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아직 교황님은 만나지도 못했습니다.”
말이 없는 이실리스를 대신하여 마뉘엘이 입을 열었다. 그의 말에도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는 황제 때문에 모두들 숨을 죽였다.
“그래? 그렇다면 신녀께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저는 신녀가 아닙니다.”
“신녀가 아니라고?”
의외라는 듯 황제가 이실리스를 향해 물었다.
“신녀라고 인정받지 못했으니 신녀가 아니고, 대공저에 머무는 손님에 불과합니다.”
이실리스의 대답이 마음에 드는 듯 입가에 웃음을 띠는 황제였다. 그가 웃자 싸늘했던 복도의 분위기가 풀리면서 다들 웅성거렸다.
“그렇다면 손님께서는 어떻게 하고 싶은 건가?”
“저는 왔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왔던 곳?”
“그렇습니다.”
“그곳이 어디기에?”
“이곳에서…… 아주 먼 곳입니다.”
이실리스의 말에 그리움이 가득 담겨있었다. 기억을 잃은 그녀였지만 늘 그리웠다. 그녀를 아는 사람들이 있는 그곳이 그립고, 그녀를 반겨줄 사람들이 있는 곳이 늘 생각났다. 그들은 그녀를 어떻게 반겨줄까. 그녀의 딸은 그녀를 안아줄까. 그립고도 또 그리웠다.
“손님께서 태도가 아주 확실하시군. 좋아, 마음에 들어.”
한차례의 시험을 넘겼다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마뉘엘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으면서 이실리스가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제가 그녀를 보고 빙긋 웃으면서 손을 내밀었다.
“나는 이 나라의 황제인 제라드 뮤르카. 뮤르카 제국에 온 것을 환영하네. 영애.”
신녀가 아닌 귀족 영애로 대하겠다는 황제의 말에 이실리스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손을 뻗었다. 황제의 손 위로 그녀의 손이 올려지자 귀족들이 손뼉을 쳤다. 환호하는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황제의 에스코트를 받아 연회장으로 들어섰다. 연회장 안에서 기다리던 고위 귀족들은 제라드가 이실리스의 손을 잡고 들어오자 영문모를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제라드가 귀족들을 향해서 입을 열었다.
“여기 있는 이 사람이 신전에서 인정한 신녀다.”
그게 끝이었다. 가타부타 다른 말이 없는 황제를 향해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황제의 권위를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황제에게 고개를 숙이는 귀족들인데 왜 그의 권력이 신전에는 통하지 않는 것인가. 베르타스는 그것이 궁금했다. 이실리스를 끌고 여기저기 인사시키는 그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꾹 참아넘겼다. 아직은 뮤르카 제국에서 벗어날 수 없었으니.
연회장 안의 분위기는 무르익었고 제라드가 이실리스에게 춤을 요청했을 때, 베르타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의 분위기를 눈치챈 마뉘엘이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께서 원래 그러신 분이 아닌데 귀하신 분이 마음에 드나 봅니다.”
마뉘엘의 말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마음에 든다고?’
이실리스가 누구에게나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여자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기억을 잃었어도 그녀의 고고함은 사라지지 않았으니까. 그녀의 고귀함은 사라지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녀의 옆자리는 내 자리야.’
이를 악물고 버텼다. 그에게서 피어나오는 흉흉한 기세에 마뉘엘이 주변을 둘러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다행히 귀족들은 베르타스에게 관심이 없었다. 황제와 춤을 추고 있는 이실리스를 바라보느라.
“괜찮나?”
간신히 기운을 진정시킨 베르타스를 향해서 마뉘엘이 물었다.
“당연히.”
순식간에 갈무리한 그의 기운을 느낀 마뉘엘이 혀를 내둘렀다. 무서운 자였다. 분노를 보인 것은 아주 잠시였고 그 기운을 귀족들이 느끼기도 전에 감추었다.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하긴 소드마스터나 되는 자가 보통의 실력자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지.’
아직도 날 선 시선으로 형을 바라보는 베르타스를 보면서 마뉘엘이 속으로 결심했다. 형님에게 단단히 일러두겠다고.
“교황 성하 드십니다!”
멀리서 들려온 시종장의 목소리에 사위가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긴장감이 감도는 연회장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문이 열리고 새하얀 신관복을 입은 교황이 들어왔다. 황제가 연회장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곳엔 시선도 주지 않은 교황이 이실리스를 향해 걸었다. 황제에게 인사도 올리지 않는 방자한 태도를 지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보클로엠의 사도 교황, 세드릭이라고 합니다. 성녀님의 이름은?”
옆에 있는 황제가 보이지도 않는 듯 바로 그녀에게 묻는 교황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이실리스의 모습에 베르타스가 손을 꽉 쥐었다. 생각보다 거물이었다. 지금 그녀의 옆에 있는 황제보다도 더. 저 거대한 기운에서 느낄 수 있었다. 그의 곁에 있던 알뤼르의 혼잣말이 들렸다.
“저 기운…….”
무언가를 본 듯 허공을 바라보며 소스라치게 놀라는 알뤼르를 본 베르타스가 그의 팔을 잡았다. 아플 정도로 세게 팔이 잡힌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돌렸다.
“뭡니까?”
“정신 차려. 여긴 라르헨이 아니다.”
그의 말에 알뤼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교황의 등장으로 인해 마뉘엘은 황제의 곁으로 자리를 옮긴 지 오래였다. 그가 없었기에 베르타스와 알뤼르는 조금 더 편하게 말을 할 수 있었다.
“저 기운이 뭐지?”
베르타스가 물었다. 그의 물음에 잠시 망설이던 알뤼르가 입술을 꾹 깨물고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며 그를 바라보았다.
“흑마법사인 이그나르도의 기운입니다.”
“이그나르도?”
라르헨에서 들어 본 적이 있었다. 에리카가 위험에 처할 뻔했고, 이실리스가 어렸을 적 납치를 당했을 때, 겪었던 그 흑마법. 마법사의 마력을 뽑아내는 마법진을 개발한 자. 이그나르도. 그의 마법을 사용하는 자는 반드시 척살해야만 하는 라르헨의 주적이었다.
“그렇습니다.”
표정을 굳히고 교황을 바라보는 알뤼르였지만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이곳은 그들의 나라가 아니었다. 새삼 낯선 곳이라는 것이 피부에 느껴졌다. 교황의 기운이 연회장을 압도했고 기운에 짓눌린 사람들은 모두 허리를 숙였다. 그것은 황제라고 해도 예외는 없었다. 그 자리에서 제대로 서 있는 자는 이실리스와 베르타스, 마뉘엘과 알뤼르뿐이었다.
‘의외군.’
마뉘엘도 어느 정도 검을 다루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경지에 다다른 자는 경지에 다다른 자를 알아보는 법이니까. 저 정도 기운에 무릎 꿇지 않는 자라면 최소 소드마스터의 초입에 이르렀다는 뜻이었다. 몸을 숙이지 않는 넷을 본 교황이 흥미로운 미소를 지었다.
“흠, 제가 알기로는 신력을 가진 자가 한 명 더 있다고 들었는데 그게 아니었군요. 저기 계신 저분도 탐이 나네요.”
공손한 어투였지만 그 안에 담긴 뜻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베르타스가 탐난다는 그의 말에 마뉘엘이 소리를 높였다.
“이분은 제 손님입니다.”
“이 나라의 모든 사람은 보클로엠의 뜻을 거스를 수 없는 법. 그것은 대공의 손님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단호한 교황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베르타스를 향했다. 마뉘엘이 분한 듯 표정을 구겼지만, 그도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이 뮤르카 제국에서 교황의 위상이란 그런 것이었다.
‘왜 이렇게까지 몸을 낮추는 거지?’
이해되지 않았다. 신력이 이 나라의 많은 것을 움직이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그게 다였다. 눈으로 보이는 것은 하나도 없었으니 신전의 위상을 느낄 수도 없었다. 그때, 교황이 손을 휘저었다. 순식간에 마뉘엘의 몸이 꺾였다.
그가 무릎을 꿇는 모습을 정면으로 본 베르타스는 눈썹을 꿈틀했다. 마뉘엘 정도 되는 실력자를 단숨에 무릎 꿇렸다는 것은 교황이 보통이상의 기운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이 설명되진 않지만.’
교황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태도에서 알 수 있었다. 그들의 대치를 지켜본 이실리스의 붉은 입술이 열렸다.
“성하께서 제게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세드릭의 시선이 이실리스에게 닿았다. 베르타스는 이실리스의 앞으로 뛰쳐나가려는 몸을 간신히 다잡았다. 이실리스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적나라한 세드릭의 눈동자로부터 그녀를 감추고 싶었다.
“원하는 것?”
“그렇습니다.”
시선을 맞받아치는 그녀의 말간 눈동자에 세드릭이 흥미롭다는 듯 웃었다. 이실리스가 그의 무언가를 자극한 것이 틀림없었다. 입꼬리를 올려 웃은 세드릭이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신의 사도인 내가 성녀에게 원하는 것이라면 단 하나. 그대가 가진 신실함을 증명하길 바랍니다.”
“신실함?”
“그렇습니다. 신께서 주신 힘이니 신에게 당연히 돌려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세드릭의 물음에 이실리스는 답하지 않았다. 그저 계속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둘의 대치를 지켜본 사람들이 모두 숨을 죽였다. 억겁과 같은 순간이 지나가고 이실리스가 세드릭에게 말했다.
“이 힘을 신을 위해 사용하라는 것입니까, 아니면 말 그대로 신에게 돌려주라는 의미입니까?”
그녀의 말에 세드릭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아무래도 두 번째인 것 같군.’
그렇다면 이해가 되었다. 계속 신전에서 그녀를 찾았던 이유가. 그녀의 신력을 노린 것이었다. 그녀의 신력을 신에게 바치라고. 신에게 신력을 바치라는 명목하에 교황이 그녀의 신력을 앗아갈 것이 뻔했다.
‘신력이 아닌 마력이지만.’
이실리스가 가진 붉은 기운은 교황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사이한 기운이 넘쳐흐르는데 어떻게 사람들은 저것을 신력이라고 생각하는 것인지. 이해되지 않았다. 대체 신전에서는 어떤 방법으로 저런 기운을 신력으로 포장한 것인가.
“크와앙!”
그때 별안간 거친 울부짖음이 들리더니 연회장의 벽이 부서지고 괴물이 모습을 나타냈다.
“마물이다! 마물이 나타났다!”
“으악!”
“꺄! 도망쳐요!”
삽시간에 연회장 안은 난장판이 되었다. 이리저리 도망가려는 사람들을 하나씩 손으로 잡아채는 괴물의 모습이 보였다. 비현실적이었다. 이실리스가 시선을 돌리자 세드릭이 입꼬리를 올려 간교히 웃었다. 계략을 띤 그 웃음을 이실리스가 직시할 때 그가 그녀의 손을 낚아챘다.
그리고 곧장 그가 붉은 기운을 일으키려 할 때였다. 베르타스의 검이 그의 기운을 단숨에 갈라버렸다.
가벼운 손짓으로 베르타스의 오라를 무마했지만, 세드릭이 흥미롭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세드릭에게 닿고 세드릭도 베르타스의 시선을 맞받아쳤다.
“소드마스터? 이것 참 놀랍네.”
재미있다는 듯 웃는 그의 모습은 흡사 다른 이의 피를 빨아먹는 흡혈 마물과 같았다. 이실리스는 그의 손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그녀의 마력을 일으켰다. 넘실거리는 붉은 마력을 본 세드릭의 미소가 비틀렸다.
“이것도 흥미롭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