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폐하, 제발…….”
“알겠다.”
조금 전까지의 머저리 같았던 태도가 연기였다는 양, 순식간에 분위기가 변했다. 벽의 한 부분을 짚은 제라드의 손짓에 벽이 열리고 새로운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황제의 별실이었다.
“들어오지.”
로브를 알뤼르에게 넘긴 제라드가 걸음을 옮기자 마뉘엘이 그의 뒤를 따랐다. 베르타스와 이실리스 그리고 알뤼르도 서둘러 벽 너머로 움직였다. 그들이 모두 별실로 움직이자 스르르 벽이 닫혔다.
“황궁엔 듣는 귀가 많지.”
“이곳은 아닙니까?”
베르타스가 나서서 물었다. 그를 의미심장한 눈으로 바라본 제라드가 입꼬리를 올렸다. 어딘지 얄미워 보이는 그 얼굴에 순간적으로 표정을 굳힐 뻔했다.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곳을 엿보려면 적어도 교황 정도의 신력을 지녀야 한다고 말하고 싶군.”
“그렇습니까?”
믿을 수 없다는 듯 비웃는 베르타스의 모습에 제라드도 마주 웃었다.
“소드마스터인 자네라면 다를 수도 있겠군.”
그의 경지를 눈치챈 제라드의 말에 베르타스의 표정이 굳었다.
“폐하께서는 검술로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도달했지만 신전에게 그 힘을 빼앗기셨습니다.”
“힘을 빼앗겼다고 했나요?”
이실리스의 말에 마뉘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와 같은 상황이었다. 그녀도 그녀가 가진 무언가를 잃었다. 기억과 마력. 그 두 가지.
“아…….”
무언가를 알아차린 알뤼르의 탄성이 들렸지만,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마뉘엘의 표정이 돌변했기 때문이었다.
“지금부터 말하는 사항은 극비입니다. 이 안에서 한 말이 밖으로 발설되는 순간…….”
“순간?”
“죽게 됩니다.”
어딘가에 발설할 생각도 없었지만, 생각보다 큰 핸디캡에 놀란 알뤼르였다. 베르타스도 표정의 변화는 없었지만, 마찬가지로 놀랐다.
“이 방은 서약의 방입니다.”
“이런…….”
이미 서약의 샘물을 마신 적이 있는 베르타스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 샘물 때문에 그가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저 먼 나라에 서약의 샘물과 비슷한 것이 있다는 것을 풍문으로 들어 알고 있었지만 정말 존재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 지긋지긋한 것이 여기에도 있다니.’
“뮤르카 제국의 초대 황제께서 만든 방입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은 뭐지?”
존대는 집어치우기로 했다. 심기가 상한 베르타스였다. 서약의 방이라니. 이 안에서 어떤 서약을 해야 한단 말인가.
“기분이 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그만큼 중요한 일인지라…….”
“왜 이렇게 저자들에게 자세를 낮추느냐 마뉘엘.”
“폐하. 우리는 저분들의 도움이 꼭 필요합니다.”
“도움?”
“그렇습니다.”
누군가의 손을 빌린다는 것이 못마땅한 제라드는 인정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꺾었다. 그를 향해서 마뉘엘이 다시 입을 열었다.
“폐하.”
“…… 저들이 우리를 돕는다면 무언가 달라질 것 같으냐?”
“적어도 신전을 와해시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좋다.”
제라드의 허락이 떨어지자 마뉘엘이 입을 열었다. 지금 뮤르카 제국이 처해있는 상황에 대해 구구절절하게 설명한 마뉘엘을 본 베르타스의 표정이 굳었다.
“지금 우리더러 다른 제국의 일에 끼어들어 해결하라는 것인가?”
“제게 약속하셨습니다. 힘을 빌려주시겠다고.”
“그것은 나 혼자의 힘이었으니 나 혼자 하겠다.”
“안 됩니다. 당신의 힘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저기 계신 귀하신 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녀는 안 돼.”
이실리스를 위험에 처하게 할 수는 없었다. 베르타스는 그 부분만큼은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그의 고집을 알아차린 마뉘엘이 다시 그를 설득하려 했지만 베르타스는 움직이지 않았다. 지금 상황에서 이실리스를 다시 위험에 처하게 한다면 스스로를 평생 용서하지 못할 것이다.
“에리카.”
이실리스를 부르는 마뉘엘의 목소리에 베르타스의 표정이 날카로워졌다. 이실리스가 그녀의 이름을 알려주지 않아 얼마나 다행인가. 마뉘엘의 입에서 이실리스의 이름이 나왔다면 그는 질투로 마뉘엘을 베어버릴 수도 있었다. 이실리스의 아름다운 군청색 눈동자가 마뉘엘을 향했다.
“도와주십시오.”
“제가 어떤 도움을 드릴 수 있을지 알 수 없네요.”
마뉘엘에게 확답을 주지 않는 이실리스의 말에 비죽이 미소가 새어 나오는 것을 숨길 수 없었다. 그런 베르타스의 모습에 알뤼르가 혀를 찼다.
“부탁드립니다. 신전에 들어가셔서 안의 상황을 알려주십시오.”
“나오지 못한다고 들었습니다. 그 안에 들어가면.”
이를 갈며 말하는 베르타스의 말에 마뉘엘은 흠칫하면서도 꿋꿋하게 말을 이어갔다.
“모든 지원을 해 드리겠습니다.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든. 저 안에 들어가셔서 나올 수 있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저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제게 알려주십시오.”
“증거를 찾아오라는 말이신가요?”
간단하게 정리해 버리는 이실리스의 말에 제라드가 웃었다.
“너 마음에 드는군.”
“그 소리가 한 번만 더 나오면 나도 가만히 있지 않겠다.”
베르타스의 경고에 제라드는 어깨를 으쓱할 뿐 말을 바꾸진 않았다. 이실리스가 마음에 든다는 그의 말이 진심이라는 듯이. 둘의 대치를 지켜본 마뉘엘이 한숨을 내쉬면서 다시 말했다.
“폐하, 제국의 명운이 걸린 일입니다.”
“이 제국이 나에게 해 준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왜 나는 제국을 지키려고 아등바등해야 하지?”
제라드의 날 선 말에 베르타스가 멈칫했다. 과거의 그가 했던 말과 같은 말을 하는 제라드를 보니 묘한 감각이 그를 휘감았다.
“폐하. 그것이 황제입니다.”
“그게 황제라면 나는 싫다.”
황제이기 때문에 스스로 걸어서 신전으로 들어갔다. 그의 힘이 필요하다는 교황의 말에 따라 움직였고 그는 그가 가진 모든 힘을 빼앗겼다. 신전에서. 문제는 그게 다가 아니었다. 신전 안에서의 모든 기억을 잃어버린 제라드였기에 신전을 벌할 방법도 없었다. 잃었던 기억 때문에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그 기억은 아직도 찾지 못했고 지금에 이르렀다.
마뉘엘의 설명을 들은 알뤼르가 눈을 빛냈다. 이제야 설명이 되었다. 그의 황제가 기억을 잃고 마력을 빼앗긴 이유가. 이그나르도의 흑마법이 분명했다. 이곳의 황제는 흑마법의 마법진 안에서 무력을 빼앗겼을 터였고, 다른 마법으로 기억을 잃었을 것이 분명했다.
‘잠깐, 그럼 폐하와 상황이 다르잖아?’
그의 황제는 신전에 들어간 적이 없었다. 그 말인즉슨, 이그나르도의 흑마법을 마주할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이실리스가 마력과 기억을 잃은 것은 제라드의 상황만으로 설명되지 않았다.
황제의 상황을 들은 이실리스 역시, 원하는 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저들의 말대로 신전에 들어가면.
자신과 상황이 비슷했다. 저 황제의 상황은. 단 하나의 차이는 황제는 신전에 들어갔고 저는 신전에 들어가지 않은 것. 단지 그것뿐이었다. 이곳의 해변에서 눈을 뜨고 이실리스는 모든 것을 잃었다. 분명 무언가가 있었다.
‘그리고 그것만이 아니야.’
신전의 가까이에 다가선 그 순간 그녀의 귓가에 울렸던 그 목소리. 지치고 괴로워하는 목소리. 그 목소리와도 관련이 있다. 확신에 찬 이실리스가 뭐라 말하려 입을 열려던 순간, 그녀의 기색을 눈치챈 베르타스가 그녀를 향해 말했다.
“안 됩니다.”
“왜죠.”
“안 됩니다. 나는 당신을 위험에 처하게 내버려 둘 생각이 없습니다.”
단호한 베르타스의 말에 이실리스의 입이 절로 다물어졌다. 뭐라고 하겠는가 저렇게 애절한 시선으로 저를 바라보는 사람에게. 베르타스에게 차마 제가 가겠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둘의 모습을 보던 알뤼르가 입을 열었다.
“제가 도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대가?”
제라드가 시선을 돌리자 알뤼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신전에서 저의 힘도 탐내고 있으니…… 제가 먼저 들어가 보는 것이 낫겠습니다.”
“나오지 못할 수도 있다고 하지 않나!”
베르타스의 걱정 어린 말에 알뤼르가 빙긋 웃었다.
“베르타스님께서 구해주실 게 분명하니 저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헛소리를!”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베르타스의 기세에 알뤼르가 살살 그를 달랬다.
“에리카님께서 가는 것보다 제가 가는 것이 낫습니다. 먼저 가서 상황을 살피고 그다음을 계획합시다.”
알뤼르의 말에도 베르타스는 내키지 않은 기색이었다. 그것은 이실리스도 마찬가지였다. 불안했다. 그녀가 움직이는 것보다 알뤼르가 움직이는 것이 왜 더 불안할까. 갑자기 몸이 차게 식었다.
“내가 가는 게 낫겠습니다.”
이실리스가 나서서 말했다. 정말 그랬다. 그녀가 간다면 신전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 그 목소리가 있는 신전으로 가게 될 것이라는 운명을 느꼈다. 그렇다면 그녀가 가는 것이 나았다. 어차피 갈 것이라면.
“안 됩니다.”
알뤼르의 말에서 베르타스와 같이 단호한 말이 튀어나왔다. 알뤼르도 베르타스도 이실리스를 신전으로 보낼 수 없다는 의견이었다. 그들을 지켜보던 제라드가 웃었다.
“이거 참, 거기 계신 귀하신 분은 지켜주는 기사들이 아주 많군?”
“한 번 더 비슷한 말을 하면 도움은 없는 것으로 하겠다.”
이를 갈며 베르타스가 말하자 제라드가 싱긋 웃었다. 심각한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싱그러운 웃음이 그를 놀리는 듯해 베르타스의 기분은 저 밑으로 곤두박질쳐졌다.
‘처음부터 끝까지 진지하지 못한 놈이군.’
순식간에 한 나라의 황제를 놈으로 격하시킨 베르타스가 이실리스를 향해 몸을 돌렸다.
“알뤼르가 가겠다고 하는 것에 나도 찬성하는 것은 아니지만 네가 가는 것보다 그가 먼저 가보는 것이 나을 것 같아. 신전 안에서 무슨 일이 생긴다면 너보다 대처를 더 잘할 수 있는 사람은 알뤼르일 테니.”
“그렇습니다. 제가 가는 것이 낫습니다.”
그녀를 안심시키는 둘의 말이 계속 이어졌지만 이실리스의 손끝은 점점 차가워졌다. 불안하고 또 불안했다. 알뤼르를 이렇게 보내서는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방법이 없었다. 신전에서 사람들이 나온다면 그녀는 꼼짝없이 신전으로 가야 했고, 먼저 찾아가자니 아직 확신이 없었다. 신전을 무사히 빠져나올 확신이.
‘그곳에 가면 무언가 변할 거야.’
그것 하나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불안한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알뤼르는 제가 다녀오겠다 나섰고 그것으로 서약의 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며칠 후, 알뤼르는 웃으며 신전으로 향했고 일주일이 지나도록 그의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