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그리움이 밀려들었다. 그녀를 보지 못한지 너무 오래되었고 만나고 나서도 의식적으로 거리를 두려고 했다. 그러나 단 한 번의 접촉. 그것으로 인해 그리운 마음은 둑이 넘쳐나듯 흘러내렸다.
이 마음을 어찌할까.
눈앞에서 화병이 깨어지는 것을 지켜본 이실리스가 황망한 표정을 짓다가 정신이 든 듯 베르타스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몸을 틀었다.
“이거 놓으라고 하지 않았나.”
‘화났군.’
이실리스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같잖은 말투도 집어치운 그녀의 모습에 베르타스가 빙긋이 웃었다. 품에서 놓아주는 것은 아쉬웠지만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그녀를 찾은 이상 계속 함께하게 될 테니.
“다칠뻔했습니다.”
어쩌다 그녀의 앞길에 화병이 넘어진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것으로 확실해졌다. 그녀를 노리는 누군가가 이 집 안에 있다.
화병을 넘어뜨리는 것만으로 목숨을 위협할 수는 없지만 다치게 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화병으로도 충분히 위험했다. 마력을 다룰 수 있는 그녀라면 위험하지 않겠지만 지금의 이실리스는 물가에 내어놓은 아이처럼 불안했다.
‘에리카에게 가는 길이 더 멀어지겠군.’
딸도 소중하고 소중했지만 이실리스도 그만큼 소중했다.
“그렇다고 함부로 잡아도 된다는 것은 아니지……요.”
‘또 그 어쭙잖은 말투로군.’
정말 어울리지 않았다. 묘하게 간질거리는 마음 한 켠을 애써 무시하면서 베르타스가 말했다.
“언짢으셨다면 죄송합니다.”
“……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얼굴을 붉히는 그녀의 모습에 그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가 알고 있는 이실리스였다. 서둘러 걷는 걸음걸음에서 당황스러움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뒤에서 웃는 베르타스의 모습에 알뤼르가 속삭였다.
“뭡니까?”
“귀엽지 않나?”
“미치셨습니까? 폐…… 그분께 그런 황당한 말을 하다니.”
알뤼르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베르타스는 웃었다. 이렇게 귀여운 이실리스라니.
서재로 가는 길이 너무 멀었다. 갑작스럽게 그에게 안기고 나니 마음이 요동쳤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저를 뒤에서 안아오는 남자의 향취는 어딘가 익숙하고, 안심되었으며 어쩐지 그리운 느낌이었다.
‘그립다고?’
정말 아는 사람이 아닌가.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 익숙했다. 서재 앞에 설 때까지 계속해서 생각했다. 그녀가 서재에 들어서자 베르타스는 따라 들어서지 않았다. 그가 아닌 알뤼르가 들어오자 마음이 놓였다. 적어도 흔들리는 이 마음을 들키지 않아도 되니까.
“무슨 책을 읽으십니까?”
알뤼르의 말에 손에 쥔 책을 바라보았다. 베르타스 때문에 당황한 마음으로 집어 든 책은 이 서재에서 이전에 본 적이 없는 책이었다. <연애, 당신도 할 수 있다.> 당황스러운 마음으로 책의 제목을 바라보는데 알뤼르도 똑같은 기분이었는지 헛기침을 했다.
“제가 괜한 것을 물었습니다.”
“아니, 아니에요.”
그녀의 말에 이상한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는 알뤼르였다. 이실리스는 입술을 달싹여 그에게 무언가를 물으려다가 그냥 입을 다물었다.
“혹여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십니까.”
“…… 날 아나요?”
그녀의 말에 잠시 생각하던 알뤼르가 되물었다.
“베르타스님께서 뭐라고 하시던가요.”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그럼 모르는 사람인 겁니다.”
의미 모를 그 말에 이실리스의 미간이 좁아 들었다. 괜한 것을 물어 괜히 마음만 심란해졌다. 책꽂이에 책을 꽂아 넣고 새로운 책을 골랐다. 이번엔 병법서였다. 그녀가 책을 바꿔 들고 자리에 앉자 알뤼르도 그녀의 뒤를 지켰다. 사락사락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만 서재 안에 가득했다.
* * *
“들켰다고?”
“네.”
날카로운 여자의 목소리가 귀에 꽂혀 들었다.
“대공저에 여자를 들였을 때부터 불안했는데……. 신녀라는 것이 사실이냐?”
“신전에서 사람이 왔답니다.”
“신전에서?”
“그렇습니다.”
신경질적으로 부채를 내팽개친 여자가 입술을 짓씹었다.
“너는 이 소식을 왜 이제야 전하는 것이냐!”
“최대한 빨리 오려고 했습니다만 대공저에 드나드는 사람을 일일이 감시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남자의 비굴한 말에 여자의 표정이 약간 변했다.
“감시?”
“네. 그렇습니다.”
“뭐야, 그럼 정말로 그년이 신녀라도 된다는 거야?”
“신전에서 사람을 보냈으니, 확실한 거겠죠.”
생각에 빠진 여자가 더 이상 제게 관심을 보이지 않자 남자가 서둘러서 자리를 떠났다. 계속 안에 남아있었다가 화풀이 대상이 되는 것은 사양하고 싶었다. 그녀의 화풀이에 죽어 나간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체 어디서 나타난 년이야!”
‘와장창’ 하는 소리와 함께 물건들이 부서졌다. 분노에 찬 여자의 목소리가 방을 울렸다. 방 밖에서 시녀들이 왔다 갔다 하면서 당황했다. 저 안에 들어가서 물건을 치워야 하는데 치우다가 화난 여자의 분노를 정면으로 받고 싶지 않았다.
“얼른 안 들어와!”
외치는 소리에 시녀 중 한 명이 방 안으로 들어갔고 곧 비명과 함께 피를 흘리면서 나오는 시녀를 다른 시녀들이 부축했다. 또 째지는 소리가 들렸고 다른 시녀가 들어갔다.
* * *
“책을 읽고 계셨습니까?”
베르타스가 서재 밖에 서 있는 것을 확인한 마뉘엘이 안으로 들어서면서 이실리스에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가 들리자 책에서 시선을 뗀 그녀가 마뉘엘에게 붉은 입술을 열어 말했다.
“무슨 일이 있나요?”
“꼭 일이 있어야만 찾아오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녀의 앞에 놓인 의자에 앉으면서 그가 애정이 담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뭔가 일이 있어 보이는 기색이라…….”
“들켰군요.”
기왕 물었으니 사양하지 않고 말하겠다는 그의 말에 이실리스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환하게 웃으면 더 아름다울 것을.’
밝게 웃지 않는 그녀를 보면서 마뉘엘이 생각했다. 이실리스는 정말 아름다운 얼굴을 가졌지만, 그녀가 생기있게 웃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그녀가 처한 상황 때문인가 아니면 원래 웃음이 박한가.
‘저 얼굴이 나를 향해 웃어주면 좋았을 것을. 신을 닮은 저 사람이.’
괜한 생각을 털어내면서 그가 속삭였다.
“사교계에 나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사교계?”
“그렇습니다.”
계속해서 숨기려고 했다. 그러나 이젠 한계였다. 신전의 압박을 버티기가 더는 어려웠다. 아니, 신전이 아닌 황제의 명을 거절할 수 없었다. 신녀께서 신전으로 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똑같은 사람들인데 통할 리가 없지.’
이실리스를 감추는 그를 눈엣가시로 보는 신전과 황제였다. 그러니 그의 말이 통할 리가 없었다. 계속되는 압박에 그의 가신들까지 신녀를 보여달라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걱정하는 것은 그녀의 태도였다. 고압적인 그 태도를 고깝게 보는 자들이 있을 것이 뻔했다. 황제나 교황의 앞에서 저런 태도를 보였다가 그녀가 위험해질 수 있었기에 마뉘엘은 고심했다.
‘해결되는 것은 없었지.’
그랬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지만, 해결이 나지 않았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동안 믿을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이들도 모두 의심스러웠다. 그의 집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모두 검문하고 조사했지만, 신전과의 연결고리를 찾을 수 없었다. 그게 문제였다.
‘몇 명이나 연루되어있는지 알기라도 한다면…….’
그랬다면 처리했을 텐데.
“내가 주의해야 할 일이 있나요?”
그의 귓가에 들리는 목소리에 마뉘엘은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제게 묻는 여자의 얼굴에서 불안함도, 두려움도 읽을 수 없었다.
‘그러고 보면 대단한 여자야.’
기억을 잃은 것이 분명해 보였는데 이 정도로 침착한 것도 그렇고 상황파악이 빠른 것도 그랬다. 보통의 귀족 교육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분명히 고위 귀족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다.
‘대체 어디서 온 여자일까.’
그녀를 바라보다 뒤에 서 있는 알뤼르에게 시선이 닿았다. 마뉘엘은 그의 몸에서 흐르는 푸른 기운을 볼 수 있었지만 입을 다물었다. 저 사람이 온 곳에서 아니, 저 밖에 서 있는 베르타스라는 자의 나라에서 온 것이 틀림없었다. 무슨 이유로 아직도 그녀에게 사실을 말하지 않는지 모르겠지만. 아는 척이라도 했다면 뭐라 묻기라도 했을 텐데 아직도 모른 척이라니. 결국, 처음 이곳으로 올 때의 행적 빼고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다. 저들에 대해서.
“왜 그리 저를 빤히 보십니까? 남자를 좋아하십니까?”
왜 그렇게 빤히 보냐는 알뤼르의 말에 마뉘엘이 시선을 급히 돌렸다. 대놓고 쳐다보지 말라는 말보다 더 무서웠다. 이실리스의 시선이 마뉘엘에게 닿았다.
“네? 아, 아닙니다!”
애써 부정하는 자신을 감정의 동요 없이 바라보는 여자의 시선을 마주하니 마뉘엘은 괜히 당황했던 저 자신이 이상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럼 제가 해야 할 일은 뭘까요?”
이실리스의 물음에 마뉘엘이 그녀에게 답했다.
“신전 측에서 접근하면 뭐라고 하는지 알려주시면 됩니다.”
신전이라니. 마뉘엘의 말을 들으면서 이실리스는 생각에 잠겼다. 신전에서 그녀를 보고 싶어 한다는 것은 그 전부터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랬는데 사교계라니.
‘신전과 사교계가 대체 무슨 상관이기에.’
뮤르카 제국은 생각보다 복잡한 상황에 있었다. 신전의 권력이 황제의 권력을 넘어서고 있었다. 신전은 뮤르카 제국의 정책을 주무르고 있었고 신전에서 나오는 신력은 신전의 권력을 유지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했다. 이실리스가 가지고 있는 붉은 기운. 이곳에서 신력이라고 일컬어지는 그 기운을 신전에서 원하고 있었다.
이 제국의 대공인 마뉘엘은 신전이 모든 권력을 독차지하면서 부정부패를 일삼는 것을 직접 목격한 사람이었다. 신전이 가진 권력에 반항하는 유일한 귀족. 신력을 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황족이었기에 교황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자. 그러나 그뿐. 그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신전과 사사건건 부딪치면서 손발이 묶인 자. 그게 뮤르카 제국민들이 판단하는 마뉘엘 뮤르카였던 것이다.
“신전에서 접근을 할까요?”
“당연합니다.”
확신하는 마뉘엘의 말에 이실리스는 제가 놓치고 있는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죠?”
“손님께서 가지고 있는 붉은 기운. 그것이 이곳에서는 신력이라고 일컬어지는 기운입니다.”
“그래서 제가 신녀인가요?”
“그 기운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신녀가 되기는 부족합니다. 그러나 손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신력을 흡수하실 수 있지 않습니까. 그것만으로 충분합니다.”
“그렇다면…….”
“신전으로 와 달라고 요구할 수도 있습니다.”
“가야 하나요?”
“가지 않으시는 것을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