘 다람쥐였다. 도토리를 물고 그를 빤히 바라보던 다람쥐는 마치 따라오라는 듯 풀숲 너머로 사라졌다. 서둘러서 그 뒤를 따라가는 베르타스의 발걸음엔 조급함이 묻어났다.
지금이 아니면 숲을 빠져나가는 길을 찾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의 앞에서 빠르게 뛰어가는 다람쥐의 뒤를 따르면서 베르타스는 계속 생각했다. 이 숲이 끝나는 길은 아니어도, 적어도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족했다.
‘동물들은 헤매지 않는 것인가.’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특이한 결계라니. 이런저런 일을 많이 겪은 베르타스로서도 처음 보는 결계였다. 일반적인 결계라면 사람과 동물에 상관없이 모두 적용이 되는 것이었는데 유독 인간의 발걸음을 거부하는 듯한 숲의 결계에 경계심을 높였다.
그의 앞에서 달려가던 다람쥐가 자리에서 멈춰 섰다. 그를 이 자리에 데려온 것으로 사명을 다한 것처럼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대체 뭐지?”
그에게 길을 안내한 저 다람쥐는 대체 무엇일까. 주위를 둘러보니 숲에서 빠져나왔고 물이 흐르는 강이 보였다. 지도에서 본 그 강 같았다.
“여기로 온다고 했지?”
들려오는 목소리에 서둘러 몸을 숨겼다.
“맞을 거야. 여기로 온다고 했어.”
“그래? 그럼 여기서 기다리면 되겠군.”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기척을 없앴다. 신관복을 입은 자들이 강가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확실하군.’
신전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자의 집에서 머물렀다니. 이렇게 뒤통수를 맞다니. 이실리스가 잡혀가는 것도 정해진 수순이 분명했다. 그랬으면서 아무렇지 않게 그의 눈을 바라보며 말하다니.
‘내가 그런 같잖은 자에게 당했다니.’
그의 형이라는 황제가 당한 일도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안에서 내통하는 자가 있는데 황제라고 해서 그냥 넘어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소드마스터이면 뭐하나. 제대로 집안 관리도 못 하는 자인데.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는 신관들을 살핀 베르타스가 그 자리에서 오라를 날렸다. 살려 보낼 수 없었다. 다행히 신관은 셋에 불과했고 저 정도 마력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라면 그가 혼자 상대하기에도 충분했다. 날아간 오라가 날카롭게 한 신관의 팔을 잘랐다.
“크아악!”
수인을 맺을 수 있는 팔을 잘린 신관이 놀라 소리를 질렀다. 우왕좌왕하는 나머지 둘이 그를 찾을 틈도 주지 않고 베르타스가 다시 한번 오라를 날렸고 검을 들고 그 자리에서 튀어 나갔다. 갑자기 나타난 그를 향해 놀란 신관들이 제대로 마력을 일으키지 못하는 순간에 검을 휘둘렀다. 한 신관의 목이 날아갔고 그의 앞에는 마지막 남은 신관 한 명이 서 있었다. 다리를 부들부들 떠는 신관이 마력을 일으키면서 그에게 저항했다.
“이……!”
오라를 두른 검을 들어 마력을 그대로 베어낸 베르타스가 신관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도망치려고 하는 신관의 팔을 검으로 내리치자 신관이 피를 흘리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고통의 신음을 흘리는 신관을 무표정한 눈으로 바라보며 베르타스가 입을 열었다.
“누가 보냈지?”
“이 사악한 마물 같은 놈! 너는 우리 신관들을 죽였으니 평생 도망쳐야 할 거다! 우리의 신이신 보클로엠이 너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그건 이미 알고 있고. 누가 보냈냐고 묻잖아.”
발로 신관의 발목을 짓이겼다. 우드득 하면서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고 비명이 숲속을 울렸다. 신기하게도 그의 비명은 멀리까지 흩어지지 못했다. 이 안에서 소리가 맴도는 느낌이었다.
“또 이곳에 무슨 짓을 했군.”
베르타스의 말에 신관이 두려움 가득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아무 말을 하지 않는 신관을 향해서 그는 검을 휘둘렀다. 그 자리에서 죽은 신관을 아무 감정이 담기지 않은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신관이 죽은 자리에서 검은 기운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