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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화. (115/161)

114화.

이실리스가 잡혀가는 그 순간부터 베르타스는 신전으로 달려갈 준비를 마쳤다. 그의 모습을 본 마뉘엘이 그를 말렸으나 이번엔 통하지 않았다. 목에 걸려있는 목걸이를 꺼내어 오라를 불어 넣었다. 환한 빛과 함께 검으로 변한 목걸이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는 마뉘엘을 향해 그가 입을 열었다.

“신전 안으로 들어갈 방법이 있나?”

“잠시 기다리십시오.”

서재에서 한참을 뒤적이던 마뉘엘이 지도를 한 장 꺼내 들고 나왔다. 낡디 낡은 지도는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처럼 힘이 없었다. 조심스럽게 지도를 꺼낸 마뉘엘이 베르타스의 앞에 지도를 펼쳤다.

“신전의 지도입니다. 아주 오래전의 것이라 이게 아직도 같을지 모르겠지만…… 도움은 될 듯합니다. 이곳으로 가는 것이 최선입니다.”

마뉘엘이 펼쳐 놓은 지도를 천천히 눈에 담았다. 그가 손으로 가리킨 곳을 보니 자그마한 강이 흐르는 곳 근처에 길이 있는 듯 보였다. 순식간에 도면을 읽어내린 그가 고개를 들었다. 

“이 하천으로 가는 방향밖에 없나? 신전과 거리가 너무 먼데.”

“들키지 않고 가려면 이게 최선입니다.”

다른 길은 생각하지도 말라는 마뉘엘의 말에 베르타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태도가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보다 신전을 많이 겪어 봤으니 가장 합리적인 길을 알려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러다 그의 눈에 들어오는 길이 하나 있었다. 하천 방향의 길보다 조금 멀리 떨어져 있는 계곡에서 통하는 길이었다.

‘저곳이 더 나을 것 같군.’

하천에서 들어가는 길은 입구가 눈에 띄는 곳에 있었다. 그렇다는 것은 이미 신전에 노출되었을 확률이 높다.

‘괜히 모험할 필요는 없지.’

마뉘엘은 최적의 동선을 알려주었겠지만 베르타스로서는 마음에 차지 않는 길로 갈 수 없었다. 그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계곡 방향의 길을 외웠다.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들려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인 베르타스가 대공저를 나섰다. 그의 뒷모습을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마뉘엘의 시선에서 한기가 흘렀다.

* * *

베르타스가 이실리스를 찾으러 출발한 그때, 이실리스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다행히 마법진을 파훼한 후에 뜬눈으로 밤을 새운 것이 무색하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제의 붉은 햇빛은 어느새 금빛으로 변해 있었고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아름답게 빛났다.

“이렇게나 다르다니.”

밖으로 시선을 돌리니 벌써 분주하게 움직이는 신관들이 보였다. 그녀의 얼굴을 알아본 신관들이 그녀를 향해 허리를 숙이는 것이 보였다. 그들에게 인사한 이실리스가 움직이려는 순간 ‘똑똑’ 하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밤새 평안하셨나요?”

여신관이 조금 놀란 듯한 얼굴로 들어왔다. 마치 그녀가 아직도 제정신으로 있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는 것처럼. 

이실리스는 속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신전의 밤은 아주 고요하더군요.”

다행히 목소리도 떨리지 않았다. 분노로 떨릴 줄 알았는데 저가 이렇게 차분한 사람이었나. 표정이 드러나지 않는 이실리스를 여신관은 감탄 어린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이곳에서의 밤을 버티시다니 대단한 신력을 가진 분이 틀림없군요. 역시 신녀님이라 부를 만합니다.”

알면서도 이 방에 밀어 넣었다는 소리였다. 그렇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 안에 들어와서 희생당했을까. 치밀어 오르는 화에도 애써 표정을 유지하면서 이실리스는 웃었다. 그녀의 웃는 얼굴을 본 여신관이 표정을 굳혔다.

“그렇다면 저도 수석 신관님처럼 높은 직위를 노려볼만하겠군요.”

“…… 판단은 성하께서 하시는 겁니다.”

“그렇군요. 부디 다시 한번 뵙게 될 기회가 있기를 바랄게요.”

너의 자리를 내가 차지하면 너도 쓸모없어질지 모른다는 뉘앙스를 알아들은 여신관이 이를 악다물었다. 

신전 복도에서 선선한 바람이 밀려들었다. 이상하게 더웠던 방안의 열기를 식히기라도 할 듯 자신을 향해서 불어오는 바람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이실리스는 해방감에 휩싸였다. 하지만, 방안에 또 다른 무언가가 있기라도 한 듯한 느낌은 좋지 않았다.

방 밖으로 나서는 순간 가벼워지는 발걸음과 묵직했던 어깨가 한결 나아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나를 도와다오.]

이 목소리가 이제는 친근해질 지경이었다. 전날 밤, 이 목소리가 전해 준 힘으로 인해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이었으니. 그러나 도움을 주고 싶어도 어디 있는지 몰라 도움을 줄 수 없었다.

“이제 무엇을 하면 될까요?”

“기도실에 가셔서 기도하면 됩니다.”

약간은 차가워진 여신관의 목소리에 이실리스는 빙긋 웃었다. 먼저 건드렸으니 절대 봐주지 않겠다. 그녀는 당한 만큼 아니, 그 배로 갚아줘야 하는 성격을 갖고 있었다. 기억을 잃은 지금도 예외는 아니었다. 악의엔 악의로. 그것이 그녀의 신조였다.

“저 혼자 가보겠습니다.”

“그러시든지요.”

화가 난 듯 차가운 바람을 일으키며 사라지는 여신관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길이라도 잃어보라…… 이건가.”

오히려 그녀가 신전 곳곳을 살펴보도록 한 것이 그들에게 좋을 것이 없을 터인데. 

‘아니면 이렇게 돌아다녀도 문제 될 것이 없다는 건가.’

이제 이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러나 아직도 확실하지 않았다. 사람들에게서 마력을 빼앗는 것까지는 알았다. 그렇다면 빼앗은 마력을 어떻게 하는 것일까. 그게 못내 궁금했다.

‘마법진으로 빼앗은 마력은 어디로 가는 거지?’

이그나르도의 흑마법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다. 생각에 빠져 이리저리 걷다 보니 무성한 숲속 한가운데였다. 이실리스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두운 기운을 가득 담고 있는 신전과는 다르게 나무들은 울창하기만 했다. 

붉은색과 노란색의 옷을 입은 나무들이 그녀를 반겼고 나무에 걸려있는 그네가 그녀를 유혹하듯 흔들리고 있었다. 그네라니. 어린아이가 놀 법한 것이 아닌가. 신전에 아이가 있을 리도 없는데 바람에 흔들리는 그네를 보면서 이실리스는 상념에 잠겼다.

“잠깐…….”

문득 그녀의 눈앞에 스치고 지나가는 장면이 있었다. 붉은 머리카락의 작은 여자아이가 해맑게 웃으면서 그네를 타고 있는 풍경이 그리듯이 망막에 새겨졌다. 여자아이의 뒤에서 그네를 밀고 있는 베르타스의 웃는 얼굴도 보였다. 

“이게 대체…….”

잃었던 나의 기억인가. 순간적으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어린 여자아이의 얼굴을 가슴속에 새기기라도 할 듯 이실리스는 아이의 얼굴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에리카라고 했지.’

아이의 이름은 에리카. 그녀의 딸이었다. 붉은 머리카락의 빛나는 웃음을 가진 아이. 그녀와 꼭 같은 붉음이 햇빛을 받아 타오르듯 빛나는 것이 눈에 선했다. 아이의 웃음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맴돌았다. 그 순간만큼은 그녀에게 독촉하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일 수 없었다. 웃으면서 그녀에게 손짓하는 아이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한 발짝 다가서려다 정신이 들었다.

“여기서 뭐 하는 거지요?”

교황, 세드릭이었다. 그의 부름에 이실리스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뒤에 일렁이는 검은 기운을 보았다. 이전까지 보이지 않던 기운이었다. 그 순간 이실리스는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마력이 한 단계 더 발전했음을.

‘기억을 찾을수록 마력이 돌아오는 것인가.’

“잠시 산책을 하고 있었습니다.”

“여기는 금역이에요. 일반 사람들은 함부로 들어올 수 없습니다.”

“다행이네요. 저는 일반 사람이 아니니.”

웃으며 말하는 이실리스의 얼굴을 묘한 눈으로 바라보던 세드릭이 그녀를 보면서 눈을 휘었다. 음험함을 품고 있는 그 웃음에 몸을 흠칫할 뻔했지만 이실리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표정 변화가 없는 그 얼굴에 세드릭의 웃음은 더욱더 짙어졌다.

“좋아요. 아주.”

“뭐가 말이죠?”

“신녀께서 위대한 자의 부름을 받아 아무렇지 않게 저를 바라보는 것이 좋다는 겁니다.”

위대한 자의 부름이라니. 하긴 교황에게서 풍기는 기운은 보통의 것이 아니었다. 그런 기운을 아무렇지 않게 마주하는 이실리스, 그녀도 일반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가늠할 수 있었다. 마력이 미미한 지금도 이럴진대 그녀가 본디 갖고 있었던 마력을 되찾으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어느 정도의 힘을 지니고 있었던 거지, 난?’

그게 못내 궁금했다. 그녀가 가지고 있었던 마력이 지금도 존재했다면 이런 신전 따위는 단숨에 밀어버릴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알뤼르도 위험에 처하지 않고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힘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알고 싶었다. 그녀가 잃은 그녀의 마력은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인지.

“…….”

“듣자 하니 수석 신관에게 그 자리에 앉고 싶다고 했다지요?”

“그것을 어떻게…….”

이걸로 확실해졌다. 신전 안에서 세드릭의 눈을 피할 수 있는 곳이 없다는 것이.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 아니,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인데 벌써 그의 귀에 들어가다니. 여신관이 냉큼 가서 말할 리는 없었으니 다른 누군가가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저는 야망이 있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이실리스를 보면서 은밀한 미소를 짓는 세드릭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입을 여는 그 순간 세드릭에게 발목이 잡혀서 수석 신관 자리에 앉게 될 것만 같았다. 위기감이 들었지만 계속 생각해보니 아니었다. 이건 기회였다.

‘아니, 어쩌면 그게 더 좋을 수도.’

그게 더 나을 수도 있었다. 적어도 수석 신관이 된다면 저들의 편이라고 생각하고 감시의 눈길을 늦출 수도 있으니. 감시를 피해 이 안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만 있다면 그 목소리를 찾을 수 있을지도.

“자리를 싫어할 사람은 아무도 없지요. 그것이 신전 안에서의 위치를 공고히 해 주는 자리라면.”

그녀의 말에 세드릭의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그 웃음에 소름이 끼쳤으나 이실리스는 애써 눈을 피하지 않았다. 한참 동안 그녀의 내심을 가늠하던 그가 그녀에게 말했다.

“좋습니다. 조만간 수석 신관을 새로 뽑을 자리를 마련해야겠군요.”

반쯤은 인정하는 듯한 그의 말에 이실리스도 웃었다. 그러나 아직 완전히 믿을 수 없었다. 이렇게 안심시켜놓고 뒤통수를 치는 일도 있지 않은가.

“가시죠.”

금역에 들어온 그녀를 원래 있던 숙소로 직접 안내하는 세드릭의 뒤를 따르면서 이실리스는 그리움을 그네가 있는 금역에 남겨 두었다. 남겨진 그녀의 그리움은 하늘로 날아가 라르헨에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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