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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화. (104/161)

103화.

신전의 신관들이 앞으로 나서자 대공이 문서를 꺼내 들었다.

“황제 폐하의 칙령입니다.”

“무슨 헛소리를!”

“신녀님을 황궁으로 데려오라는 칙령입니다.”

“그 짧은 시간에 황궁에 다녀오다니! 말이 안 됩니다!”

황제의 칙령을 접한다기엔 너무나도 방자한 태도로 홱 낚아채는 여신관의 태도에도 마뉘엘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칙령에 황제의 인장이 찍힌 것을 확인한 여신관이 분한 듯 입술을 짓씹었다.

“그래서 어디로 간다는 거죠?”

“폐하께서 명하신 대로 황궁에 먼저 들렀다가 신전으로 모셔야죠. 신녀께서 신전에 들어가실 때는 많은 분이 함께하실 것 같습니다. 다른 귀족분들도 신녀님께 관심이 많아서요.”

어깨를 으쓱하며 말하는 대공의 말에 여신관이 애써 표정을 바로 했다.

“성하께서 아시면 큰 곤욕을 치를 겁니다. 대공.”

“신의 자비를 베푸는 신전, 거기다 그곳의 제일 높은 사람인 교황께서 그렇게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좋아요.”

졌다는 듯 양손을 들어 보이는 여신관의 앞을 베르타스가 막아섰다. 여신관의 시선에서부터 이실리스를 숨긴 그가 날카로운 눈으로 여신관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을 넘기면서 여신관이 경고하듯 말했다.

“이게 끝이라고 생각하진 마세요.”

“그건 당연한 소리를. 이쪽도 마찬가지니까.”

숨겨둔 한 수가 있다는 듯 말하는 마뉘엘의 말에 눈썹을 꿈틀하는 여신관이었다. 그녀가 신관들과 함께 신전으로 들어가자 커다란 신전의 문이 닫혔다.

“괜찮습니까?”

베르타스가 이실리스를 향해 물었다. 그의 물음엔 답하지 않으면서 그녀가 마뉘엘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거죠?”

“가지고 있던 것을 내놨습니다.”

“가지고 있던 것?”

마뉘엘이 황제의 칙령을 얻기 위해 그가 내놓은 것은 사면권이었다. 그를 사랑하던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내준 사면권. 반역이 아니라면 무슨 죄든 다 용서해 준다는 그 사면권을 황제에게 내주고 얻어낸 칙령이었다. 

‘마지막 기회일 거야.’

사면권을 내놓은 것은 베르타스 때문이었다. 여자를 빼내 준다면 소드마스터인 그가 돕겠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숨겨진 계획을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소드마스터의 전력은 그의 계획에 커다란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사면권을 내놓을 정도로 큰 전력이야.’

베르타스가 그를 돕는다고 했으니 신전을 없애는 것에 한 발짝 더 나아간 것이 분명했다. 그뿐이랴. 신력을 다루는 여자도 조금 더 다듬으면 커다란 힘이 될 것이었다. 베르타스와 함께 온 자도. 어디서 온 자들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를 돕는다면 악마와도 손을 잡을 수 있었다. 그만큼 제국과 신전의 병폐가 심각했기 때문이었다. 

제국민들을 아무렇지 않게 죽였다는 소리에 마뉘엘은 마음을 정했다. 그전까지는 신전의 탐욕이 크다는 것만 인지하고 있었다. 그랬는데 곳곳에서 신전의 신관들이 그들에게 적대하는 제국민들을 척살했다는 소리에 마뉘엘이 결심을 굳혔다. 제국 내에서 제국민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자들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것은 제국의 근간을 뒤흔드는 일이었고 초대 황제의 유지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가시죠.”

마뉘엘이 이실리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를 그의 앞에 태운 마뉘엘이 말을 몰았다. 뒤에서 흉흉한 기세가 풍겼지만 어떻게 할 수 없었다. 베르타스에게서 쏘아지는 날카로운 기세에 등 뒤가 따끔거렸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몰았다. 뒤통수가 뜨거웠다.

“별일은 없었나?”

“가서 말하겠습니다.”

베르타스의 말에 알뤼르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 * *

“어찌 되었지?”

이실리스를 잠시 마뉘엘에게 맡긴 베르타스가 알뤼르에게 물었다. 신전에 도착하는 시간이 늦었기에 궁금했던 그였다. 신전 안에 있는 이실리스를 데리고 와야 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니. 덕분에 일이 좀 쉬워지긴 했다. 교황을 상대해야 할 수도 있었는데 아무 일이 없었으니.

알뤼르에게서 모든 말을 들은 베르타스가 표정을 구겼다.

“마력이 있다는 것을 들켰다고?”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폐하께서 위험해지셨을 테니까요.”

“이제 어쩔 거지?”

“신전에서 알아차렸으니 신전으로 가야 합니다.”

“이실리스와?”

“그렇습니다.”

이실리스를 그의 눈이 닿지 않는 신전으로 보내야 한다는 사실에 베르타스는 눈을 찌푸렸다. 그의 기색을 눈치챈 알뤼르가 그에게 바짝 다가붙었다.

“그 안에 뭔가가 있습니다.”

“뭔가…… 있다고?”

“그렇습니다.”

* * *

“분명 그 안에 뭔가 있어.”

혼자 남게 된 이실리스가 중얼거렸다. 그게 아니라면 그녀에게 들리던 목소리가 커질 리가 없었다. 계속 그녀를 괴롭혔던 목소리였다. 때로는 간절하게 때로는 속삭이듯이 그녀의 귓가에 맴돌던 그 목소리.

“신전이라…….”

그녀가 책에서 읽던 신전과 직접 눈으로 본 신전은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사랑과 믿음을 실천한다는 그곳에서 사람을 죽였다. 아무렇지 않게.

‘들어간 자 중, 나온 이가 없다고 했지.’

생각은 깊어만 갔다. 머릿속에 들리는 목소리를 따라가려면 신전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은 확실했다. 그러나 그 신전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에 이실리스는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손끝에서 맴도는 붉은 기운을 내려다본 그녀가 결심한 듯 줄을 당겼다. 그녀의 부름에 사용인이 달려왔다.

“부르셨나요, 신녀님.”

더욱 공손해진 태도였다. 사용인에게 알뤼르를 데려오라 명했고 사용인이 그를 데리러 간 동안 이실리스는 기다렸다.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팔걸이를 톡톡 치는 그녀는 영락없는 라르헨의 황제였다.

‘신전에 가야만 하나, 나는 힘이 없다는 거지.’

턱을 괴고 앉아있던 그녀는 깊은 생각에 빠져 알뤼르가 들어오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문을 열고 들어선 알뤼르는 이실리스의 모습을 보고 그 자리에서 깊게 허리를 숙였다. 그의 황제가 다시 돌아온 듯한 모습이었다. 잠시 허리를 숙이고 그 자리에 멈추어 있으니 이실리스가 그에게 입을 열었다.

“일어서세요.”

그녀의 말을 듣자 정신이 들었다. 그의 황제는 아직 기억을 찾지 못했다.

“내가 묻고 싶은 것이 있어 불렀어요.”

“제게 묻지 마시고 하명하시면 됩니다.”

알뤼르의 굳건한 눈빛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혼란스러운 듯한 그녀의 눈빛에 알뤼르는 가만히 머리를 숙였다.

“그렇다면 염치 불고하고 부탁을 하나 하겠습니다.”

이실리스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에 알뤼르가 깜짝 놀랐다.

“이 기운을 자유자재로 다루고 싶다고 하셨습니까?”

“그렇게 말했군요.”

알뤼르는 아무런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실리스도 알뤼르를 빤히 바라보았다. 낯설지 않은 시선이었다. 그녀를 경애가 담긴 눈으로 바라보는 저 시선. 어디선가 본 듯한 그의 시선에 이실리스는 입을 열 수 없었다. 베르타스와는 다른 기분이 들게 만드는 자였다.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뛰는 베르타스의 존재와는 다른.

‘또 그자 생각이로군.’

베르타스가 떠오르자 생각이 뻗어 나가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마음을 다잡겠다고 했지만 계속해서 그녀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는 그자.

“이 기운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의문 어린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알뤼르의 시선에 정신이 들었다. 알뤼르가 이실리스를 여러 번 불렀으나 생각에 빠져있던 그녀는 알아채지 못했다. 붉은 입술을 열어 알뤼르에게 속삭였다.

“신력이 아닌가요?”

“…… 그렇다면 숙제를 드리겠습니다.”

“숙제?”

“그렇습니다. 이 기운이 무엇인지 알아 오면 됩니다.”

“이…… 기운이 무엇인지 알아 오라고?”

“네.”

제대로 들은 것이 맞는지 두 번이나 묻자 알뤼르가 확신을 담아 말했다.

“아마 이 기운이 무엇인지 깨닫는 그 순간, 모든 것을 운용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알뤼르의 말에 이실리스가 눈을 살짝 찡그렸다. 할 말을 모두 마쳤다는 듯 그녀의 뒤에 가서 서는 알뤼르에게 아무것도 물을 수 없었다.

‘내가 가진 이 기운, 이 기운이 무엇인지 알아 오라…….’

신력이 아니라는 소리였다. 알뤼르가 그렇게 말했다는 것은. 이번 사건으로 인해 정확해졌다. 알뤼르도 그녀가 가진 기운과 동일한 기운을 가지고 있다. 또 하나, 알뤼르와 베르타스는 그녀를 안다. 그녀가 그 전에 어떤 일을 했던 사람인지, 어떤 신분의 사람인지 알고 있었다. 

‘잠깐. 사람을 찾아서 왔다고? 사랑하는 사람?’

그런데 그녀의 곁에 머물고 있었다. 저 베르타스는. 머릿속을 지배하는 생각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왜 여태까지 눈치채지 못했을까.

‘나를 바라보는 눈빛, 그 모든 것을 왜 눈치채지 못했지?’

거기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의 상처받은 눈을 보았어도 거기까지 생각할 수 없었다. 그녀의 상황에 갇혀서 거기까지 내다 볼 수 없었다.

‘이제야 알다니…… 아니, 그러면?’

딸이 있다고 했는데 나의 딸인가. 갑자기 다가온 현실에 이실리스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까지 추리해낸 자신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사실을 떠올리는 순간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격렬한 감정의 동요에 그녀의 몸에서 붉은 기운이 일었다.

“폐……! 진정을!”

이실리스가 이전에 가지고 있던 기운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몸 안에 잠자고 있던 마력이 움직이면서 그녀를 휘감았다. 방안의 모든 물건이 바닥으로 떨어졌고 머리카락이 마력에 휘날렸다. 그녀가 앉아있던 의자를 중심으로 기운이 쏟아졌다. 다행히 커다란 마력의 흐름이 아니어서 알뤼르가 제지하려고 손을 뻗었다.

그의 마력이 이실리스의 마력을 감쌌고, 그 순간 이상을 느낀 베르타스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놀란 베르타스의 얼굴을 보자마자 점점 거세지는 마력의 흐름을 알뤼르는 통제할 수 없었다.

“이실리스!”

베르타스가 놀란 나머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가 부르는 이름을 듣자마자 뻗어 나가던 이실리스의 마력이 멈칫했다.

“이실……리스?”

“이실리스! 마력을 어서!”

잠시 줄어드는 그녀의 마력을 눈치챈 베르타스가 다급하게 외쳤다. 그가 이름을 제대로 부르고 있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폭주하려는 마력을 다잡기 위해 노력했으나 잘되지 않았다. 그녀의 이마에서 구슬땀이 흐르자 알뤼르가 그녀에게 말했다.

“억지로 움직이려고 하지 마시고, 자연스럽게! 자연스럽게 하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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