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그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문제는 그게 누구냐는 것이었다.
“그건 나도 아네.”
“의심 가는 분이 있습니다.”
“분?”
가까이 다가와서 말하는 기사를 향해 몸을 더 기울였다.
* * *
정원에서 차를 마시는 이실리스 앞에 신관복을 입은 한 여성과 검은 옷을 입은 남자 둘이 앞에 섰다.
“누구십니까?”
알뤼르가 앞으로 나서서 물었다. 마력이 느껴지는 그들을 알뤼르는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페일러스의 말에 의하면 마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이 뮤르카 제국에 들어오게 되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들었는데 저들은 어떻게 살아있는 것인가.
“함께 가셔야겠습니다. 신녀님.”
“신녀?”
이실리스의 물음에 여자가 환한 미소로 답했다.
“위대한 신전의 신녀로 선택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무조건 영광스러워해야 한다는 여자의 표정에 이실리스는 무표정하게 물었다.
“아무런 조건 없이 신녀가 되는 건가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일단 교황 성하의 인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러나?”
“신력으로 나비를 만들어내셨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오늘 아침 일인데 소식이 빠르군.’
신전의 정보력이 이곳까지 손을 뻗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실리스는 구겨지려는 표정을 애써 가다듬으며 그들에게 물었다.
“그게 어려운 겁니까?”
“그렇습니다. 신관 중에서 신력이 높은 신관도 함부로 할 수 없지요. 아직 신녀님은 신력의 양이 그리 많지 않은데도 응용력이 뛰어나십니다. 곧 대신관에 준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이실리스에게 다시 종용하는 여신관이었다.
“어서 가시지요.”
“이 사람도 같이 가도 되나요?”
“호위 기사신가요?”
알뤼르가 앞으로 나섰다.
“그렇습니다.”
못마땅한 듯 얼굴을 구겼지만 괜찮다고 말하는 여신관의 말에 이단 심문관들이 움직이려다가 그 자리에 멈추었다. 그것만으로도 여신관의 위치를 알 수 있었다. 이실리스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알뤼르가 그녀의 뒤에 붙어 섰고 그 뒤를 이단 심문관들이 따랐다. 도망칠 수 없었다.
‘도망칠 생각도 없지만.’
저렇게 딱 붙어서 뒤를 따라오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실리스가 움직이던 발걸음을 살짝 멈추고 본관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생각하는 것은 베르타스일까 아니면 마뉘엘일까.
“가시지요.”
마차를 타고 가는 동안 불편한 기류가 흘렀다. 여신관이 그녀에게 뭐라고 말했으나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대충 대답하고 있으니 결국 포기한 듯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 여신관의 모습에 이실리스가 가볍게 고개를 돌렸다. 마차 밖의 풍경은 그녀의 복잡한 마음과는 다르게 한가로웠다.
‘예쁘네.’
아름다운 풍경이었지만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앞에 있는 사람이 불편했기에 시선을 돌린 것이었다. 신전에 도착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신전에 들어간 사람들은 아무도 나오지 못했다고 하는데.
‘나도 그렇게 되는 걸까.’
두려움 반, 호기심 반으로 흘러가는 풍경들을 무심히 넘겼다. 그러다 그녀의 눈에 반짝하는 빛이 보였다. 날카로운 것에 반사된 듯한 그 반짝임에 이실리스가 잠시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얼굴을 주시하고 있던 알뤼르가 몸을 긴장감으로 굳혔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마차의 앞에서 폭발음이 일었다. 그 자리에서 말들이 앞발을 들었다. 당황한 말들이 빠르게 달리는 바람에 마차는 덜컹거렸고 바퀴가 빠져서 넘어지고 말았다. 당황한 알뤼르가 마력을 일으켜 이실리스와 함께 마차의 지붕을 뚫고 밖으로 떠올랐다. 그 모습을 잠시 놀란 듯 바라보던 이단 심문관과 여신관도 곧 마차 안에서 밖으로 나왔다.
“가진 것 다 내놔!”
“아니, 신력을 못 쓰게 해!”
마차를 둘러싼 사람들은 손에 하나씩 무기를 들고 있었다.
“신전에서 우리 먹을 것을 다 빼앗아 갔어!”
“이게 무슨 짓이냐!”
이단 심문관이 일갈했다. 검은 옷을 입은 그가 앞으로 나서니 다들 주춤거리면서 움직임을 멈추었다. 손에 들린 무기가 덜덜 떨리는 것이 보였다. 이단 심문관의 손에서 붉은 기운이 일더니 사람을 향해 쏘아졌다. 제일 앞에서 무기를 휘두르려던 사람이 기운을 맞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덜덜 떨면서 눈을 까뒤집은 모습을 본 이실리스가 눈을 찌푸렸다. 병사가 아니고 평범한 제국민인 것 같은 사람에게 저런 짓을 하다니.
‘신전에서 하는 짓이 이렇단 말인가.’
신을 모시는 사람들의 기본 품성은 자비라고 책에서 읽었다. 그랬는데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이실리스가 앞으로 나서서 입을 열었다.
“손속이 너무 과합니다.”
“신전의 마차를 노린 이들입니다. 신전에 반하는 자들은 이단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그냥 둘 수 없습니다.”
이실리스의 말에 즉각 반박하고 나서는 이단 심문관이었다. 그들의 대치를 잠시 지켜보던 여신관이 둘 사이를 중재했다.
“신녀님은 어떻게 하기를 바라시나요?”
“…….”
뭐라고 말하기가 어려웠다.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자고 하자니, 이단이라는 말이 걸리고 그들을 벌주자고 하자니,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녀의 망설임을 눈치챘는지 여신관이 입을 열었다.
“원래 이런 식으로 신전의 마차를 습격하는 이들은 그 자리에서 즉결처형이지만 신녀님께서 이렇게 말하시니 선처를 베풀겠습니다.”
“그렇다면…….”
“데리고 신전으로 가겠습니다.”
미소를 띠며 말하는 여신관의 말에 사람들이 항의했다.
“차라리 죽여라! 죽일 수 있다면!”
결사 항전이라도 하겠다는 듯한 기세에 외려 이실리스가 놀랐다. 대체 신전에 들어가면 어떤 일이 생기기에 저들이 저렇게 나오는 것일까.
“그게 소원이라면야.”
입가에 비소를 지은 여신관이 붉은 기운을 일으켰다. 붉은 기운이 그녀의 머리 위로 떠 오르더니 날카롭게 쏘아져 나갔다. 그 기운은 사람들 하나하나를 뚫고 지나갔고 그 자리에서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신을 섬기는 사람의 손속이라고 하기엔 너무 과한 손속이었다.
“저것은…….”
바라보고 있던 알뤼르도 놀랐다. 알뤼르의 중얼거림에 여신관이 그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호위 기사분께서도 신력을 지니고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비릿한 웃음을 짓는 그녀의 말에 알뤼르가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끝까지 숨기려고 했으나 이실리스가 위험에 처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다. 그의 황제를 지키기 위해서 마력의 움직임은 꼭 필요했으니.
‘이 마력을 신력으로 볼 줄은 몰랐지만.’
당환한 표정을 보이지 않는 알뤼르의 모습에 여신관이 물었다.
“신력을 사용할 줄 아시나요?”
“이것을 신력이라고 부르는 줄 몰랐습니다.”
아무렇지 않은 알뤼르의 말에 여신관이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피가 낭자한 풍경은 보이지도 않는지 이단 심문관들도 여신관도 알뤼르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아무도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나요?”
“그렇습니다.”
“좋아요.”
의심 어린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로 여신관이 그에게 말했다.
“말도 안 되는 변명인 것 같지만, 모른 척해 줄게요. 신전 소속이 된다면요.”
거절한다면 이 자리에서 죽이겠다는 그녀의 표정에 알뤼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시는 신녀님이 가시니 당연합니다.”
“아주 좋아요.”
손뼉을 ‘짝’ 하고 치면서 여신관이 상황을 마무리 지었다. 어느새 마차의 빠진 바퀴를 다 수리한 마부가 와서 고개를 숙였고 여신관과 이단 심문관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마차 위에 올라탔다.
이실리스는 죽어있는 사람들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마지막까지 자신들의 죽음을 인식하지 못한 사람들의 표정은 뇌리에서 잊히지 않았다. 절로 주먹이 쥐어지는 것을 알뤼르가 보고 고개를 저었다. 그의 표정에 이실리스도 간신히 마음을 다독였다. 감정을 드러내어서 좋을 것이 없었다. 다시 올라탄 마차 안은 정적이 흘렀다.
“거의 다 왔네요.”
무심한 듯 말하는 여신관의 목소리에 이실리스가 그녀의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마차를 타고 오는 내내 고개를 돌리고 있던 이실리스가 유일하게 여신관을 바라봤던 순간이었다.
“내리시죠.”
이단 심문관이 이실리스에게 말하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내리기 전에 앞서 알뤼르가 내렸고 그녀를 에스코트하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 위에 가볍게 손을 올린 이실리스가 마차에서 내리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신관들의 시선이 모두 그녀에게 꽂혔다.
“보클로엠의 대신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여신관의 말에 이실리스가 고개를 들었다.
“보클로엠?”
“주신의 이름입니다.”
[드디어!]
또 누군가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저를 기다렸다는 목소리에 이실리스가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녀에게 말했던 목소리는 순식간에 들리지 않았다. 지금까지 들었던 소리 중 가장 커다란 소리였다. 이실리스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그녀가 신전의 위용에 눌려 그런 것인 줄 안 여신관이 다정하게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답니다. 신녀님은 이제 성하의 인정만 남아있는 상황이어서요.”
“성하의 인정?”
“그렇습니다. 따라오신 분은 다르지만요.”
“다르다고?”
“그렇습니다. 따라오신 분의 신력을 측정하고 신을 모시는 사람이 될지 아니면 신을 지키는 사람이 될지 정하는 것은 성하에게 달려있습니다.”
“나는 왜 다르지요?”
“당연히 성녀님은 무궁무진하게 발전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요?”
“그렇습니다.”
대체 뭘 보고 발전 가능성이 있다고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이실리스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이 상황에서 길게 말을 이어 봤자 좋은 것이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신전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는 때였다.
“잠깐!”
신전의 문턱을 넘으려는 순간, 뒤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베르타스와 마뉘엘이었다. 마뉘엘의 등장에 신관들의 기세가 변했다. 그의 모습에 이실리스가 의아한 듯 바라보았다.
‘그냥 보낸 것이 아니었어?’
이단 심문관들과 여신관이 왔다는 소리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모습을 나타내지 않은 그였기에 포기한 줄 알았다. 신전의 압박에 이기지 못하고 그녀를 보낸 것으로 판단했다. 그랬는데 아니었다니. 마뉘엘의 얼굴보다 베르타스의 얼굴이 더 반가웠다는 것은 그녀만이 알 뿐이었다.
“대공!”
“대공저에 계신 귀하신 분을 이렇게 모셔가게 할 수는 없지요.”
그냥 던진 말이었지만 말 속에 뼈가 있었다. 그냥 내어 줄 수 없다는 그의 속내를 파악하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공께서 여기는 웬일입니까?”
“아마 그대와 같은 이유로 여기 왔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