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알뤼르가 신전으로 가겠다는 말에 마뉘엘이 입을 열었다.
“제가 신전에 연락을 넣겠습니다.”
“그럼 좋겠군. 수고하게.”
그 말을 냉큼 받은 제라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제국의 일을 논하는 자리에서 피곤하니 먼저 가보겠다는 황제였다. 그런 그를 한심스럽게 바라보는 베르타스의 시선을 아무렇지 않게 넘긴 제라드는 웃으면서 서약의 방 밖으로 나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마뉘엘이 한숨을 내쉬면서 베르타스와 이실리스 그리고 알뤼르를 데리고 대공저로 돌아갔다.
* * *
알뤼르가 신전으로 출발하기 전날.
“이거 받으십시오.”
그가 이실리스에게 붉은 마력석을 내밀었다.
“…….”
마력석을 받아들고 영문 모를 표정을 짓는 그녀에게 알뤼르가 겸연쩍은 듯이 웃었다.
“이건 통신석이라는 겁니다. 여기에 이렇게 마력을 불어 넣으면…….”
그가 통신석에 마력을 불어 넣자 반짝하고 빛이 나면서 통신석이 빛났다. 그의 품 안에 있는 다른 통신석도 반짝거렸다. 전에 이실리스의 마력석을 가지고 가서 알뤼르가 만든 통신석이었다. 라르헨 제국에서 가져온 통신석은 작동을 하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이곳에서 직접 만든 것은 작동이 가능했다. 성능을 확인한 알뤼르가 신나서 룰루랄라 가져온 것이었다.
“제게 연락이 오게 됩니다.”
“반대의 경우도 똑같겠군요.”
“그렇습니다. 말 편하게 해 주십시오!”
알뤼르가 불퉁하게 말했지만 이실리스는 웃을 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편하게 말하고 싶었는데 그렇게 되지 않는 상황이 그녀도 불편했다. 잠시 입술을 삐쭉거린 알뤼르가 그녀에게 말했다.
“제가 먼저 가서 신전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이실리스님이 저 신전으로 들어가시기 전에요.”
“조심하세요.”
“물론 늘 조심할 겁니다. 저는 이실리스님을 지키다가 죽을 몸이니까요. 신전에 들어가서 잘못될 수는 없죠.”
웃으면서 장난스럽게 말하는 알뤼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실리스는 웃고 있는 그를 보며 애써 웃었다. 마음이 심란하고 불안하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녀를 대신해서 신전으로 들어가는 사람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무슨 일이 생기면…….”
“통신석으로 연락 드리겠습니다.”
품 안의 통신석을 꺼내 들면서 알뤼르가 대답했다. 전에 주신 마력으로 만든 거라며, 예쁘지 않냐고 묻는 그의 말에 이실리스가 환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이실리스님의 웃음을 보았으니 이보다 더 어려운 일도 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알뤼르가 그녀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손을.”
그의 말에 따라 이실리스는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등에 깊게 입술을 내린 알뤼르가 이실리스에게 말했다.
“나의…….”
목소리가 작아 그녀를 뭐라고 부르는지 듣지 못했다. 그러나 물을 수 없었다. 경외 어린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알뤼르에게 방금 한 말이 무엇이냐고 물을 수 있을 리가.
깊게 허리를 숙인 알뤼르가 그녀가 머무는 방을 나섰다. 그가 나가자마자 베르타스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인사는 잘했나?”
“…… 잘한 건가.”
알 수 없었다. 알뤼르는 만족한 듯 후련하게 돌아섰지만 이실리스는 그럴 수 없었다. 마음 한구석에 움튼 불안감이 그녀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 불안감은 이내 마음의 지표까지 뚫고 올라와 그녀의 얼굴에 표출되었다.
“괜찮은가?”
베르타스의 다정한 물음이 들렸지만 이실리스는 답하지 않았다. 불안하다는 말을 꺼내는 순간 그녀의 불안감이 현실이 될 것만 같아서.
“별일 없을 거야.”
베르타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별일 없을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손안에 쥐어진 통신석을 내려다보면서 이실리스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 * *
알뤼르가 신전에 들어간 지 일주일 째, 연락이 닿지 않았다. 신전에 들어간 첫날을 제외하고 통신석이 반짝인 날이 없었다.
“아직도 연락이 없습니까?”
마뉘엘이 이실리스를 향해 물었다. 알뤼르가 그녀에게 준 통신석을 계속 들고 다녔지만 울리지 않았다. 그것은 그녀가 통신석에 마력을 불어 넣어도 마찬가지였다.
응답해야 할 통신석의 마력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처럼 반응이 없었다. 마법사인 이실리스는 그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대답할 상대가 없었다. 고개를 젓는 이실리스를 보면서 한숨을 내쉬는 마뉘엘이었다.
“대체 저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걸까요.”
그녀를 보며 한탄하듯 말하는 마뉘엘에게 이실리스는 아무런 답을 할 수 없었다. 그녀도 아는 것이 없었기에. 이실리스의 불편한 기색을 눈치챈 베르타스가 입을 열었다.
“대공조차 알지 못하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까.”
선을 긋는 베르타스의 말에 마뉘엘이 멈칫했다. 탓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궁금했을 뿐이었다. 정말로.
“저 안에서 문제가 생기고 있다면 우리 같은 외부인이 아니라 뮤르카 제국의 황제가 해결해야 할 문제 아닌가?”
냉정한 베르타스의 말에 마뉘엘의 표정이 굳었다. 그의 판단이 옳았다. 마뉘엘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형인 황제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신전 안으로 들어갔다가 봉변을 당했다.
“황제께서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셨습니다.”
그것은 확실했다. 해결하려고 했으나 해결하지 못하고 허수아비가 되어 돌아왔다. 마뉘엘은 아직도 생각하곤 했다. 그의 형이 신전으로 들어갈 것이 아니라 그가 들어갔으면 어땠을까. 매일같이 후회했다.
“하지만 해결되지 않았지. 결국, 알뤼르까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를 상황이고.”
알뤼르가 떠나기 하루 전, 베르타스는 알뤼르의 방문을 받았다.
[이거 받으십시오.]
[이게 뭐지?]
[국부께서 필요하실 것 같아 제가 써봤습니다.]
알뤼르가 건넨 것을 보니 신전에 대해 그가 추리한 내용을 적은 수첩이었다.
[이걸 왜 주는 거지?]
[만약이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알뤼르.]
[아, 저도 그런 일이 생기길 바라진 않아요.]
싱긋 웃으면서 말하는 알뤼르의 얼굴을 냉엄한 눈동자로 바라보던 베르타스가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어 말했다.
[반드시 돌아오라고 명하겠네.]
[국부께선 나의 폐하가 아니시니 그런 명을 할 자격은 없지만…… 마음 깊이 새기겠습니다.]
인사하고 방을 나서는 알뤼르를 잡지 못한 베르타스였다. 그게 지금에 와서는 한이 되었다. 왜 그때 그 사람을 잡지 않았을까. 이유는 단 하나였다. 이실리스를 위험한 곳으로 보내고 싶지 않다는 그것.
그 이유로 알뤼르를 잡지 못했고 지금에 와서 그의 행방을 알 수 없었다. 눈앞에 있는 마뉘엘을 할 수만 있다면 찢어 죽이고 싶은 기분이었다. 조막만 한 나라 하나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고 이실리스와 알뤼르에게 손을 내민 저자를.
“대공 전하! 폐하께서 납시셨습니다!”
불편한 분위기가 이어지던 중, 대공저를 관리하는 집사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달칵’ 하고 문이 열렸고 제라드가 안으로 들어왔다.
“이곳의 손님이 신전으로 들어갔으나 소식이 없다고 들었다. 사실이냐?”
들어서자마자 본론을 묻는 제라드의 말에 당황한 마뉘엘의 표정이 고스란히 눈에 들어왔다.
“그렇습니다.”
“역시. 예외는 없군. 이곳의 손님이 귀한 분이라고 하여, 그 사람을 모시는 사람에게 예외를 두겠거니 했는데 아니었다니.”
너희들도 어쩔 수 없냐는 제라드의 눈동자에 베르타스는 발끈했으나 표정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사람을 잃은 곳에 와서 저런 헛소리를 하다니 역시 황제가 되기엔 부족한 자라고 생각하면서.
“이곳에 오셔서 하실 말은 아닌 듯합니다.”
이실리스의 말에 마뉘엘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제라드의 흥미로운 눈이 그녀를 향하자 베르타스는 칼을 빼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순식간에 차가워진 방 안의 분위기를 감지한 제라드가 웃으면서 이실리스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손님께서는 무슨 방법이 있는가?”
“아직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입만 살았군.”
“그것은 폐하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지 않고 말하는 이실리스를 향해 흥미로운 시선을 거두지 않는 제라드였다. 그의 얼굴을 보면서 이실리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하실 수 없어 외부인인 우리에게 모든 것을 맡기신 분이 할 말은 아닙니다.”
그 말을 끝으로 더는 할 말이 없다는 듯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녀를 따라 베르타스도 걸었다.
“앉으시게.”
“대화하실 의도가 없으신 분과 할 말은 없는 듯합니다.”
“그대로 나가면 좋을 일이 없을 텐데?”
“어차피 신전에서 저를 데리러 올 때까지 저를 어쩌지 못하실 걸 압니다. 그러니 이리 방자해도 어쩌지 못하겠죠. 아닙니까?”
이실리스의 말에 제라드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마뉘엘도 마찬가지였다. 베르타스는 그녀의 상황판단력에 감탄하면서 뒤를 따랐다. 천천히 응접실을 나서는 그녀를 아무도 잡을 수 없었다.
“어쩔 거지?”
밖으로 나오자마자 베르타스에게 묻는 이실리스의 목소리에 분노가 서려 있었다. 화가 난 그녀의 어깨를 짚으면서 베르타스가 속삭였다.
“지금 당장은 방법이 없어. 알뤼르를 구하려면 내가 들어가야 하는데 너를 두고 갈 수 없다.”
“그럼 기다리자는 건가?”
“마력은 모두 찾았나?”
“아니.”
한숨을 내쉬는 이실리스의 목소리에 깊은 후회가 서려 있었다. 자기가 갔어야 했다는 그녀의 말에 동의하진 않았지만 베르타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간다고 했다면 알뤼르가 아닌 자신이 나섰을 테니까.
계속해서 무언가 비어있는 느낌이었다. 이실리스는 마력을 다루면 다룰수록 알 수 있었다. 그녀가 가진 마력은 본디 더 많았는데 지금은 많은 부분이 비어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뭉텅이로 마력을 빼내 간 것처럼.
‘확실한 것을 알 수만 있다면…….’
왠지 알뤼르가 알 것 같았지만 그는 자리에 있지 않았다. 그가 떠나기 전에 물어봤어야 하는데 아무것도 묻지 못하고 그냥 보낸 것이 아쉬웠다. 그녀의 문제에 대해서 확실히 파악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였는데.
“내 마력은 이것보다 더 많았겠지?”
“그렇지.”
“너도 소드마스터이니 그것을 느낄 수 있겠지?”
“그렇지.”
“그럼 내가 지금 왜 이런 상태인지도 아나?”
“나는 알지 못해. 이실리스, 마법사와 검사는 다르다.”
“그래도 극의에 달한 자라면 통하는 것이 있을 것 아닌가!”
목소리가 높아졌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녀의 상황에 대해서 확실하게 설명해 줄 수 있는 책은 없었고, 모든 것은 두루뭉술한 설명뿐이었다. 뜬구름 잡는 것 같은 기분에 점점 초조해졌다. 그녀의 힘을 모두 찾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찾지 못하면?’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이실리스는 그게 두려웠다. 베르타스도 그녀가 힘을 찾기를 원하고 있었다. 알뤼르도 그랬고. 그녀가 힘을 찾지 못하고 제대로 된 기억이 없었기 때문에 알뤼르가 대신해서 신전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고 나서 실종되었다. 알뤼르에 대한 부채감이 그녀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내가 힘을…….”
“이실리스.”
베르타스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
“힘을 찾지 못해도 변하는 것은 없어. 너는 내가 사랑하는 이실리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