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화. (101/161)

100화.

“공작 영애께 너무 무례한 것 아닌가요?”

귀족 영애 중 하나가 나섰다. 그쪽으로 시선도 주지 않은 이실리스가 저를 웃으며 바라보는 여자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입가에 띤 미소는 따사로웠으나 마주한 시선에서 흐르는 한기는 남들이 흠칫할 정도로 사나웠다.

이실리스의 바로 뒤에 말없이 서 있던 베르타스도 잠시 놀란 눈을 했다가 이내 표정을 바로 잡았다.

“내 이름은 엘리샤 쿠비쟈. 쿠비쟈 공작가의 영애입니다.”

먼저 이름을 밝힌 엘리샤가 이실리스를 향해 턱짓했다. 그 모습을 보고도 이실리스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엘리샤도 무표정한 표정 그대로 그녀에게 말했다.

“공녀인 나를 무시할 정도로 위세가 대단하군요. 아니, 예의가 없는 건가?”

“예의를 모르는 자에게 알려줄 이름은 없지요. 신력을 지닌 나의 이름이 무슨 소용이죠? 어차피 신녀님이라고 부를 텐데요.”

그것은 네가 공작 영애여도 마찬가지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다. 공작 영애이든 황녀이든 이실리스가 신전의 인정을 받으면 신녀‘님’으로 불리게 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 사실을 들어서 알고 있는 이실리스는 거리낄 것이 없었다. 이곳에서 가장 신분이 높은 자는 그녀였다. 저 공작 영애가 아니라.

신전의 권력이 드높은 나라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말하신 대로 신전의 인정을 받았을 때 가능한 거 아닐까요? 신녀님이라고 불리는 것은?”

당돌하게 말하는 엘리샤의 말에 이실리스가 입꼬리만 올려 웃었다. 숨을 죽이고 둘의 대치를 바라보고 있는 여자들은 어느 누구도 그 사이로 끼어들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인정?”

“그렇죠. 인정. 뭐 혹시 아나요, 그쪽도 가짜일지. 가짜 행세를 하면서 신녀라고 나섰던 여자들이 워낙 많아서……. 아, 그 여자들이 어떻게 되었죠? 실렌 영애?”

엘리샤의 부름에 가장 조용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여자가 흠칫하면서 입을 열었다.

“모두 죽었습니다.”

“맞아요. 모두 죽었죠. 이 나라에서 신녀 사칭죄는 사형이거든요.”

이실리스를 보면서 진득한 미소를 짓는 엘리샤의 얼굴에 독기가 서려 있었다. 그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했지만 이실리스의 표정은 무너지지 않았다. 무표정한 그녀를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바라보았다. 특히 귀부인들의 흥미로운 시선이 쏟아졌다.

“이런 것을 말하는 건가?”

이실리스가 손을 내밀었다. 붉은 기운이 피어오르면서 그녀의 손에서 붉은 나비가 만들어졌다. 팔랑이는 나비의 날갯짓은 붉은 흐름을 남기며 움직였고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어머!”

“세상에!”

신력을 다룰 줄 아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으나 저 정도로 정교하게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깜짝 놀라는 사람들 사이에서 표정의 변화가 없는 것은 베르타스 하나였다.

붉은 나비가 이실리스의 손짓에 의해 움직이다가 사라졌다. 사람들의 모든 시선이 이실리스의 입을 향했다.

“인정?”

아까 엘리샤가 했던 말을 그대로 반복하면서 이실리스가 그녀를 향해 입꼬리를 올렸다.

“뭘 알고 말해야지.”

베르타스는 사교계의 날 선 모습을 보면서 회한에 젖었다. 이곳 사교계 사람들 역시 그가 힐렌튼에서 보았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모습. 빈틈을 보이면 물어뜯으려고 난리인 사람들 틈에서 버티는 이실리스가 안타깝고 또 대단해 보였다.

‘나는 버티지 못했지만.’

그랬다. 그는 견디지 못했다. 전쟁터를 전전하면서 날카로운 기세가 가득했던 그에게 다가오는 사람들도 없었고, 저렇게 귀족적인 화법을 구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버텨낼 자신도 없었다. 그래서 더 밖으로 돌았다.

‘새삼 대단해 보이는군.’

기억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저 안에서 꿋꿋한 그녀가 사랑스럽고도 또 사랑스러웠다.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어 불안할 텐데도 훌륭하게 사교계 데뷔를 이뤄낸 이실리스.

“하! 어디서 잔재주를 익혔나 본데 교황님 앞에서는 다를 겁니다!”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엘리샤를 잡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안 가요?”

신경질적으로 말하는 엘리샤의 눈치를 보던 귀족 영애들이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만히 앉아있던 귀부인들도 급하게 할 일이 있다면서 일어섰다. 다들 오늘 목격한 것을 집안에 알리려 했다. 모든 사람이 자리를 비우자 이실리스가 혼자 찻잔을 들었다.

“앉아요.”

뒤에 서 있는 베르타스를 향해서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에 그가 몸을 굳혔다.

“호위를 서는 몸이라 앉을 수 없습니다.”

“호위 기사와 차 한잔도 마시지 못할 줄은 몰랐군요.”

“…… 경계를 서는 것이 호위 기사의 의무입니다.”

“그래도 잠시 앉아요.”

이실리스의 말을 거절할 수 없었다. 베르타스는 순순히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사용인이 서둘러서 탁자 위를 정리했다. 그의 앞에 새로운 찻잔이 놓이자 옆에서 사용인이 차를 끓였다. 차향이 향긋하게 퍼지자 사용인을 손짓으로 물린 이실리스가 베르타스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내게 한 말이 계속 떠오르더군요.”

“무슨 말을 말입니까.”

“말해주면 믿겠냐는 말.”

그녀의 목소리에 베르타스가 찻잔으로 눈을 돌렸다. 저 눈을 도저히 마주하고 있을 수 없었다. 저렇게 외롭고 쓸쓸한 눈을 보이는 이실리스를 끌어안지 않고 견딜 수 없었기에 차라리 눈을 돌리는 것을 택했다. 그의 태도에서 무엇을 느낀 것인지 이실리스가 다시 속삭였다.

“아마 나는 믿지 않았을 거예요.”

“…….”

“그리고 생각보다 나를 잘 알고 있다고 판단했어요.”

그녀의 말에 고개가 번쩍 들렸다. 실낱같은 희망이 보였다. 기억을 잃은 그녀에게 아무것도 말하지 않은 것은 일부러였다.

이실리스에게 괜히 섣불리 접근했다가 오히려 오해를 살 수도 있었다. 제가 아는 그녀는 기억을 잃었다고 해서 함부로 행동할 사람은 아니었으니 언젠가 그의 진심을 알아줄 날이 올 거라고 생각했고 그날은 생각보다 빨리 왔다.

“그럼 저를 믿으시는 겁니까?”

“당신을 믿는 게 아니라 나를 믿는 겁니다. 내 판단을.”

아무도 믿을 수 없다는 말을 덧붙이는 이실리스를 보면서 베르타스는 아픈 표정을 지었다. 그 얼굴을 바라본 그녀가 눈을 살짝 찡그렸다.

“그리고 그 표정.”

“…….”

“당신이 나에게 보이는 그 표정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군요.”

“왜…….”

“아이도 있고 부인도 있는 사람이 나에게 그렇게 애잔한 표정을 짓는 까닭은 무엇인가요?”

이실리스의 말이 벼락같이 그의 귓가에 내리꽂혔다.

“뭐라고?”

멍한 표정을 짓는 베르타스를 향해 이실리스가 쐐기를 박았다.

“아이가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러면 당연히 부인도 있을 터. 그런데 왜 나를 그런 눈으로 바라보냐는 겁니다.”

“대체…….”

제일 처음 든 감정은 황당함이었다. 저게 지금 이실리스가 제게 한 말이 맞는가. 아이도 있고 부인도 있어? 그 아이는 너의 아이이고 부인은 바로 너라고, 목 끝까지 차오르는 그 말을 차마 뱉을 수 없었다.

“앞으로 그런 표정은 삼가해 주세요. 불쾌합니다.”

황망한 베르타스의 표정을 보면서 이실리스는 따끔한 마음 한쪽을 애써 버텼다. 그의 아픈 표정을 보는 것은 무슨 이유인지 아팠다. 하늘이 무너진 것 같은 표정을 짓는 베르타스의 얼굴에 마음이 서늘했다. 또 왜 저렇게 슬픈 표정을 짓는지.

항상 우수에 잠긴 표정으로 저를 보는 베르타스에게 끌리는 마음을 다잡을 수 없었다. 그래서 말을 꺼냈다. 그에게 점점 끌리는 마음을 잘라내기 위해서. 그녀가 잘라낼 수 없다면 그 원인을 없애면 될 것이 아닌가.

‘얼굴을 볼 수 없는 상황도 아니니.’

한동안은 어쩔 수 없었다. 베르타스는 마뉘엘이 제게 붙인 호위 기사였으니 그 말고 다른 사람을 원한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마뉘엘이 생각 없이 그를 그녀에게 붙인 것은 아닐 테니.

그녀가 본 마뉘엘은 꼼꼼한 사람이었다. 함부로 무언가를 재단할 사람도 아니고, 무언가를 함부로 말하거나 결정할 사람도 아니었다. 그가 이 집안의 어느 누구보다 베르타스가 호위 기사로 어울린다고 생각했다면 맞는 거겠지. 그러니 말할 수 없었다.

‘흔들리는 마음을 잡으려면 이게 맞아.’

찻물을 넘기면서 이실리스가 생각했다. 속이 답답하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마음이 아렸다. 베르타스에게 내뱉은 말은 그녀에게 비수가 되어 돌아왔다. 그 말을 돌이킬 수 없었으니 속으로 삼킬 수밖에.

‘그래도 이게 옳아.’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에게 이런 말을 해서 멀어지는 것이 맞는지 아닌지. 그러나 이게 맞다고 생각했다. 결혼한 남자와 뭘 어쩌겠다는 것인지. 그와 감정을 나누는 것 자체가 그녀에겐 금기시되는 일이었다. 이실리스는 눈을 감았다. 분노로 점철된 베르타스의 표정을 보는 것이 마음이 편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눈을 꾹 감았다가 뜬 그녀가 베르타스의 얼굴을 바라보고 몸을 흠칫 떨었다. 그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밀랍 같은 그 얼굴에 이실리스도 입을 열 수 없었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그가 아는 그녀 자신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게 궁금했다. 그러나 그는 말해주지 않겠지. 그의 입으로 말하지 않겠다고 했으니. 그리고 그가 말했다고 해서 믿을 그녀도 아니었다.

‘그래 맞아.’

지금까지 본 것만으로 판단할 테다. 그거면 되었다.

“불쾌하다고?”

“그렇습니다.”

단호하게 말해야 했다. 그래야 이 감정을 잘라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냉정한 표정을 유지하려고 갖은 애를 썼다.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 베르타스에게 흔들리지 않으려고 주먹을 꽉 쥐었다.

뻗어가는 마음을 잡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부인이 있고, 아이가 있는 사람이 애정이 담긴 눈으로 바라보는데, 기분 좋을 리가.”

베르타스가 허를 찔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 말을 내뱉자마자 후회할지는 몰랐다. 생각보다 제가 베르타스에게 많이 마음을 내어주었다는 것을 깨달은 이실리스였다.

“호위도 알뤼르님이 하셨으면 합니다.”

“알뤼르가?”

“그렇습니다.”

눈을 번뜩이면서 제게 말하는 베르타스의 시선엔 분노가 가득했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입술을 달싹였지만 끝내 그의 입술은 열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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