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성하! 제발!”
귀족들이 세드릭을 불렀다. 끝도 없이 들어오는 마물들의 움직임에 세드릭이 묘한 웃음을 지었다.
“제 도움이 필요합니까?”
“부탁드립니다, 성하!”
저 멀리 마물들과 맞서 싸우면서 칼을 휘두르는 마뉘엘은 보이지도 않는 귀족들이었다. 마뉘엘 덕분에 목숨을 구한 귀족들이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세드릭의 가벼운 손동작에 마물들이 그 자리에서 ‘픽’ 하고 쓰러졌다. 그 장면을 목격한 귀족들이 보클로엠 만세를 외쳤다. 주신의 이름을 부르면서 눈물을 흘리는 그들의 모습은 신의 재림을 본 듯했다.
‘이거였군.’
신력에 과하게 의지하는 뮤르카 제국의 일면을 보았다. 참으로 무지했다. 거대한 힘에 의지하면 그 힘에 짓눌리게 된다는 것을 왜 모를까. 그 힘을 가진 자가 선한 이라면 상관없지만, 그녀가 본 세드릭은 전혀 선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태도에서도 알 수 있었다.
마물의 등장은 누구라도 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일부러 천천히 귀족들이 그를 부를 때까지 기다렸다. 아니, 베르타스가 그의 기운을 쳐내지 않았다면 그녀를 데리고 이곳에서 사라졌을 것이 분명했다.
‘날 데리고 사라지려고 했어.’
그랬다. 처음 그의 계획은 그것이었다. 이쯤 되니 마물을 풀어 놓은 것도 세드릭이 아닐까 의심스러웠다. 그녀의 의심은 점점 커졌고, 크기를 더한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모든 귀족을 구할 수 있었지만, 세드릭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일부러 사람들을 죽게 내버려 두었다.
‘그래야 제대로 지배할 수 있으니까.’
두려움이라는 것은 사람을 지배하기에 가장 좋은 감정이었다. 두려움의 대상을 없애주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신성시되고 우러러보게 되는 사람이었다. 지금 이곳에서 그 사람은 세드릭. 마뉘엘이 고군분투했지만, 세드릭의 움직임이 번개와 같은 임팩트를 남겼다면, 그의 움직임은 살랑거리는 미풍에 불과했다.
“그럼 신녀에게 다시 질문해야겠군요. 나를 따라서 신전으로 갈 생각이 있습니까?”
일부러 큰 소리로 묻는 세드릭을 보면서 이실리스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마물을 물리치는 순간 연회장의 분위기는 바뀌었다. 황제는 안중에도 없었다. 오직 세드릭만이 그들의 구원자라도 되는 양, 찬양하고 있는 귀족들의 모습에 입을 열 수 없었다. 그녀의 입에서 거절하는 말이 나오면 지탄받을 것은 그녀였으니까.
“왜 말이 없습니까?”
“성하. 주신인 보클로엠은 어떤 신이십니까?”
갑작스러운 그녀의 말에 세드릭은 답을 피했다.
“그게 중요합니까? 저는 신녀께서 저와 함께 신전으로 갈 것인지를 물었습니다만.”
“제겐 중요합니다. 주신께서 어떤 분인지 알아야 저의 인생을 맡길 수 있지 않겠습니까.”
“신전에 들어오면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가지 않겠습니다.”
“오지 않겠다?”
“그렇습니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베르타스가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계속해서 상황을 주시하던 그가 그녀의 위험을 느끼고 곁으로 온 것이었다.
“그 옆에 계신 분도 탐이 납니다만…… 어디서 이런 분들이 나타났는지. 정말 하늘에서 떨어지기라도 한 것 같군요.”
요사스러운 미소를 짓는 세드릭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한 베르타스가 눈을 찌푸렸다.
“그러니 성하. 제게 확신을 주십시오.”
“어떤 확신이면 됩니까?”
“보클로엠께서 제게 어떤 사명을 내리셨는지. 그것을 알려주시면 됩니다.”
사명 따위 있을 리가 없었다. 이실리스는 확신했다. 설령 신이 뭐라 말했다고 해도 그것을 준비하기까지 시간이 걸릴 것이 분명했다. 그럼 그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지금 당장 신전으로 가는 것만 아니면 되었다.
“신녀께서는 아주 영민한 분이군요.”
“칭찬 감사드립니다.”
잠시 생각하던 세드릭의 입이 열렸다.
“조만간 대공저로 신관들을 보내겠습니다. 부디 그때는 거절하지 않기를.”
이번은 봐주지만, 다음은 없다는 그의 말에 이실리스가 웃었다.
“지금도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거기까지. 더 말하면 내가 화가 날 것 같거든요.”
황궁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은 마물을 쓰러뜨린 장본인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달콤하게 웃는 세드릭을 보면서 이실리스는 구겨지려는 얼굴을 애써 다잡았다. 생각보다 심계가 깊은 자였다. 이 정도로 흔들었는데 꼼짝도 하지 않다니.
‘아니, 괜찮아.’
당장 신전으로 가지 않은 것만으로 다행이었다. 그녀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다정한 미소를 짓던 세드릭이 주변을 향해 말했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여러분께 주신 보클로엠의 가호가 깃들기를.”
인사를 남기고 사라지는 세드릭을 향해 성하를 부르짖는 귀족들을 보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다. 난장판이 된 황궁 연회장에서 정신을 차린 마뉘엘이 이실리스와 베르타스 그리고 알뤼르를 데리고 움직였다.
“이쪽으로 가죠.”
연회장 밖으로 나와 기다란 복도를 걸었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마뉘엘의 참담한 기분이 적나라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늘 있는 일이거든요.”
“늘상 있는 일?”
그의 말에 되물은 사람은 베르타스였다.
“그렇습니다. 마물이 등장하고 신전에서는 그들의 신력을 표출해 제국민을 구하고…….”
“그거 잘 짜인 각본처럼 들리는군.”
베르타스의 말이 마뉘엘의 말을 잘랐다. 그의 말에 마뉘엘이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황궁이라고 하지만 신전의 눈이 여기저기 존재하고 있습니다. 조심하셔야 할 겁니다.”
“이미 눈치채고 있는 것 아니었나?”
“그렇습니다만…….”
신전에 위기가 있을 때마다 등장하는 마물.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신전이 권위를 잃을 때나, 사람들이 신전에 들어가서 없어진 사람들에 대해 의구심을 품을 때, 항상 마물이 등장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여자를 신전으로 데리고 들어가기 위한 연극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 연극에 희생된 것은 귀족들이었다. 아니, 고위 귀족들은 하나도 죽지 않았다. 죽은 자들은 연회장 한가운데로 나아갈 수 없었던 하급 귀족들이었다.
‘그들도 이 뮤르카 제국의 제국민인데…….’
한낱 마물에게 죽임을 당했다. 어두 컴컴한 복도를 보면서 마뉘엘은 생각에 잠겼다. 그도 눈치채고 있었다. 베르타스의 말은 하나의 도화선에 불과했다. 그의 결심을 더욱 부채질하는.
‘신전의 뒤를 캔다. 그리고 바꾼다.’
속으로 뇌까리는 그를 베르타스가 바라보고 있었다. 이실리스도 말이 없는 마뉘엘을 보면서 모든 것을 알아차렸다. 신전이 휘두르고 있는 이 제국은 앞날이 보이지 않았다. 힘으로 제국을 다스리는 신전. 그 신전을 제재하지 못한다면 이 제국의 끝은 파멸뿐이었다.
“여깁니다.”
마뉘엘이 멈춰서서 어느 방의 문을 열었다. ‘와장창’하는 소리와 함께 안에서 꽃병이 날아들었다.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고 했거늘!”
뮤르카 제국의 황제. 제라드였다.
“폐하, 접니다.”
안으로 들어서니 방안은 이미 난장판이었다. 마물이 휩쓸고 지나간 연회장과 다를 바가 없는 모습에 베르타스가 속으로 혀를 찼다. 스스로의 감정을 감추지 못하는 자는 지배자가 될 수 없었다.
‘오히려 마뉘엘이 낫군.’
제라드보다 마뉘엘이 황제의 자리에 어울렸다. 아무렇지 않게 다른 나라의 황제를 까내리며 베르타스는 판단을 마쳤다.
“손님들을 모시고 왔습니다.”
“…….”
순식간에 안색을 바꾸는 제라드의 모습은 세태에 따라 태도를 바꾸는 귀족들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었다. 황제의 모습이라고 보기엔 거리가 멀었다.
“폐하.”
아무 말이 없는 제라드를 재촉한 것은 마뉘엘이었다. 그의 말에 제라드가 입을 열었다.
“신전에 가지 않은 것은 잘한 것이었다.”
“…….”
제라드의 말에 이실리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조용히 그의 말을 기다리니 또 무엇이 마음에 든 것인지 환히 웃는 제라드였다.
“그래, 필요 없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 마음에 든다. 교황을 면박 준 것도 마음에 들어.”
“폐하의 마음에 들고자 한 행동은 아니었습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순식간에 표정이 구겨지는 제라드는 한 제국의 황제라고 보기엔 졸렬했다. 그런 그를 다독이며 마뉘엘이 나섰다.
“다행히 손님께서 따라가지 않겠다고 말해준 덕분에 시간을 벌었습니다.”
“시간?”
“그렇습니다. 신전 안으로 들어간 신력을 지닌 사람들의 흔적을 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들을 뭐 하러. 신전이 부른다고 좋다고 들어간 자들인데.”
불퉁하게 말하는 제라드를 달래면서 마뉘엘이 속삭였다.
“그들을 찾아 신전이 숨기고자 하는 것을 알아내야 합니다. 폐하. 오랜 염원 아니었습니까.”
“그렇지. 신전이 가져간 나의 권위를 찾아와야지.”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폐하.”
마뉘엘의 말에 흡족히 웃으면서 제라드가 일행을 훑어보았다. 알뤼르에게 시선이 닿았고, 그의 로브를 보자마자 눈꼬리를 치켜 올렸다.
“저자는 누구인가.”
“손님의 일행입니다.”
“그런데 왜 신관들이 입고 있는 로브를 두르고 있나.”
“그것은…….”
마뉘엘도 알지 못하는 사실이었기에 알뤼르가 나섰다.
“그것은 이 로브가 신물이기 때문입니다.”
“신물?”
“그렇습니다. 이것은 물이 닿아도 젖지 않고 불에 닿아도 타오르지 않는 로브입니다.”
“호오…… 신관들이 가지고 있는 것 외에 이런 것이 있다니. 탐이 나는군.”
정말로 갖고 싶다는 듯 말하는 제라드의 모습에 다들 당황했다. 한 제국의 황제라는 자가 이런 물건을 탐낼 줄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말을 꺼낸 알뤼르의 황당함이 날것으로 느껴졌다.
“아…… 드릴까요?”
“주게.”
어이가 없어서 튀어나온 말이었지만 냉큼 받겠다는 황제의 말에 알뤼르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그의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라드가 그에게 말했다.
“어서 벗게. 주겠다고 하지 않았나.”
“아, 드리겠습니다.”
그 자리에서 로브를 빼앗아 걸치는 제라드를 본 마뉘엘의 얼굴을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더는 빨개질 수 없을 정도로 빨갛게 변한 마뉘엘이 다급하게 베르타스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 폐하께서 원래 물욕이 많으신 분이 아닌데 신물이라…….”
“잘 알겠습니다.”
알만하다는 베르타스의 말에 마뉘엘도 더는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그들의 말이 들리지도 않는지 로브를 걸쳐본 제라드가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이거 정말로 물이 굴러떨어지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