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알아챘다고?”
“그렇습니다.”
교황은 마뉘엘의 집에 심어둔 첩자에게 소식을 전해 듣고 있었다.
“이제 이곳으로 오려고 하지 않을 텐데 어찌하시겠습니까.”
묻는 말에 교황의 입꼬리가 음산하게 올라갔다.
“알아도 상관없지. 어차피 억지로 데려오려고 했거든.”
* * *
“힘을 찾지 못해도?”
“그래. 힘을 찾지 못해도.”
이실리스의 물음에 베르타스는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그의 말에 이실리스의 표정이 무너지는 것이 보였다. 냉정해 보였던 그녀의 약한 모습이 드러나자 웃었다. 처음부터 그녀가 라르헨의 황제여서 사랑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가 황제라는 자리에서 커다란 짐을 지고 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알뤼르에겐 안 된 말이지만 이실리스가 힘을 찾지 못한다면 그녀만 데리고 라르헨으로 도망칠 방법도 알아보았다. 알뤼르가 없어진 일주일 동안 베르타스가 고민한 것은 이것뿐이었다. 알뤼르도 소중했지만, 그의 전부는 이실리스였다.
“내가 혼자서라도 알뤼르를 구해올 수 있으니 걱정 말아.”
이실리스를 안심시키기 위해 베르타스는 말했다. 아니, 확실하지 않았다. 이실리스보다 못할 뿐이지 알뤼르의 마력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랬는데 그런 마법사를 흔적도 없이 숨겨버린 신전의 저력에 감탄했다. 이실리스가 머무는 방 안에 도착한 그가 방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그의 발을 붙잡는 그녀의 말이 들렸다.
“아니. 내가 간다.”
“뭐?”
이실리스의 말에 당황한 베르타스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가 가겠어. 가서 찾아온다.”
“이실리스.”
“가서 나도 알아봐야겠어. 그 안에 뭐가 있는지.”
“뭐가 있다고?”
“그래.”
이실리스는 지금까지 숨겨왔던 이야기를 베르타스에게 털어놓았다.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가 있다고.
“목소리?”
“누군가 날 부르고 있어. 그 안에 분명 뭔가 있어.”
베르타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목소리가 들린다고? 지금도?”
“지금도?”
“지금도…… 라고 말했어.”
베르타스의 말에 이실리스는 생각에 잠겼다. 그가 지금도 라고 말한 것은 분명 이전에도 그녀에게 어떤 목소리가 들렸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전의…… 기억을 잃기 전의 나도 어떤 목소리를 들었나?”
“그래.”
“그 외에 나에게 숨기고 있는 게 뭐지?”
이실리스는 베르타스에게 캐물었다. 처음부터 말해줬다면 알뤼르를 보낼 필요도 없이 그녀가 갔을 것 아닌가. 그 안에 무언가가 그녀를 이전부터 불렀다는 것을 알았다면 당연히.
“그 이야기를 왜 이제야 하는 거지?”
“이게 중요한 건가?”
“그럼 아닌가?”
“아직도 들리는 목소리야. 그럼 당연히 중요하지 않나?”
이실리스의 말에 베르타스도 생각에 잠겼다.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이실리스는 눈을 감았다. 결국, 그녀의 잘못이었다. 그녀가 미리 말했더라면 모든 것을 더 일찍 해결할 수 있었을 텐데.
“네가 아무것도 묻지 않는데 내가 말해줄 순 없어, 이실리스.”
“나도 알아. 그러나…….”
“아마 내가 무슨 말을 먼저 했다면 너는 나를 더 믿지 못했겠지.”
“그래도!”
“내가 미안하다.”
제게 잘못했다 말하는 남자에게 이실리스는 더 캐물을 수 없었다.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그러나 하나는 확실히 해야겠다.
“또 뭔가 있나?”
“안 그래도 너에게 이야기하려던 것이 있다.”
베르타스는 품 안에서 알뤼르가 준 수첩을 꺼내 들었다. 이그나르도의 흑마법에 대해 적혀있는 알뤼르의 수첩이었다. 자세한 내용이 적혀있는 그것을 받아든 이실리스가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하게 그 수첩을 읽었다. 기억을 잃은 그녀에게는 낯선 내용이어서 읽고 또 읽었다.
베르타스는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이실리스가 알뤼르의 수첩을 읽고 무언가 단서를 찾기를. 그러나 그뿐이었다. 읽고 읽었으나 잘 모르겠는 표정의 그녀를 보면서 베르타스는 기대를 버렸다.
“이그나르도는 누구지?”
“이자는 흑마법으로 유명한 자지. 다른 사람의 마력을 갈취해서…… 설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 신전 안에 이그나르도의 흑마법을 이용한 마법진이 있다면, 그래서 알뤼르의 마력을 갈취당했다면. 그 전에 없어진 사람들도 모두 마법진에 잡혀 마력을 빼앗기고 있다면. 그 마력이 신력으로 둔갑하여 신전을 알리는 데에 이용되고 있다면.
베르타스가 생각하는 것을 이실리스도 똑같이 생각한 것인지 입술만을 달싹거리면서 차마 입을 떼지 못하는 그녀를 보았다.
“설마 그런 건가.”
“그렇다면 넌 갈 수 없어.”
그가 단언했다. 그 신전 안으로 이실리스를 보낼 수 없었다. 그녀가 어릴 적에도 이그나르도의 마법진에 사로잡힌 적이 있었다. 그때 그녀를 구한 사람은 그녀의 아버지인 타르토스였다.
‘그래서 내게 그렇게 말한 것이었군.’
이곳으로 오기 전 쉽지 않을 것이라 말했던 타르토스의 말이 떠올랐다. 이실리스의 눈꼬리가 점점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아니, 내가 가야 한다.”
“안 돼.”
이그나르도의 마법이라면 지금의 이실리스로는 방법이 없다. 알뤼르의 수첩에 적혀있는 내용에 의하면 저 신전 전체가 그 마법진으로 이루어졌을 텐데 그녀를 그 안으로 들여보낼 수 없었다. 그녀의 마력을 노리는 자들에게 그냥 마력을 내어줄 수 없다.
“잘 들어. 이실리스. 너의 마력을 노리는 누군가가 저 안에 있다. 이 상황에서 너마저 마력을 빼앗겨 버리면 방법이 없어.”
“이렇게 적은 마력을 노리는 자가 있다고?”
“그래. 그러니 너는 들어갈 수 없어.”
“…….”
생각에 빠진 듯 보이는 이실리스를 두고 방 밖으로 나왔다. 나서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는 그녀를 보면서 베르타스는 그녀가 있는 문 앞을 지켰다. 싸늘한 바람이 그를 스쳐 지나갔다. 창밖에서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가 스산하게 들렸다.
‘이그나르도의 마법이라니. 그 마법이 신전에서 사용되고 있다니……. 그렇다면 저들은 신을 모시는 자들이 아니라 흑마법사가 아닌가.’
헌데 이상했다. 이그나르도의 마법진을 사용해서 다른 사람의 마력을 갈취한 자들은 갈취당한 사람의 마력색을 띠게 된다. 그러나 신관들의 마력은 동일하게 붉은색. 그게 이상했다.
‘뭔가 있군.’
그 안에 뭔가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안에서 느껴지는 기척을 느끼니 이실리스가 침대 위에 누운 것 같았다. 베르타스는 기감을 열어두고 잠을 청했다. 그녀가 아직 잠들지 않은 것을 알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금 이렇게 쉬지 않으면 온종일 그녀를 지킬 수 없었으니. 알뤼르가 없는 동안 계속된 베르타스의 생활이었다.
* * *
‘이그나르도의 마법이라.’
알뤼르가 남기고 간 수첩을 읽고 또 읽었다. 정리하자면 이랬다. 신전에서 이그나르도의 흑마법을 사용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 마법은 다른 사람의 마력을 빼앗을 수 있다. 빼앗은 마력을 모아 신관들에게 주는 것 같다. 여기까지가 알뤼르의 추측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알아보겠다고 안으로 들어갔던 알뤼르는 사라졌다.
“흠…….”
베르타스는 들어갈 수 없다 단언했으나 이실리스는 알고 있었다. 지금도 귓가에 들리는 목소리의 정체를 알아내려면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신전 안으로. 그 신전 안에 있는 무언가가 그녀를 부르고 있었고 그 부름에 따라야만 그녀의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가 잃은 기억도, 그녀가 잃은 마력도 그 안에 있는 무언가를 만나면 해결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가면…… 무사할 수 있을까?”
안에서 저를 부르는 누군가를 만나기도 전에 마법진에 사로잡혀서 마력을 빼앗기는 것은 아닐까 두려웠다.
‘그러나 알뤼르도 똑같이 두려웠겠지.’
그래, 그랬을 거다. 그랬는데 그는 나섰다. 그녀를 위해서. 밖에서 그녀를 지키는 베르타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를 위해서 신전 안에 들어가는 것을 말리고 있었다.
‘어찌해야 하나.’
결론은 하나였다. 그러나 그것이 최선의 선택인지 알 수 없었다. 어차피 신전에서 사람들이 나오면 그녀는 신전으로 향해야 할 터였다. 그녀의 침대 옆에 놓인 통신석을 바라보았으나 통신석은 잠잠하기만 했다. 잠이 오지 않았다. 깊어가는 밤을 따라 생각도 깊어갔다.
* * *
새하얗게 밤을 지새운 이실리스는 결론을 내렸다. 일단 신전으로 들어간다. 들어가서 저를 부르는 것을 찾는다. 그렇다면 모든 것이 해결될 거라는 막연한 믿음을 가졌다. 밝아오는 아침 해를 보면서 그녀는 결심했다.
당장이라도 신전으로 들어가겠다고.
“신녀님!”
이른 아침부터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대공저의 집사였다. 또 황제라도 왔나 싶어 이실리스가 일어나서 움직이려던 찰나였다. 문이 벌컥 열리고 신관들이 들이닥쳤다. 베르타스가 그들을 저지하고 있었으나 문이 열리는 것을 막지 못했다. 그가 본신의 힘을 다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신녀님, 성하께서 부르십니다.”
“성하?”
“그렇습니다.”
도망치는 것은 용서치 않겠다는 듯 문 앞을 막고 있는 신관들을 보면서 이실리스가 웃었다.
‘참 제대로 준비하셨군.’
어제 베르타스가 한 말을 들은 것 같았다. 대공저도 믿을 수 없다니. 신전으로 보낼 수 없다는 그의 말을 듣기라도 한 듯 아침 일찍 들이닥친 이들을 어떻게 막을 수 있단 말인가. 그녀의 어이없는 웃음에 베르타스가 입술을 짓씹었다. 무력감에 휩싸인 그에게 손짓한 이실리스가 입을 열었다.
“준비가 다 될 때까지 기다리게. 이렇게 이른 시간에 오다니 신전도 예의가 없군.”
“그럼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대답을 받아낸 신관들은 문밖으로 나갔다. 창밖을 내다보니 그 앞에서 신관들이 지키고 있었다.
“빠져나가긴 글렀군.”
“이실리스.”
“걱정 마.”
오히려 잘 됐다. 저들이 저렇게 나온다는 것은 몸이 달았다는 소리일 테니. 알뤼르의 마력으로도 부족했다는 소리 같은데, 그보다 마력이 더 적은 그녀의 것을 가져다 어디에 쓰려고 하는 것인지 그게 궁금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 마법진은 정말 이그나르도의 마법진인가.
“가자.”
준비라고 할 것도 없었다. 다만 베르타스와 말할 기회가 필요했을 뿐인데 그것도 귀가 많은 이곳에서 가능하지 않았다. 이실리스는 탁자 위에 있는 펜과 종이를 들어 글을 휘갈겨 썼다. 그 종이를 베르타스에게 넘겼다. 고개를 끄덕이는 베르타스를 보면서 후련한 마음으로 밖으로 나섰다.
“가시죠.”
“신전으로 가는 건가?”
“그렇습니다. 교황께서 그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녀의 앞뒤를 포위하고 움직이는 신관들의 기세가 대단했다. 멀리서 마뉘엘의 얼굴이 보인 것도 같았지만 이실리스는 입을 열지 않았다. 마차 안에서 신관이 뭐라고 말을 붙이려 노력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대꾸하지 않았다. 지난번과 같이 누군가가 습격하는 일은 없었고 그녀는 무사히 신전의 앞에 섰다.
[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