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왜입니까!”
알뤼르의 커다란 목소리에 이실리스가 놀라서 동그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억울한 듯한 그 표정에 이실리스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베르타스님께만 편히 말씀하시고 제게는 왜 그렇게 안 해 주십니까! 제가 싫으십니까?”
목소리를 높이는 그의 말에 베르타스가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지만 알뤼르는 이실리스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제가 얼마나 폐…….”
“알뤼르!”
베르타스의 화난 목소리가 그의 말을 잘랐다. 당황한 듯 입을 다무는 알뤼르를 보면서 이실리스가 물었다.
“폐……?”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더는 말할 수 없다는 듯 표정을 굳히는 베르타스를 빤히 바라보았다. 궁금한 것은 많았지만 제대로 대답해 줄지도 의문이었다. 늘 그랬다. 기억을 잃고 난 후로 베르타스는 늘 그러했다. 무언가를 알고 있으면서도 제대로 답해 주는 것이 드물었다. 마치 그녀가 알게 된다면 무슨 일이라도 날 것처럼 입을 다물어 버리고 알뤼르의 말을 막았다.
그것이 서운했다. 많은 것을 알게 된 지금에 와서도 똑같은 상황이 계속 반복되자 의심이 들었다.
‘대체 뭐지?’
분명 더한 것을 숨기고 있었다. 그녀가 알게 되면 큰 충격을 받을 만한 것을.
기분이 상한 듯한 이실리스를 달래듯 베르타스가 말했다.
“준비되면 알려줄게. 너에게 가장 먼저 알려주겠어. 그러니 지금은…… 묻지 말아줬으면 해.”
“내가 준비되어야 한다는 소리인가?”
“그래.”
아직 너는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베르타스의 말을 귀로 흘려들으면서 이실리스가 눈을 감았다. 그녀의 모든 것은 아직 의문투성이였다. 그나마 마력을 얻었고, 그것으로 인해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그가 나의 남편이라는 것은 알지만…….’
그것 외에 다른 것은 알지 못했다. 그녀를 기다리기만 할 뿐 무언가를 하지 않는 베르타스의 모습에 이실리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러지?”
“왜 그대는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거지?”
“…….”
그녀의 물음은 많은 것을 담고 있었다. 그 안에 담긴 것을 알아챈 베르타스는 다시 입을 다무는 쪽을 택했다. 그의 방어적인 태도에 이실리스가 표정을 굳혔다. 언제나 반복되는 똑같은 상황을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사실대로 말해. 나는 누구고 너희는 어디서 온 거지?”
“사실대로 말하면 믿어 줄 건가?”
“너와 내가 혼인했다는 말도 믿었는데.”
알뤼르가 놀란 표정으로 베르타스를 바라보았지만, 그도 그녀도 알뤼르에게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좋아.”
베르타스가 가볍게 말했다.
“너는 라르헨에서 온 사람.”
“라르헨?”
“그 나라는 여기서 아주 먼 곳이야. 저기 보이는 바다를 건너야 하는 곳이지.”
이 자그마한 나라 따위와 차원이 다른 곳이었다. 라르헨은.
“나의 시작은 라르헨이 아니었지만, 마지막은 라르헨이 되었다. 너 때문에.”
“나 때문에?”
“네가 그곳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나는 나의 나라를 버리고 너를 택했어. 이실리스.”
그는 그녀가 원한 답을 들려주지는 않았다. 그러나 묵직하게 전해오는 베르타스의 진심을 느끼자 더 캐물을 수 없었다. 일부러 이런 말을 꺼낸 것이 분명했지만 속아주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를 향한 베르타스의 진심을 들었으니.
“치사하네.”
“칭찬으로 듣지.”
한 손을 가슴에 대면서 그녀에게 허리를 숙이는 기사의 인사를 한 베르타스가 고개를 들었다. 그 모든 것을 본 이실리스가 다시 그에게 말했다.
“어물쩍 넘어가는 것은 이번 한 번뿐일 거야.”
“부디 다음엔 내가 모든 것을 말할 수 있기를.”
이실리스를 바라보면서 빙글거리는 베르타스를 향해 알뤼르가 항의했다.
“불경한 행동은 하지 마십시오.”
“불경?”
이실리스의 물음에 알뤼르가 냉큼 답했다.
“지금 속고 계시는 겁니다. 저기 저 사람은 이실리스님보다 신분이 낮은 자. 저 베르타스를 거두어서 휘하에 둔 것은 이실리스님입니다.”
“거두어?”
“이실리스님이 아니었다면 죽을 수도 있는 자였습니다.”
“나의 남편이라고 하지 않았나?”
베르타스를 향해 묻는 말에 알뤼르가 나서서 대답했다.
“데릴사위입니다!”
“데릴사위?”
그게 뭐냐고 묻는 그녀에게 알뤼르가 신이 나서 설명했다. 그의 말을 다 들은 이실리스가 베르타스를 향해 눈을 빛냈다.
“우리 집안에 들어왔다고?”
“그렇습니다. 이실리스님! 쉽게 말하면 저자가 굴러온 돌이고 제가 박힌 돌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제게도 말을 편하게 해 주십시오!”
‘결국, 저 소리를 하려고 그 긴말을 한 거였나.’
알뤼르의 구구절절한 말을 들은 이실리스가 웃었다. 그녀의 웃음을 본 알뤼르가 결심했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저는 반드시! 제게도 편하게 이야기하신다는 확답을 들어야겠습니다.”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그녀에겐 존댓말을 사용하는 것이 더 어려웠다. 귀족 영애의 화법을 구사하느라 어려웠는데 편히 말해 달라니. 베르타스보다 편하진 않았지만, 가끔 튀어나오는 짤막한 말들을 막느라 일부러 말을 느릿하게 했다. 그보다 나을 것이라고 생각한 이실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이게 감사할 일인지 모르겠다. 복잡미묘한 이실리스의 표정에 베르타스가 나서서 정리했다.
“그럼 다 된 거군.”
그녀가 원한 것은 하나도 이루어내지 못한 채, 대화는 끝나 버렸다. 벌써 몇 번째인가. 이상하게 베르타스에게만 제 주장을 뚜렷하게 펼칠 수 없었다.
‘왜지?’
그가 말한 대로 그와 그녀는 부부인 것 같았다. 그러니 자기주장이 강한 그녀도 베르타스에게는 한 수 양보하는 것이겠지.
‘그렇군.’
수긍한 이실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을 참아넘길 수는 없었지만, 아직 시기가 아닌 듯해 더 묻지 않는 것이었다.
“참, 마력을 운용하실 줄 아시니 이제 마력을 모으는 게 좋겠습니다.”
“마력을 모아?”
“그렇습니다. 마력은 모이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하는 것. 기억을 잃기 전에도 대단한 마법사였으니 앞으로도 더 대단한 마법사가 될 수 있을 겁니다.”
확신하는 알뤼르의 말에 문득 궁금해졌다. 기억을 잃기 전의 그녀 자신은 어느 정도 수준의 마법사였을까. 저렇게 빛나는 눈을 하고 바라보는 알뤼르를 보니, 제가 대단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의 눈에 반짝이는 기대감에 이실리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것은 이전의 그녀였지 지금의 그녀가 아니다.
“대단한 마법사가 되지 않아도 좋아.”
베르타스의 목소리가 그녀의 마음을 흔들었다.
“나는 그대가 대단한 마법사라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야. 그대는 그냥 그 자체로도 아름다운 사람이니 거기까지 신경 쓰지 않아도 좋아.”
“그래도 괜찮다고?”
“그렇다고 해서 네가 이실리스가 아닌 것은 아니니까.”
“지금의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고 할 정도로 이전의 나와는 다른 것 아닌가.”
“변한 것은 없어.”
확신을 담아 말하는 베르타스의 말에 이실리스의 입이 다물렸다.
“나의 이실리스는 쟈스민 차를 좋아했지. 그건 지금의 너도 그렇지 않나?”
베르타스의 말에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의 이실리스는 사색에 잠기는 것을 좋아했어. 그것은 너도 마찬가지.”
“그것은……!”
“쉬이, 나의 이실리스는 책을 읽는 것도 좋아했지. 가끔 우리의 딸아이에게 즐겁게 본 책의 이야기를 들려줄 만큼.”
“…….”
“나의 이실리스는 꾸미는 것을 귀찮아하는 사람. 지금의 너와 하나도 변한 것이 없어.”
마음을 강하게 울리는 베르타스의 말에 이실리스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느낄 수 있었다. 그에게 들릴 정도로 세차게 가슴이 뛰었다. 저런 사람이었다니. 제가 저런 사람과 함께 앞날을 바라보고 있었다니. 벅차오르는 마음을 감출 길이 없어 입가에 절로 꽃처럼 미소가 피었다. 환히 빛나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본 베르타스도 마주 웃었다.
“그러니 이실리스. 너는 변한 것이 없다.”
베르타스는 아무 말이 없는 이실리스를 보면서 생각했다. 그녀가 마력을 잃은 것, 기억을 잃은 것은 기회였다. 저는 비겁자였다. 이실리스가 마력을 회복하더라도 이전과 같은 힘이 없기를 바라는 저는 저열한 사람이었다. 그녀가 그와 에리카만을 생각했으면 좋겠다.
라르헨이라는 제국을 짊어지고 있는 그녀의 어깨는 얼마나 무거웠던가. 기억을 잃고 마력을 잃은 그녀는 조금 자유로워 보였다. 늘 무언가를 내주어야만 했던 과거와는 달랐다. 지금의 그녀는 온전히 그의 사람. 라르헨과 나누지 않아도 되었다.
‘하필이면 경쟁상대가 국가라니.’
이처럼 어이없는 상황이 또 있겠는가. 언제나 이실리스의 머릿속을 차지하고 있는 라르헨이라는 제국을 밀어낸 작금의 상황이 마음에 들었다. 이제 그녀는 더는 라르헨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와 그녀의 딸, 에리카만을 생각할 뿐이었다.
그래서였다.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라르헨의 황제라는 사실을. 사실을 알려준다면 또 라르헨에 대한 생각에 빠져 지낼 것이 분명하니까.
‘그러면 나는 또 밀려나게 되겠지.’
기억을 잃은 이실리스는 가엽고도 또 가여웠지만 강인하고 또 강인한 사람이었다. 기억을 잃어도 변함없는 그녀였기에 베르타스는 말할 수 없었다. 그녀가 라르헨의 황제라는 사실을. 다시 제국에게 그녀를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마력을 더는 제국을 위해 사용하지 않아도 되고, 더는 많은 것을 책임지려고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게 만족스러웠다.
‘피곤해하지 않는 게 제일 좋아.’
이실리스는 늘 피곤해했다. 결계가 그녀의 마력을 야금야금 앗아갔기 때문이었고, 하루가 멀다 하고 올라오는 상소에 밤잠을 설치는 경우도 허다했다. 이 모든 것을 내려놓은 그녀는 얼마나 편안해 보이는지. 이 모습이 좋아서 베르타스는 꿈을 꾸었다. 그게 비록 한낱 백일몽에 불과할지라도 꿈을 꾸었다.
‘네가 황제가 아니라는 꿈을.’
그 꿈이 현실로 이루어진 지금, 베르타스에게 남은 것은 희열이었다. 그 희열에 빠져 중요한 것을 잊었다. 이실리스의 책임감. 베르타스는 그것을 너무 가벼이 보았다.
‘나는 몹쓸 놈이야, 이실리스.’
기억이 돌아온다면 나를 욕하고 모든 책임을 나에게 돌리기를. 네가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으니. 이 모든 것은 나의 욕심일 뿐이니.
제 앞에서 웃고 있는 이실리스를 보면서 베르타스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녀의 기억이 돌아오지 않기를. 아니, 기억이 돌아오는 순간이 아주 먼 미래이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