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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화. (105/161)

104화.

알뤼르의 말에 따라 자연스럽게 움직여보려 했으나 쉽지 않았다. 애쓰던 그녀가 마력을 진정시키지 못하자 베르타스가 오라를 일으켰다. 그의 오라와 이실리스의 마력이 섞여 들어갔다. 소드마스터의 존재 맹세를 했던 베르타스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실리스의 기운을 이끌어 그녀의 밖으로 빼낸 그의 앞에 붉은 마력이 둥둥 떠다녔다.

그 모습을 지켜본 알뤼르가 원을 이룬 붉은 마력을 그의 마력으로 감싸 자그마하게 만들었다.

“이건 제가 잘 가져다가 마력석으로 만들겠습니다.”

웃으면서 방 밖으로 사라지는 알뤼르를 바라보던 이실리스는 강한 힘에 끌려 당겨졌다. 베르타스였다. 그녀의 허리에 닿아오는 뜨거운 손이 느껴졌다. 익숙하고도 익숙했다. 그래서 물었다.

“날…… 아니, 내가 네가 찾는다는 그 사람인가?”

그녀의 물음에 베르타스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짙은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에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은 흔들리고 있었다. 그 시선에서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그녀를 알았고, 그가 찾고 있는 사람은 그녀가 맞았다.

“…… 맞아.”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에 이실리스가 눈을 감았다. 그랬구나. 나에게 아이도 있었고, 미래를 함께하는 사람도 있었구나.

“혼자가 아니었어.”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온 조그마한 속삭임에 베르타스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넌 혼자가 아니야.”

“아니었어.”

“내가 있었어.”

“혼자가…….”

“아니야.”

베르타스의 말에 이실리스는 눈을 감았다. 다시 강하게 끌어안는 그의 팔을 느끼면서 눈을 감았다. 이 낯선 곳에 떨어져서 혼자 얼마나 외로웠던가. 그녀의 보호자를 자처하는 마뉘엘이 있었지만, 그는 그저 낯선 이일 뿐이었다. 그녀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누구지?”

“너는 이실리스.”

“그게 다인가?”

“내가 사랑하는 여자.”

“그게 다인가?”

“내 아이의 엄마.”

“그게 다인가?”

“너에게 알려줄 수 있는 것은 지금은 이것뿐. 더는 말해줄 수 없어.”

그게 전부냐고 묻는 그녀에게 베르타스는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와 그녀의 아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아이는?”

“아이의 이름은 에리카.”

“에리카?”

“그대가 말했던 이름이지.”

아이의 이름이어서 기억에 남았던 것이었다. 그녀의 기억에 유일하게 존재하고 있던 그 이름. 그래서 본인의 이름인 줄 알았던 그것. 이실리스의 눈에서 한 방울 눈물이 떨어졌다. 그녀의 눈물에 당황한 베르타스가 그녀의 눈가를 쓸었다. 안절부절못하며 어쩔 줄 몰라 하는 덩치 커다란 남자의 모습은 이실리스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자신이 기억도 못 하는 딸아이가 가엽고도 가여워서 눈물이 흘렀다. 

‘나의 잃어버린 기억을 어찌해야 하는가.’

참담했다. 아픈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실리스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베르타스는 그것이 진주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아름다운 진주의 탄생 뒤에 남들은 모르는 고통이 있는 것처럼, 이실리스의 눈물 역시 지난날의 아픔을 품고 있는 것만 같았다. 베르타스는 이실리스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보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아름답고도 아름다운, 그러나 아프고도 아픈. 그게 지금의 이실리스 라르헨이었다.

‘나도 미친놈이로군.’

아파하는 이실리스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는 저 자신을 그렇게 판단했다. 그뿐이랴, 울고 있는 저 모습을 보니 깊게 입 맞추고 싶은 이 마음을 어찌해야 하는가. 저 눈물을 보면서 그런 생각만 하는 저는…… 이실리스에게 미쳐있었다.

‘어찌해야 하는가.’

베르타스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생각을 거듭해도 결론은 하나였다. 지금의 이실리스에게 그녀가 라르헨의 황제라는 사실을 알릴 수 없었다. 이실리스가 울도록 내버려 두었다. 지금 그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으니. 다만 그녀가 편히 울 수 있도록 그의 너른 가슴을 빌려주는 수밖에.

어느 정도 진정이 된 듯 이실리스의 훌쩍임이 줄어들었다. 그녀가 우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늘 강인한 그녀였는데 이런 모습을 보게 되다니.

“괜찮은가?”

“이제 좀 놓아줬으면 하는데.”

“…… 자.”

울음을 달랜다는 핑계로 등을 쓸어내리고 허리를 쥐고 있었는데 아쉬움에 미적거리는 그를 알아챈 이실리스의 말에 그녀의 몸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고마워요.”

“그 말투 너무 어색하군.”

베르타스는 저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말을 막을 수 없었다. 제가 말해놓고도 아차 싶었지만 말해주고 싶었다. 제가 모르는 그녀를 보는 것 같아 마음에 들지 않던 차였다. 그의 말에 이실리스가 입을 열었다.

“그러면?”

“그냥 원하는 대로 말해도 될듯한데. 나와 있을 땐.”

그래, 그랬으면 좋겠다. 그와 그녀의 사이에 특별함이 있었으면 좋겠다. 아니, 평상시의 그것. 그가 원하는 것이었다. 그녀가 세간의 시선에 휘둘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실리스는 그저 그런 귀족 영애가 아니었으니.

“원하는 대로?”

그녀의 물음에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의 얼굴을 보고 무엇을 느꼈는지 이실리스의 기세가 변했다.

“원한다면.”

“좋아.”

훨씬 고압적인 태도가 된 그녀를 보면서 베르타스가 만족한 듯이 웃었다. 이게 이실리스 라르헨이었다. 그가 사랑하는. 

“그럼 이제 뭘 하면 되는 건가.”

“아무것도.”

“아무것도?”

“돌아가야지.”

“돌아가?”

“그래.”

쉽게 이실리스를 놓을 것 같지 않았다. 교황이라는 자가. 그녀가 마력 운용법을 기억해 내는 것이 제일 중요했다. 바다를 건너서 라르헨까지 닿으려면 그녀의 마력과 알뤼르의 마력이 모두 필요했다. 통신석을 들고 있었지만 무슨 이유인지 작동하지 않았다. 페일러스에게 연락을 해보려 여러 번 시도했지만 작동하지 않아 실패하기를 수십 번, 알뤼르도 베르타스도 포기했다. 중요한 것은 연락이 아니라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었다.

“언제 가려고 하지?”

“적당한 때를 봐서.”

마뉘엘이 그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에겐 이실리스가 더 중요했다. 도움은 라르헨에 돌아가서도 줄 수 있었으니 베르타스는 우선 돌아가기로 했다. 그의 이 결정이 나중에 어떻게 되돌아올 줄 모르고서.

* * *

베르타스와 이실리스의 분위기가 변한 것을 알뤼르가 눈치챘다. 묘한 눈으로 웃는 알뤼르를 보면서 베르타스는 표정을 굳혔다. 차마 그의 황제에게 직접 묻는 불경을 저지를 수 없었던 알뤼르가 베르타스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어떻게 되긴.”

“좀 자세히 말해주십시오.”

“알아서 뭐 하려고.”

이실리스가 마뉘엘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 방에 들어가 있는 동안 둘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역시 폐하는 대단하십니다.”

“그 입!”

알뤼르의 말에 베르타스가 경고하듯 말했다. 그의 호통에 흠칫한 알뤼르가 입을 꾹 다물었다. 당황한 알뤼르에게 한숨을 내쉰 베르타스가 그의 어깨를 잡아끌었다.

“허튼소리 때문에 이실리스에게 피해가 간다면, 자네여도 베어버릴 거야.”

“제가 그럴 리 없습니다.”

절대 황제께 누가 되지 않을 거라고 말하는 알뤼르를 믿지 못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을 마주하는 알뤼르에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제 슬슬 떠날 때가 된 것 같군.”

“라르헨으로 돌아가는 겁니까?”

“이실리스가 마력을 제대로 운용할 수 있으면.”

“잠수정을 타고 갑니까?”

“그건 어려울 것 같고…… 일단 이곳을 떠서 해상제국에라도 들어가야겠어.”

이곳에 계속 있으면 이실리스에게 어떤 위협이 닥칠지 모른다는 것이 베르타스의 생각이었다. 신전, 신력을 노린다는 신전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이곳에 들어온 마법사들이 돌아오지 못했다는 페일러스의 말도 걸렸다. 이실리스에게 그런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그렇다면…… 기회를 노려보겠습니다.”

“나 또한.”

둘의 대화를 듣고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들어오십시오.”

안에서 마뉘엘의 목소리가 들렸다. 베르타스와 알뤼르는 서로 눈짓을 주고받더니 방 안으로 들어갔다. 이실리스와 마뉘엘의 심각한 표정에 절로 얼굴을 굳히는 둘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아무래도 집안에 배신자가 있는 것 같습니다.”

마뉘엘의 말에 베르타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사실은 이미 그도 알고 있었다. 집안 관리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대공이라니. 이 제국에서 그의 위상을 알만했다. 그러나 베르타스는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어차피 길지 않을 인연이니까.’

그렇게 생각했다. 이실리스에게 피해가 가기 전까지는. 사람을 잘못 다루어서 대공저 안으로 신전의 사람들이 드나들게 한 것은 그의 실책이 컸다. 못마땅한 눈으로 마뉘엘을 바라보는 베르타스의 시선을 느낀 그가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부족한 탓입니다.”

“아니, 아니에요. 어차피 한 번은 일어날 일이었습니다.”

그를 감싸는 것은 이실리스였다. 그녀의 태도에 베르타스의 속에서 불길이 일었다. 그것은 커다랗고 멈출 수 없는 질투라는 불꽃이었다. 나의 사람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자 나의 여자. 그런데 그의 앞에서 다른 남자를 감싸는 이실리스를 보자니 속이 뒤틀렸다. 순식간에 차게 변한 방안의 분위기를 느낀 알뤼르가 서둘러서 나섰다.

“그럼 누구인지 알아내셨습니까?”

“기사단장입니다.”

“기사단장?”

마뉘엘의 말은 이러했다. 기사단장은 본디 충성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가 황궁에서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그러나 그가 황궁에서 나오자 그의 동태를 황궁과 신전에 보고하는 사람으로 돌변했다.

“그렇다면 왜 신전 쪽으로 넘어갔는지는 알 수 없습니까?”

“원래도 신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신전의 위세가 대단하긴 하군요.”

알뤼르의 말에 마뉘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력에서 나오는 위세이기에 어떻게 할 방도가 없습니다.”

‘신력이라…… 이곳에서의 신력은 제가 가진 기운과 같은데, 그 두 개가 다른 것인가 아니면 같은 것인가.’

이실리스는 마뉘엘의 말을 듣고 생각에 빠졌다. 그들이 말하는 신력이라는 것이 정말로 신을 모시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라면 그녀에게 있는 힘은 무엇일까. 신을 믿지 않는 그녀였기에 이실리스는 진정으로 궁금했다. 그녀가 가진 기운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이것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다면 뭔가를 알게 되는 것인가.’

그것이 궁금했다. 마뉘엘과 알뤼르의 대화가 이어졌지만 이실리스는 자기만의 생각에 빠져 뭐라고 말하는지 들을 수 없었다. 계속해서 생각하고 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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