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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화. (106/161)

105화.

자신이 가진 이 붉은 기운은 무엇인지를. 그 기운이 조금씩 커지는 것도 알고 있었다. 제대로 다룰 수 없는 이 기운은 양날의 검이었지만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 나았으니까, 좋게 생각하려 했다. 하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하려다가도 이 기운 때문에 신전에서 그녀를 노리고 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왜 힘을 가진 사람들을 굳이 신전으로 모으려는 거지?’

그게 맞는 행동이긴 했다. 신관이 되도록 신전으로 불러들이는 것이. 그러나 의문이 하나 있었다. 신전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아무도 나오지 못한다는 것. 기운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밖으로 돌려서 신전의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하도록 하는 것이 맞다. 지금처럼 신전 안에 꼭꼭 숨겨 둘 것이 아니라.

‘신전 안에 들어가야만 알 수 있는 것인가.’

이대로 신전에 들어가지 않을 수 있도록 한 것도 마뉘엘의 배려였다. 이번 일로 인해서 그가 희생한 것을 들은 이실리스는 그에게 미안하고 또 고마웠다. 물론 마뉘엘은 그것을 대가로 소드마스터인 베르타스의 힘을 빌리기로 했다는 것을 이실리스에게 알리지는 않았지만.

“그래서 이번 황궁 연회에 참여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황궁 연회?”

갑자기 들린 마뉘엘의 말에 이실리스가 되물었다.

“그렇습니다. 황궁에서 신녀의 탄생을 축하하는 연회를 연다고 합니다.”

“꼭 가야 하는 건가?”

날 선 베르타스의 말이 들렸다.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폐하께서 신녀님을 뵙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기울어가는 황제지만 이 제국을 다스리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의 말을 무시해서 좋을 것이 없었다. 이실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동의를 얻어낸 마뉘엘이 베르타스를 향해 말했다.

“황궁에서의 호위를 부탁드립니다.”

“신분도 모르는 나 같은 자가 황궁에 들어갈 수 있나?”

“대공인 제가 보증하는 사람인데 함부로 신분패를 내놓으라고 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럴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마뉘엘의 설명이었다. 그의 사람에게 신분패를 내어놓으라고 말하는 순간, 신전 쪽의 사람들이 자유롭게 황궁을 드나드는 특권을 박탈당할 수도 있으니까. 뮤르카 제국의 황궁은 라르헨의 황궁보다 열려있는 곳이었다.

“불순분자들이 드나들지는 않나?”

“그렇게 쉽게 드나들 수는 없을 겁니다.”

“왜지?”

“황제께서 친 신전 파라서요.”

마뉘엘의 말에 모두 놀란 눈을 떴다. 황제가 신전을 가까이한다니.

“그것을 믿고 신전에서 저리 날뛰는 겁니다.”

그것만이 아니었지만 마뉘엘은 입을 다물기로 했다. 신전의 신력은 제국에서 어쩌지 못할 정도로 대단한 위상을 떨치고 있다는 사실을 굳이 말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사실 지금의 황제도 신전 쪽으로 기울어 있기는 하지만 아예 그쪽으로 넘어간 것은 아니었다. 그의 형은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니 조카를 내게 보낸 것이겠지.’

황궁에 신전의 스파이가 너무나도 많아 조카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었다. 매번 시커멓게 변하는 시약을 볼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라는 조카를 두고 볼 수 없어 그의 집으로 데려온 것이었다. 대공저에 신전의 끄나풀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데려오지 않았을 테지만 대놓고 독을 사용하는 황제궁보다는 나았으니까. 다행인 것은 그의 형에겐 해독기능을 할 수 있는 신물이 있다는 것이었다.

“날짜는 언제인가요.”

이실리스의 말에 마뉘엘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일주일 후입니다.”

시간이 촉박하니 준비할만한 사람을 보내겠다는 말을 남긴 마뉘엘이 방을 나서자마자 알뤼르도 방 밖에서 대기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밖으로 사라졌다. 두 사람이 사라지자마자 베르타스가 입을 열었다.

“이실리스.”

“왜 부르지?”

말을 편하게 하라고 한 그 덕분에 어색함 없이 말할 수 있었다. 무언가 불만 어린 표정으로 그녀에게 말을 건네는 그를 보니 심기 상하는 일이 있었던 듯했다.

“나는 그대가 다른 이들에게 친절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친절?”

“그래. 친절.”

대체 그녀가 누구에게 친절했다는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영문모를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자 베르타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너는 알지 못하겠지만 나는 그대의 시선이 닿는 모든 것을 질투해.”

기시감이 들었다. 이와 비슷한 대화를 전에도 나누었던 것 같은 느낌. 묘한 느낌에 사로잡힌 이실리스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자 베르타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에게만 다정했으면 좋겠어.”

“아직은…… 어렵군.”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그를 보면서 이실리스가 빙긋 웃었다.

“그렇게 웃음 한 자락이어도 좋아. 나는 너를 사랑하니까. 기억을 잃은 너에게 강요할 수는 없겠지.”

“…….”

베르타스를 볼 때마다 이실리스는 혼란스러움에 사로잡혔다.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느낌이었다. 분명 그는 그녀에게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녀와 그가 혼인을 치렀고 아이도 있다고 하였으나 와닿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이 아릿하고 아팠다. 베르타스는 그녀에게 그런 사람이었다.

“아직도 난 그대를 잘 몰라.”

이실리스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에 베르타스가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저를 직시하는 검은 눈동자에 빠져드는 것을 느끼면서 이실리스가 다시 속삭였다.

“그러니 내게 시간을 주겠어?”

“당연한 소리를 하는군. 평생이라도 기다릴게.”

“평생이라도?”

“…… 그건 조금 기니까. 음…….”

고민하는 베르타스의 얼굴에 이실리스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소리높여 웃는 그녀를 보면서 베르타스도 빙긋 웃었다. 황궁 연회에 대한 걱정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의 웃음만이 그녀의 눈에 맺혔다. 참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웃는 것이 어울리는. 강인한 그에게 어울리는 말은 아니었지만 이실리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마치 흑요석같이 빛났다.

“황궁 연회는 같이 갈 수 있겠군.”

그의 말에 이실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믿을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장소에 베르타스가 뒤를 지켜준다는 사실이 든든했다. 믿음직스러운 그를 바라보던 그녀가 갑자기 떠올랐다는 듯 그에게 물었다.

“황궁에 들어가게 되면 돌아가기가 더 어려운 것 아닌가?”

“그럴 수도.”

“그러면…….”

“걱정은 하지 않았으면 해. 아무 생각 말고 마력을…….”

“마력?”

갑자기 튀어나온 베르타스의 말에 이실리스는 무언가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어렴풋이 알 듯 말 듯 한 무언가. 생각에 빠진 그녀를 방해하지 않고 베르타스는 입을 다물었다. 지금이 마법사에겐 가장 중요한 순간일 수 있으니.

‘마력이라니 그럼 내가 가진 힘이 신력이 아니라고? 신에게서 나오는 힘이 아니라고?’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었다. 지금까지 힘의 본질을 잘못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와닿자 마음이 달라졌다.

‘처음부터 틀린 생각이었어.’

그랬다. 마력과 신력은 엄연히 다른 것. 아예 본질이 다른 둘을 같다고 생각했으니 당연히 자유롭게 다룰 수 없는 것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이실리스의 몸에서 붉은 기운이 휘몰아쳤다. 그녀의 것이었던 붉은 마력이 그녀의 주변을 감쌌다. 베르타스는 주변에서 경계를 섰다. 깨달음을 얻는 마법사를 함부로 건드리면 마력 충돌이 일어날 수도 있으니까.

밖에 서 있던 알뤼르도 무언가를 느꼈는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실리스의 주변에 휘둘러진 붉은 연무를 바라보던 그가 놀란 눈으로 베르타스에게 물었다.

“벌써 마력 운용법을 깨달으셨다고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단지 그녀가 가진 힘이 신력이 아니라 마력이라고 했을 뿐.”

그의 말에 알뤼르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실리스를 주시했다. 그의 황제는 태어날 때부터 마력을 다룬 사람. 역대 황제 중 누구보다도 마력 운용력이 뛰어난 그녀였다. 처음이 어려울 뿐, 일단 다루기 시작하면 누구보다도 빠르게 발전할 가능성이 있는 그의 황제. 그녀의 발전하는 과정을 눈앞에서 지켜본다는 사실이 그를 설레게 했다. 붉은 연무는 점점 짙어지더니 순식간에 그녀의 몸 안으로 사라졌다. 경탄 어린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알뤼르는 숨도 쉬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경하드립니다!”

이실리스가 눈을 뜨자 가장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은 알뤼르였다. 몸 안에 흐르는 마력은 그녀를 사로잡았다. 그러나 뭔가 이상했다.

“이게 전부가 아니야.”

이실리스의 혼잣말이 방안을 흘렀다. 그 말을 들은 알뤼르도 베르타스도 입을 다물었다. 이제 막 마력의 운용법을 익힌 사람에게 너는 대마법사였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으니.

“이게 아니야.”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가 본디 가지고 있었던 것에 비해 한참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이 채워지지 않은 느낌. 그 느낌에 이실리스는 눈을 감았다. 더 필요했다. 더 있어야 했다. 이 정도의 마력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부족해.”

반짝 빛나는 이실리스의 눈을 바라본 알뤼르가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황제였다. 그가 모시던 황제. 그의 우러름을 받을 정도로 대단한 마력을 지니고 있던 그의 황제가 다시금 그 마력을 탐내기 시작했다.

“이제 시작입니다.”

알뤼르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이실리스의 고개가 돌아갔다.

“마력 운용법을 깨달으셨으니 곧 더 큰 것을 손에 쥘 수 있으실 겁니다. 너무 조급해하지 마십시오.”

“이미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괜찮습니다. 그로 인해 얻은 것도 있으시지 않습니까.”

이실리스를 다독이는 듯한 알뤼르의 말에 그녀가 불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입 밖으로는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애써 수긍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이실리스를 보면서 알뤼르가 다시 운을 떼었다.

“그리고 말씀 편하게 하십시오. 저보다 높으신 분이시니까요.”

“높으신 분?”

그녀의 물음에 답한 사람은 베르타스였다.

“당연하지 않나. 알뤼르가 나의 아래인데.”

“아래?”

베르타스의 말에 알뤼르의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 그에게 말을 낮추도록 해.”

“말을 낮추라고?”

“그래.”

이실리스의 황망한 표정을 본 베르타스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베르타스에게 말을 낮추기는 쉬웠는데 알뤼르에게 말을 낮추는 것은 어려웠다. 기대 어린 눈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는 알뤼르의 표정을 보니 더욱 그러했다. 반짝이는 눈동자가 저러할까. 과한 표정과 시선에 차마 그를 똑바로 보지 못하고 베르타스를 향해 말했다.

“나중에 그렇게 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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