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마뉘엘의 말에 이시리스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왜냐고 묻는 듯한 그녀의 시선에 마뉘엘이 입을 열었다.
“신전 안으로 들어갔던 신의 사자들은 아무도 나오지 못했습니다.”
“나오지 못했다?”
“그렇습니다. 교황의 말로는 신의 부름을 받았다고 하는데 전 그 말을 믿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신전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알뤼르의 기세가 바뀌었다. 이실리스가 느낀 것을 마뉘엘이 느끼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의 기운을 느낀 베르타스가 서재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날카로운 눈빛의 그를 정면으로 마주한 이실리스의 표정이 무너졌다. 그의 시선에 떨리는 마음을 애써 내리눌렀다. 그녀의 얼굴을 정면으로 본 마뉘엘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무언가를 가늠하는 듯한 마뉘엘의 시선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럼……. 신전으로 가는 것이 위험하겠군요.”
“가시면 안 됩니다.”
단호하게 말하는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알뤼르가 마뉘엘과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의 참견에 마뉘엘이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알뤼르의 당혹스러운 얼굴 그러나 분노에 잠긴 눈을 확인한 이실리스가 마뉘엘에게 말했다.
“신전으로 갈 생각은 없어요. 일단 알겠습니다.”
그녀의 축객령에 마뉘엘이 알뤼르를 향해 달싹이려던 입술을 다물고 서재 밖으로 나섰다.
‘역시 아는 사이였어.’
이실리스는 알뤼르를 향해 얼굴을 돌렸다.
“앉아요.”
“서 있겠습니다.”
“뒤를 돌아보기 어려우니 앉으라고.”
나지막한 그녀의 목소리에 분노가 담겨있었다. 저만 바보가 된 느낌이었다. 저들은 저를 아는 것이 확실한데 왜 아무 말이 없는 것일까. 대체 제게 무엇을 원해서.
“나를 알지?”
이실리스의 말에 알뤼르는 아무런 답이 없었다. 우물쭈물하는 그의 기색을 느낀 그녀가 다시 말했다.
“나를 아냐고 물었다.”
“모릅니다.”
알뤼르가 뭐라 말하려고 입을 열었으나 베르타스의 목소리에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을 본 이실리스가 눈을 찡그리면서 베르타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모른다고?”
“그렇습니다.”
“나를 바보로 알아!”
외치는 목소리에 타오르는 듯한 분노가 섞여 있었다. 그녀의 몸에서 붉은 기운이 스멀스멀 흘러나왔다. 그러나 이전에 그녀가 가지고 있었던 기운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것이었다. 그것을 본 베르타스가 눈을 감았다.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것인가.’
알 수 없었다. 마력이 온전치 않은 이실리스에게 아무것도 말할 수 없었다. 아니, 기억이 온전치 않은 그녀였기에 더 말할 수 없었다. 너에겐 아이가 있고 지켜야 할 제국이 있다. 그러니 함께 가자. 그렇게 말한다면 이실리스는 과연 뭐라고 답할 것인가. 베르타스는 그것이 두려웠다.
“내가 당신을 안다고 하면 무엇이 달라집니까?”
“뭐?”
“뭐가 달라지냐고 물었습니다.”
“달라지는 것이……. 없다고?”
“그렇습니다. 제가 당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으니 함께 이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자고 한다면……. 가시겠습니까?”
베르타스의 말에 이실리스는 숨을 들이켰다. 단 한 번도 그런 쪽으로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 그녀의 모습에 베르타스는 한숨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지금의 그녀는 제가 알던 이실리스와는 달랐다. 이실리스가 가지고 있던 판단력과 냉정함을 바랄 수 없었다.
“난…….”
“쉽사리 간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나야!”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당신께 혼란을 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베르타스의 말에 이실리스가 입을 다물었다. 이미 충분히 혼란스럽다는 듯한 그 모습에 베르타스가 살짝 눈을 감았다가 떴다.
“이미 충분히 힘드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상황이 정리되면 말하겠습니다.”
“정리되면?”
“그렇습니다.”
베르타스는 그녀의 손을 쥐었다.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그녀의 손등에 입술을 대면서 속삭였다.
“부디 저를 기억해 주시길.”
아는 사이지만 그녀가 누구인지 말할 수 없다는 베르타스의 말에 이실리스는 구겨지는 표정을 애써 바로 잡았다. 냉정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의 말에 섭섭했지만 그게 맞았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 모든 것을 의심하던 상황에서 그녀에게 아는 사이라고 접근했다면 처음부터 그를 믿지 않았을 것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제 겨우 며칠 본 사람이었다.
그 사람이 그녀에게 ‘나는 너에 대해 알고 있다, 너는 이런 사람이다.’라고 말하면 믿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궁금하긴 했다. 자신이 정말 뭐 하는 사람이었고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래, 나중에 알게 되겠지.’
시간은 많았다. 이실리스가 생각에 빠지자 베르타스가 알뤼르에게 눈짓했고 둘은 서재 밖으로 나갔다. 둘이 나가는 모습을 보았지만 이실리스는 앉은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서재 밖으로 나온 베르타스는 알뤼르를 질책했다.
“뭐 하는 거지?”
“죄송합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마력을 가진 마법사들이 신전으로 들어가서 나오지 않았다는 소리에 치밀었던 분노를 숨길 수 없었던 것이 패인이었다. 그의 황제가 신전으로 들어갈 수도 있다는 소리에 그 분노는 더 커졌다. 그래서 감정을 추스를 수 없었다.
“이런 식으로 할 거라면 돌아가라.”
“조심하겠습니다.”
실수를 뼈저리게 느낀 알뤼르가 고개를 숙이자 베르타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임기응변으로 넘기기는 했지만, 그녀의 궁금증은 계속해서 커질 것이 뻔했다.
‘언제까지 말하지 않을 수 있을까.’
에리카가 라르헨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해상제국의 문제도 있었다. 지금은 아무 소식이 없지만, 해상제국에서 사신이 도착하면 이실리스를 알아챌 것이 뻔했다.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제독이라는 자에게서 이실리스를 지킬 수 있을까.’
“신전이 이상합니다. 마력을 가진 마법사들이 신전으로 들어가면 나오지 못한답니다.”
“그건 그렇군.”
상념에 빠진 베르타스를 건져 올린 것은 알뤼르의 한마디였다. 그의 말에 베르타스가 동의했다. 이상했다.
“마법사들이 들어가서 못 나온다니.”
“설마 그 안에서 마력을 빼앗기는 것은 아니겠죠?”
알뤼르의 말에 베르타스가 웃었다.
“그럴 리가.”
그건 아무나 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라고 말하는 베르타스의 말에 알뤼르도 동의했다. 다른 마법사의 마력을 갈취하는 일은 쉽게 할 수 없었다.
“하긴, 이그나르도의 마법이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그렇지.”
베르타스는 아직도 잊지 않고 있었다. 이그나르도의 흑마법이 그의 딸에게 마수를 뻗친 적이 있다는 것을.
“설마 아니겠지?”
“바다 너머까지 있을 리가요.”
“그렇겠지.”
불안한 가슴 한 켠을 억누르면서 베르타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하루하루가 바빴다. 사교계에 모습을 드러내기로 결정된 후, 이실리스는 계속해서 들이닥치는 사람들을 맞이해야 했다. 미리 인맥을 만들어 두면 좋다는 마뉘엘의 말에 그렇게 하겠다고 답한 것이 문제였다. 그녀에게 티타임을 갖고 싶다고 요청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대공저로 날아든 초대장을 마뉘엘의 선에서 한번 걸러내지 않았다면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났어야 했을지도.
‘더 힘들어질 뻔했지.’
차를 넘기면서 이실리스가 생각했다. 그녀의 앞에는 다양한 드레스를 입은 귀부인들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기품이 흐르는 이실리스의 우아한 행동에 귀부인들은 저마다 감탄했다.
“역시 신녀님이라 다른 것 같지요?”
“그런 것 같네요. 저 손동작 좀 보세요.”
찻잔이 비어 사용인을 부르는 그녀의 손짓에 감탄사를 내뱉었다.
“너무 아름답네요.”
“저 붉은 머리카락 좀 봐요. 황족을 빼고 아무도 가질 수 없는 건데…….”
“신녀님이라 가능한 거겠죠?”
나이든 귀부인들은 그녀에게 관대했다. 고아하고 우아해 보이는 그녀의 몸짓, 고풍스러운 분위기. 그 모든 것은 귀부인들의 취향과 맞아떨어졌다. 그러나 영애들의 사정은 달랐다.
“나이가 대체 몇이죠?”
“저건 뭐예요? 요즘 사교계의 유행에 전혀 맞지 않네요.”
“거기다 저 머리카락 좀 봐요. 칙칙한 붉은 색이라니. 황족과는 다르잖아요.”
그녀를 깎아내리는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이실리스를 보면서 입술을 짓씹는 영애들이었다.
“어머, 제가 늦었네요.”
티파티에 늦는다는 것은 상대를 무시한다는 의도가 깔려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이곳에 아무도 없었다. 갑자기 등장한 여성의 모습에 영애들이 다들 벌떡 일어섰다.
“어서 오세요, 공녀님.”
인사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이실리스는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서서 인사하던 영애들이 그녀를 바라보는 것이 보였다. 귀부인들은 누구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리 신분이 높은 손님이어도 티파티의 룰을 무시한 사람에게 차릴 예의란 없었다. 그것은 사교계를 우습게 보는 것이었다.
“거기 계신 분이 신녀님이신가요?”
눈을 접어가면서 웃는 여자의 모습에 이실리스도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말없이 늦게 도착한 공녀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에 헤아릴 수 없는 깊이가 담겨있었다.
이실리스의 기세에 밀린 공녀가 움찔하면서 그녀를 노려보았지만, 그녀는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순식간에 차가워진 분위기에 영애들과 귀부인들은 흥미진진한 눈으로 둘을 살폈다.
이 기싸움에서 이기는 사람이 내일 있을 파티의 유명인이 될 터였다. 신분을 믿고 안하무인인 공녀가 이길 것인가 아니면 신녀라는 저 여자가 이길 것인가. 가만히 있다가 이기는 쪽의 손을 잡겠다는 속셈이었다.
“사교계의 예의를 제대로 배우지 못했나 보군요. 묻는 말에 대답도 하지 않다니.”
기세에 밀린 공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가시 돋친 말에도 이실리스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저렇게 예의 없는 여자는 처음 보았다. 기억을 잃은 그녀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기세가 대단하여 저 공녀의 모습이 하찮게 보였다.
“말을 못하시나 봐요? 이런 간단한 말에도 답을 못하다니. 아, 근본이 없는 사람이라 그런가?”
공녀가 자주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신분으로 사람을 내리누르는 것. 그 순간 이실리스의 붉은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대답할 가치를 못 느끼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