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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화. (102/161)

101화.

베르타스가 사용인에게 손짓했다.

“가서 알뤼르를 불러와라.”

냉엄한 그의 눈동자로 인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알뤼르를 찾아가는 사용인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실리스는 찻잔으로 시선을 돌렸다. 베르타스의 진득한 눈동자가 제 옆얼굴에 따라붙는 것을 느꼈지만, 눈을 돌리지 않았다. 계속 신경 쓰였으나 이실리스는 곧 차에 빠져들었다.

아니, 베르타스를 의식하지 않기 위해 차에 집중했다는 것이 맞겠다.

‘하아.’

속으로 한숨을 삼키면서 찻잔을 신경질적으로 들어 올릴 때, 알뤼르가 그녀의 앞에 섰다.

“찾으셨습니까.”

“나는 잠시 다녀올 곳이 있으니 그대가 뒤를 지키게.”

베르타스의 말에 이상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알뤼르였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둘 사이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읽은 듯했다. 알뤼르가 이실리스의 뒤에 서자, 베르타스는 차가운 바람을 날리며 정원을 벗어났다.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아니, 아니에요.”

알뤼르의 말에 이실리스는 답하지 않았다. 그도 더는 묻지 않고 그녀의 뒤에 섰다.

정원에서 벗어난 베르타스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견딜 수 없었다.

“나에게 그렇게 말하다니.”

어떻게, 네가, 나에게.

섭섭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다. 어디 가서 검이라도 휘둘러야 이 분노가 없어질 것 같았다. 서둘러 정원을 벗어나려던 그때였다. 그의 귀에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이곳에 있다고?”

“그래, 그렇다니까.”

남자들의 목소리였다. 듣는 순간 느낄 수 있었다. 이실리스를 노리는 이들이라고.

‘잘됐군.’

그대로 검을 빼 들어 그들을 향해 겨누었다.

“뭐, 뭐야!”

“누구를 노리고 왔나.”

검이 들이 밀어지자 당황한 모습을 보이던 남자들은 이내 표정을 바꾸고 손에 붉은 기운을 일으켰다.

‘마력?’

마력이 이렇게나 흔한 것이었나. 한 남자가 그의 마력을 베르타스에게 쏘아 보냈다. 자신만만한 남자의 표정을 정면으로 바라본 베르타스는 그대로 검을 휘둘렀다. 오라에 의해 마력이 잘려나갔다. 잘린 마력은 그대로 허무하게 흩어졌고 당황한 남자들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게 시작이었다.

베르타스가 그대로 검을 들고 달려들었다. 붉은 기운을 던지려던 남자들은 베르타스의 움직임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그들 사이로 파고든 베르타스가 그대로 그들의 팔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으악!”

“아아악!”

한 남자는 팔이 잘렸고, 다른 남자는 손이 잘렸다. 잔혹한 손속이었지만 베르타스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그들을 향해 다시 한번 검을 휘두르려던 때였다.

“그만!”

뒤에서 외치는 마뉘엘의 목소리에 검이 멈추었다. 빠르게 쏘아져 나가던 검이 눈앞에서 멈추자 남자가 놀란 눈을 크게 뜨며 붉은 기운을 일으키려고 했다.

“도망가려 하면 베겠다.”

음산하게 나온 그의 목소리와 냉정한 눈동자에 남자들이 얼어붙었다.

“손속이 과합니다.”

“이 정도에?”

코웃음을 치는 베르타스를 보면서 마뉘엘이 표정을 구겼다. 그가 어떤 신분인지 알 수 없으나 대공저에서 제게 함부로 대하는 것이 마뜩잖았다. 그러나 고개를 돌리는 베르타스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한 마뉘엘은 열리려던 입을 다물었다.

지옥에서 올라왔다는 악마의 눈동자가 저러할까. 마음속에 품은 그의 분노가 눈동자 속에서 불타오르고 있었다. 베르타스의 눈동자를 본 마뉘엘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정원에 계신 분께 해를 가하려던 자들입니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뜬 그가 표정을 바꾸어 마뉘엘에게 말했다. 그 찰나의 순간, 분노로 점철된 베르타스의 눈을 본 그 순간이 영원 같았던 마뉘엘은 그의 말에 정신이 들었다.

“심문하겠습니다.”

“붉은 기운을 사용하는 자입니다.”

그 말에 마뉘엘의 표정이 변했다.

“신전에서 사람을 보냈다는 말이군요.”

“그건 알아봐야 하지 않겠나?”

다시 반말로 돌아온 베르타스와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 대공저를 지키는 기사들이 들어와서 두 명의 남자들을 데리고 가는 것을 본 마뉘엘이 베르타스를 향해 말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기다렸다는 듯 베르타스가 마뉘엘을 따라나섰다.

* * *

“누구십니까?”

“뭐?”

“당신은 누구시냐고 물었습니다. 당신이 손님과 아는 사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마뉘엘의 말에 베르타스가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렇게 티를 냈는데 모른다는 것이 더 이상하지.”

날카로운 그 모습에 의자에 앉아 있던 마뉘엘이 흠칫했다. 대공인 제가 기세에 눌려 움직이지 못한 적은 처음이었다. 그만큼 대단했다.

“그렇다면 왜 그녀를 데리고 떠나지 않는 겁니까?”

“지금 그녀의 상황을 보고도 그 말이 나오나?”

베르타스의 말이 맞았다. 기억을 잃은 여자는 덤덤한 듯 보였으나 속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해 보이는 그녀였지만 속으로 곪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얼마 전의 쓰러짐으로 눈치챘다. 신력 때문에 쓰러진 것이 아니었다.

스트레스로 인한 피로의 누적.

의사가 그렇게 말했다. 신력을 다루는 의사였기에 그의 진단은 정확했다. 신력을 다룸에도 불구하고 신전의 소속이 되지 않은 그 의사는 신전의 눈을 피해 도망 다녔다. 그것을 마뉘엘이 알아채고 대공저에 그를 숨긴 지 벌써 2년째. 이곳의 기사단장도 알지 못하는 사실이었다.

철저하게 그의 존재를 숨긴 마뉘엘이 급하게 그를 부른 것은 여자가 쓰러졌기 때문이었고, 의사가 여자에 대해 대공에게 설명했다.

[신력을 가지신 분인데 저보다 강력한 듯합니다.]

[강력?]

[이분은 그릇이 다릅니다. 그러나 무슨 일인지 그 그릇이 비어있습니다.]

[비어있다?]

[그렇습니다.]

저를 빤히 바라보는 베르타스의 시선에 생각에서 빠져나왔다. 은연중에 피어나는 소드마스터의 기운은 그도 알고 있었다. 그 또한 검의 경지를 이룬 자였으니. 그렇기에 존중의 의미로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이 나라의 대공인 나에게 그렇게 함부로 말한다면 보호해 주기가 어렵습니다.”

“그건 나도 알고 있지. 그러나 나의 그녀를 건드리려 한 것은 누구도 용서할 수 없다. 그것이 그대가 집안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탓이라면 더욱.”

“나의 그녀? 집안 관리?”

“그럼 아닌가? 유독 집안에 외부인이 많이 드나드는 것은 무엇으로 설명하려 하지?”

관리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어디서 틈을 보였는지 알 수 없었다. 여자가 신력을 가졌다는 것이 알려지고 그 여자를 노리는 신전의 부패한 신관들이 계속 사람을 보내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러나 티파티 장소까지 노릴 줄은 몰랐다. 그가 마음을 둔 여자를 저 남자도 마음에 두었을 줄은 몰랐다. 기억을 잃기 전 그녀와 저 남자는 무슨 사이였는가. 이대로 곁에 두기 어려울 듯했다.

“정체를 밝히십시오.”

마뉘엘은 그에게 함부로 하는 베르타스를 더는 봐줄 수 없었다. 아무리 그가 여자와 아는 사람이어도 그의 정체를 확인해야 했다.

“나는 베르타스……”

“큰일 났습니다!”

베르타스와 마뉘엘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집무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기사가 들어오며 외쳤다.

“이게 대체…….”

들어온 그를 향해 눈썹을 찌푸리는 베르타스는 신경도 쓰지 않고 마뉘엘을 향해 다급하게 말했다.

“신전에서 나왔다는 신관들이 귀하신 분을 끌고 갔습니다!”

주어가 명확하지 않았지만, 누구인지 다 알 수 있었다. 마뉘엘이 기사에게 일갈했다.

“자네는 뭐 하고!”

“같이 계신 호위 분이 맞서다가 따라가셨습니다.”

잊고 있었다. 신전의 이단 심문관들을. 계속해서 신전의 요구를 거절하면 그들이 나온다는 것을. 그들이 데려갔으니 이제 여자가 신전에서 나오기란 어려울 것이다.

“신전은 어디 있습니까?”

베르타스의 물음에 마뉘엘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지금 가시면 안 됩니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것 같은 베르타스를 마뉘엘이 말렸다.

“신전에서도 신녀라고 불리는 사람을 데려갔으니 함부로 할 수는 없을 겁니다. 일단 제가 신전에 항의 서한을 보내겠습니다.”

“신전에 들어간 사람들은 다 나오지 못했다고 들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사교계에 데뷔하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미 사교계에 모습을 드러낸 분에게 함부로 해를 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티파티를 연 것입니다.”

“…….”

“티파티에 모습이 노출되었으니, 신전에서도 함부로 대할 수 없을 겁니다.”

말없이 가만히 서 있는 베르타스에게서 위험한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제 말을 들으십시오.”

“이번만 기다리겠습니다.”

차가운 기운을 날리며 돌아서는 베르타스의 뒷모습에 마뉘엘이 한숨을 내뱉었다. 그런 그를 이상하게 바라보던 기사가 그에게 물었다.

“왜 저 사람에게 그렇게 자세를 낮추십니까.”

“검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라면 당연히 대접을 해줘야지.”

마뉘엘의 한마디에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는 기사에게 그가 다시 말했다.

“상황은 어떠했지?”

“일단 이단 심문관들이 아무런 제재 없이 대공저에 들어올 수 있다는 것부터가 이상합니다.”

“그렇다면 안에 협조자가 있다는 이야기인가?”

“그렇습니다.”

“대체 누가…….”

머뭇대는 기사의 표정이 어색했다. 무언가 알고 있는 듯한 그의 표정에 마뉘엘이 재촉했다.

“누구인가.”

냉엄한 얼굴로 그가 바라보았다. 집안을 제대로 단속하지 못해 이런 일이 벌어졌다. 신전에 있는 신관 중, 부정부패를 일삼는 신관들과 연이 닿는 사람들을 걸러내려고 평생을 노력했다. 그랬는데 여전하다니. 부정한 자들의 위세가 하늘을 찔렀다.

‘그럴 수밖에. 신력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나라이니.’

신력에 기대어 살아온 이 제국. 신력이 주는 편리함 때문에 누구도 신전을 거역할 수 없었다. 다치면 치료해주고, 무슨 일이 생기면 나서서 해결해주는 신관들을 싫어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그러니 그 위세에 기대서 황실을 능멸하는 거지.”

황실의 핏줄인 저의 조카가 대공저로 피신해 온 이유도 그것이었다. 지금의 황제는 신전이 원하는 대로 움직인 지 오래였다. 사리 분별이 안 되는 그를 대신하여 보호자를 자처하고 나선 마뉘엘을 곱지 못한 시선으로 보는 신전의 무리가 있었다.

“전하,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집안에 신전의 협조자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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