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3화. (114/161)

113화.

지난번에 들었던 그 목소리였다.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는 것은 이 안에 무언가가 있다는 소리. 한 발짝 앞으로 내디뎠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긴장했던 것이 무색하게 너무나도 평범해 오히려 당황한 그녀가 그 자리에서 멈추어 섰다.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옆에서 함께 걷던 신관이 물었다. 그에게 고개를 저어 보이고 계속 걸었다. 걷는 도중에도 계속해서 들리는 목소리에 이실리스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점점 더 커지는 목소리는 그녀의 귓가를 울리고 있었다.

“이쪽입니다.”

이실리스는 깨질 것 같은 머리를 부여잡고 커다란 문 앞에 섰다. 음각으로 장미 덩굴이 새겨진 문을 보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장미라니. 그녀가 싫어하는 꽃이었다. 이상하게 거부감이 드는 꽃. 그 문이 열리고 방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화려하게 장식된 꽃병의 장미에서 짙은 향이 흘러나왔다. 금으로 장식된 의자에 앉아있던 교황이 그녀에게 말했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렸습니다.”

“부르셨다 들었습니다.”

“이런…… 성격이 급하시군요. 어차피 신의 힘을 지니신 분이니 당연히 신전에 있으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하지만 다들 신전으로 오셨습니다. 부정하시던 분들도 결국 신의 품으로 몸을 던지셨죠.”

이실리스에게 단언한 교황이 그녀에게 자리를 권했다. 금으로 장식된 의자에 앉은 교황이 그녀에게 손짓했다. 그의 앞에 놓인 의자에서 얼핏 붉은 무언가를 본 것 같기도 했다.

“여기 앉으시죠.”

“감사합니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상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다만 짙게 뿜어져 나오는 장미향에 머리가 아찔하게 아파졌다. 여전히 기분이 나빴다. 다만 머릿속을 울리던 목소리가 이 방으로 들어온 순간 씻은 듯이 없어졌다. 그게 이상했다. 신전 안의 모든 곳에서 들리던 목소리인데 이 방에서만 들리지 않는다니……. 날카로워진 기분으로 인해 이실리스는 아슬아슬한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곳 뮤르카 제국에서 지내보시니 어떻습니까?”

“그냥…….”

“본디 이곳 분이 아닌 것도 알고 있습니다.”

“저도 저 자신을 모르는데 저에 대해 잘 알고 계시는군요.”

“물론 제가 원해서 알게 된 것은 아닙니다. 신앙심이 깊은 자들이 곳곳에 있거든요.”

남의 집에 첩자를 심어 놨다는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 교황의 말에 이실리스가 입꼬리를 올렸다. 코끝을 스치는 장미향은 계속해서 그녀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었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귓가가 오히려 그녀를 거슬리게 만들었다. 이곳은 대체 어떤 곳이기에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가.

“신실하신 분들이 많군요.”

“전부 우리의 신인 보클로엠의 뜻 아니겠습니까.”

“신의 뜻?”

“그렇습니다. 보클로엠의 뜻.”

그에게 들어온 정보도 모두 신실한 신자들이 주는 정보라고 말하는 교황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정말로 저렇게 믿는 것일까 아니면 스스로를 그렇게 포장하는 것일까. 저 진지한 눈을 보고 있으니 정말로 신실한 사람들이 정보를 가져다 바치는 것으로 믿는 것 같았다.

“저는 이곳에서 뭘 하면 됩니까?”

“그냥 신앙심을 더 키우시면 됩니다.”

“신앙심을 키우라고 하셨나요?”

“그렇습니다. 신력을 다루는 법도 배우시고요.”

그녀가 가지고 있는 힘을 이곳에서는 마력이 아니라 신력이라고 부른다. 알뤼르가 가르쳐주지 않았다면 그녀도 깜박 속을 뻔했다. 신력이라니. 이게 신력이라면 신을 믿지 않는 그녀에게 이런 힘을 주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럼 전 가면 되나요?”

“밖으로 나가시면 수석 신관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뒤돌아서 걷는 이실리스의 등 뒤에 끈질기게 따라붙는 어둑한 시선을 알아차릴 수 없는 그녀였다. 교황의 방 밖으로 나가자마자 전에 봤던 그 여신관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오셨군요!”

그녀를 향해 밝게 웃으면서 말하는 여자를 보면서 이실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오실 줄 알았어요. 역시 신심이 깊으셔서 오시게 된 거군요.”

그녀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텐데 일부러 그렇게 말하는 여신관을 보면서 이실리스는 입을 열 수 없었다. 미소를 짓는 그녀의 얼굴에 흐르는 한기를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하긴 그러고 보니 그 대공 때문에 다시 대공저로 가실 수밖에 없었죠.”

눈가에 흐르는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다. 어두운 무언가가 그녀의 등 뒤로 일렁이는 듯했다. 잘못 보았나 싶어 다시 보니 그 기운은 사라지고 없었다.

“너무 걱정 마세요. 황제도 대공도 다 허수아비랍니다. 이 뮤르카 제국에서 주신, 보클로엠님을 모시지 않는 사람들은 없으니까요.”

“…….”

계속해서 말이 없는 그녀에게 친하게 다가오는 여신관의 태도가 낯설었다. 물론 전에도 비슷하게 대하긴 했지만, 그녀가 가진 힘이 신력이 아닌 마력이라는 것을 안 이상, 알뤼르가 이곳에 왔다가 소식이 끊긴 것을 알게 된 이상 아무렇지 않게 대하기는 힘들었다.

“아, 먼저 들어오신 분의 소식이 궁금하시겠군요.”

“그는 어디에 있죠?”

여신관의 말에 이실리스가 즉각 답했다. 드디어 열린 그녀의 입술을 보고 환히 웃은 여신관이 이실리스에게 말했다.

“그분은 신을 만나러 가셨답니다.”

“신을…… 만나러 간다니…….”

“신력이 높은 분들만 할 수 있는 일이죠. 신을 뵙는 것.”

“신을 뵙는다?”

“그렇습니다. 신은 실제로 존재하는 분이니까요.”

여신관의 말에 이실리스는 혼란에 빠졌다. 알뤼르에게 소식이 없었고, 여신관은 그가 신을 만나러 갔다고 말했다. 그렇다는 것은 그가 죽었다는 소리인가.

‘아니, 신은 실제로 존재한다고 했어.’

그렇다면 신이 있는 곳으로 갔다는 소리인데 그곳은 어디인가. 그녀도 가게 되는 것인가. 그게 궁금했다. 그녀가 그곳으로 가게 된다면 알뤼르를 찾을 수 있는 것일까.

“여깁니다.”

이실리스를 어떤 방으로 안내한 여신관은 방문을 열어주고는 사라졌다. 방안은 소박했다. 작은 나무 탁자 하나와 나무로 만들어진 침대. 기도를 할 수 있는 단이 하나 있고 그 앞에 주신이라는 보클로엠을 형상화한 것이 있었다. 그게 다였다. 그게 다인 공간에 발을 들여놓기가 두려웠다. 이렇게 온몸을 휘감는 불안감은 처음이었다.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심스럽게 한 발짝 앞으로 내디뎠고 방 안으로 들어가 방문을 닫았다. 멀리서 길을 가지 않고 그 모습을 지켜본 여신관이 입꼬리를 올려 사이한 미소를 지었으나 누구도 그 미소를 볼 수 없었다.

“흑!”

방안에 들어서자마자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마력을 잡아끄는 무언가가 이 안에 존재하고 있었다. 많지도 않은 마력이 서서히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한없이 밑으로 빨려들어 갈 것 같은 정신을 부여잡고 문을 열려고 노력했다. 문고리는 돌아가지만, 문이 열리지 않았다.

“안…… 안 돼……!”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줄어들었고 몸 안에서 빠져나가는 마력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때 그녀의 귓가에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아이야 도와다오.]

지금 상황에서 내가 당신을 도울 여력이 없다는 것을 잘 알지 않냐고 말하고 싶었다. 떨어지지 않는 입을 간신히 열어 그녀가 누군가의 말에 답했다.

“그렇…… 다면 나를 먼저…… 흑, 먼저 도와줘!”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붉은빛이 일어났다. 그녀의 몸에서 나오는 붉은빛은 문틈을 새어 나올 정도로 강력했다. 도와달라는 말에 누군가가 응답할 줄은 몰랐다. 붉은 마력이 몸을 감싸자 정신이 조금 드는 느낌이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그나르도의 마법진이라는 것도 보이지 않았다. 붉은 마력을 일으켜 방안을 샅샅이 뒤졌다. 양탄자로 감춰진 바닥에서 마법진을 발견한 그녀가 서둘러 탁자 위에 놓인 물병을 집어 들었다. 마력으로 그린 마법진이 물로 지워지리란 요원해 보였지만 물에 마력을 퍼부었다.

그녀의 붉은 마력이 물과 섞여 환한 빛을 내뿜었다. 그 빛은 바닥으로 쏘아지더니 검은 마법진을 붉게 물들였다. 한참 검은색으로 빛나던 마법진은 이실리스의 마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붉은색으로 물들었고 그녀의 마력을 빼앗아 가던 어떤 힘도 사라졌다.

“뭐야 이게.”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말을 숨길 수 없었다. 이실리스는 황당한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설마 신전의 모든 방에 이런 장치가 되어있는 것은 아니겠지. 손님이라고 불렸던 사람들이 묶었던 방에 이런 장치를 해 놓았다고?’

그 사람들이 실종되었다는 사실은 죽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마력을 한계까지 빨아들이는 이 마법진에서 무사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설마 알뤼르도?”

말이 나오자마자 입을 다물었다. 헛된 생각은 금물이었다. 이렇게 튀어나온 말이 현실이 될까 두려워 이실리스는 터져 나오려는 궁금증을 속으로 삼켰다. 지금은 자신도 누군가의 도움으로 인해 살아남았지만, 내일도 그러라는 법은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여기서.”

여기 들어온 모든 사람들이 이 방에서 죽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저보다 강력한 마력을 지닌 사람이라면 그녀와 같은 방법을 사용하여 살아남을 수 있었으니. 그럼 그 뒤엔 어떻게 된 걸까. 그녀보다 강력한 마력을 지닌 알뤼르는 살아남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뒤엔? 이런 일을 겪은 뒤엔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지?

붉은 방안은 그녀의 마음을 따라 더욱 붉게 물들었다. 피처럼 붉은 햇빛이 창을 통해서 방안으로 들어오자 그 빛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붉음. 나의 색. 그녀의 머리카락도 붉었고, 마력의 색도 붉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주신인 보클로엠의 색도 그녀의 것과 같았다.

“보클로엠이라…….”

신의 사도를 자처하는 신전에서 흑마법과 같은 사특한 힘을 가지고 사람들의 능력을 갈취할 줄은 몰랐다. 가지 말라던 베르타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의 강인한 얼굴, 그의 검은 눈동자 그의 검은 머리카락까지. 모든 것이 그리웠다. 떠난 것은 아주 잠깐이지만 갑자기 밀려드는 그리움에 이실리스는 양손으로 자신의 팔을 감싸 쥐었다. 웅크리고 침대 위에 앉은 그녀의 얼굴엔 두려움이 가득했다.

“베르타스.”

약해지고 싶지 않았다. 그의 이름을 입 밖에 낸 순간 그녀 스스로가 약해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애써 참았다. 그는 그이고 나는 나. 그가 나와 같은 곳을 보고 걸어가는 인생의 동반자라고 말했으나 그녀에게 와닿지 않았다. 그저 그렇구나 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 순간 사무치게 그리운 것은 왜인가.

“나를 구하러 올 건가. 베르타스?”

들리지 않는 물음을 공허한 허공에 내뱉었다. 물론 듣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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