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7화. (98/161)

97화.

그 거대한 위용에 움찔했지만 애써 자세를 바로 했다. 이곳에 있는 한 저것은 사람에게 위해를 끼칠 수 없었다. 군청색 눈에서 넘실대는 붉은 기운이 보였다. 기회였다.

“크으윽!”

손을 내밀어 붉은 기운을 뽑아낸 교황이 밝게 웃었다.

“한동안 아무것도 주지 않으시더니 이제 마음이 조금 바뀌셨나 봅니다?”

그의 손에서 검은 기운이 넘실대면서 계속해서 붉은 기운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고통스러운 신음이 계속해서 들려왔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원하는 만큼 기운을 뽑아냈다.

그동안 기운이 고갈되었나 싶을 정도로 성력을 내놓지 않던 것인데 이렇게 성력을 내어주다니.

‘다행이로군.’

신녀라고 불리는 여자를 데려오려면 성력이 필수였다. 그에 걸맞은 기운이 있어야 설득하기가 쉽지 않겠는가.

‘그 여자가 가진 기운도 신력이 맞다면…….’

잡아야 했다. 잡아서 쓸 곳이 있었다. 완전히 잠든 듯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을 향해 시선을 흘긋 던진 그가 자리를 떠났다.

교황이 떠난 자리에 고른 숨소리가 울렸고 붉은빛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도와다오.]

힘없이 읊조린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 *

“외부인에게 신녀님의 호위를 맡겼다고 들었습니다.”

대공저의 기사단장이 와서 마뉘엘에게 항의하듯 말했다.

“그랬지.”

“귀하신 분의 호위를 우리가 아니라 외부인에게 맡긴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

“어떤 알력에도 휩쓸리지 않았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일세.”

“네?”

“어제 이 뮤르카 제국에 도착한 외부인들이야. 그들이 신전과 관련이 있을 확률은 지극히 낮지. 그런데다 손님에게 도움을 주었고.”

“아무리 그래도…….”

“결정적으로 그들은 저 여자를 알고 있어.”

그게 이유였다. 저 여자를 찾아서 이곳에 온 사람들이 분명했다. 그들과 여자가 어떤 관계인지 알 수 없었으나 남자, 베르타스의 눈이 여자를 향하자 돌변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안에 담겨있는 진한 그리움은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는 것이었다.

‘대체 무슨 사이일까.’

무슨 사이기에 바라보는 사람이 가슴이 아릴 정도로 절절한가.

‘신녀는 아니라는 거겠지.’

바닷가에 정신을 잃고 있었을 때부터 직감했다. 여자가 신력의 붉은 기운을 보는 것을 알았을 때는 놀라움, 그뿐이었다. 여자의 이전에도 신력을 보는 사람들은 많았으니까.

‘특히 바다를 건너온 자들이 그랬지.’

그러나 신력을 흡수하는 자는 처음 보았다. 그래서 특별한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신과 닮은 특별한 그녀를 다른 자들과 똑같이 신전에 내어줄 수 없었다. 붉은 기운을 볼 수 있는 그들은 신전으로 들어가자 종적을 감추었으니.

“대체 저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인가.”

마뉘엘의 눈에 들어온 것은 커다랗게 세워져 있는 대신전이었다. 수도 바로 옆에 위치한 대공령에서는 황궁과 대신전이 한눈에 보였다. 거대한 대신전은 아무 말 없이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전하.”

“일단 내버려 두게.”

“알겠습니다.”

불만 어린 표정이었지만 그의 말을 따르겠다는 기사단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뒤를 돌아선 기사단장의 사이하게 빛나는 눈을 마뉘엘은 볼 수 없었다.

* * *

[도와다오.]

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실리스는 침대 위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대체 누구인가. 누구기에 저에게 이토록 가슴이 아프게 도움을 청하는지. 줄을 당기자 사용인들이 들어왔고 그들이 아무 말 없이 환복을 도왔다.

일전에 그녀에게 함부로 대하던 사용인이 신전의 첩자라는 것이 드러나자 대공은 집안의 사용인들을 다시 추렸다. 그녀를 어려워하는 사람들 틈에서 이실리스도 불편함을 느꼈다. 그러나 방법이 없었다.

‘신전이라.’

마뉘엘의 말에 의하면 신전에서 그녀를 부를 것이 분명했는데 문제는 시기였다. 언제 왜 부를 것이냐가 관건이었다. 그림에 있던 붉은 기운을 흡수하고 나서 몸이 한결 가벼워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게다가 그 기운은 고스란히 이실리스의 몸에 남아있었다. 몸 안에 흘러 다니는 붉은 기운을 느낀 그녀가 손을 뻗었다. 손 위에 넘실넘실 타오르는 붉은 기운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그녀는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들어오지 않는 사람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녀가 답을 하지 않아도 이곳의 사용인들은 자연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왔는데 왜 들어오지 않는 걸까. 그러다 어제 소개받은 남자들에게 생각이 미쳤다.

“들어오세요.”

그제야 문이 스르륵 열렸고 호위 기사라는 두 사람이 들어왔다.

“밤새 평안하셨습니까.”

자신의 이름을 알뤼르라고 밝힌 남자가 그녀에게 물었다. 뜬금없는 물음에 의아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을 편하게 하셔도 됩니다.”

“아니, 괜찮아요.”

이제 제법 귀족 영애다운 화법을 구사했다고 스스로 생각하면서 이실리스가 답했다. 그녀의 말에 잠시 이상한 표정을 지은 남자는 곧 그녀에게 꾸벅 인사하더니 방 밖으로 나갔다.

‘왜 들어온 거지?’

들어왔다가 바로 나가버리는 남자의 모습에 이실리스가 궁금해하자 그것을 눈치챈 베르타스가 그녀에게 말했다.

“아침 인사를 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아침 인사……요?”

‘저 사람이 왜 나에게…… 설마 정말 나를 아는 사람들인 건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그녀의 곁에 서 있는 베르타스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이실리스가 그에게 물었다.

“혹시 날 아나요?”

“…….”

그녀의 말에 답이 없는 베르타스였다. 어딘지 애잔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모습에 이실리스는 마음 한구석이 따끔한 것을 느꼈다. 말없이 빤히 바라보는 그 눈을 마주하니 가슴이 세차게 뛰는 것이 느껴졌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속이 답답해진 그녀가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가 뭐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으나 너무 작은 소리라 들리지 않았다.

“뭐라고 했나요?”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아…….”

헛된 기대였을까. 아는 사람이 그녀를 찾아왔다고 생각한 것은. 입술을 살짝 깨문 이실리스가 시선을 돌렸다. 베르타스의 끈질긴 시선이 그녀의 옆얼굴에 꽂혔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 그의 시선에 얼굴이 따끔거렸지만 이실리스는 고집스럽게 얼굴을 돌리지 않았다.

자연스레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게 된 그녀의 시야에 새파란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은 꽤 아름다웠지만, 그녀의 답답한 속내를 풀어주지는 못했다.

“하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곧았던 허리가 점점 굽어드는 것이 느껴졌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거추장스러워 머리카락을 정돈했다. 손으로 머리를 빗어 내리는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베르타스가 그녀에게 말했다.

“제가…… 도와드려도 되겠습니까?”

기사인 그가 제 머리를 빗는 것을 어떻게 도와준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이실리스의 경계 어린 표정에 베르타스가 말했다.

“딸아이가 있어 자주 빗겨주곤 했습니다.”

결혼했다니. 마음 한 켠이 서늘해졌다. 이실리스는 괜스레 이상해지는 기분을 다잡으면서 베르타스에게 말했다.

“괜찮아요.”

“알겠습니다.”

더는 강요하지 않는 그 모습에 외려 그녀가 어쩔 줄 몰랐다. 힐끗 그를 바라보았으나 그는 그녀를 바라보지 않았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그 모습에 이실리스도 입을 다물었다. 저 남자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딸이 있다더니 그 딸을 생각하는 것인가.

“저…….”

“편하게 베르타스라고 부르십시오.”

“딸은 몇 살인가요?”

“이제 네 살 정도 되었습니다.”

“아……. 여기 있나요?”

“아니, 이곳이 아니라 먼 곳에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곳에 왔나요.”

“찾을 사람이 있어서.”

직시하는 그의 시선에 이실리스는 눈을 뗄 수 없었다. 어둑한 그의 눈이 그녀에게 따라붙자 얼굴이 달아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발그레한 얼굴로 잠시 눈을 피한 이실리스가 베르타스에게 다시 물었다.

“그 사람은 누구인가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사람?”

“그렇습니다.”

저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말하는 남자의 모습에 하마터면 착각할뻔했다. 그가 찾는 사람이 나 일지도 모른다는 착각. 저를 모른다고 말했으니 그가 찾는 사람은 그녀일 수가 없었다. 왠지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이런저런 생각이 계속되자 마음이 심란했다. 

‘서재라도 가야겠어.’

책이라도 읽으면 이 기분이 조금 나아질까 하여 이실리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 밖으로 나가는 그녀의 뒤를 천천히 따라오는 두 사람의 발걸음 소리를 들으면서 그녀가 걸음을 옮겼다. 뒤를 따라오는 두 사람이 든든하게 느껴졌다. 특히 베르타스의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왜 이렇게 친숙한 느낌이 들까.’

마음이 어수선했다. 저 남자가 나타나고 나서 그녀의 잔잔했던 마음에 돌이 던져진 것처럼 파문이 일었다. 가만히 서 있는 저 남자에게 가서 안기고 싶기도 하고 친근하게 말하고 싶기도 한 이유는 뭘까. 이런 기분 때문에 더 껄끄러웠다.

‘더 가까이하기가 어려워.’

아이도 있는 남자였다. 아이가 있다면 당연히 아내도 있을 테고. 그런 남자에게 끌려서 어쩌겠다는 것인가. 이실리스는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잘라내야 했다. 이상할 정도로 끌리는 사람이었지만 잘라내는 것이 옳았다. 주먹을 쥐는 그녀의 손을 베르타스가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다시 만난 이실리스는 그도, 아이도, 라르헨도 다 잊었다. 그런데 그게 싫지 않았다. 적어도 이곳에서의 그녀는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그래도 날 잊은 것은 싫어. 이실리스.’

밤새도록 생각했다. 그녀를 이대로 두고 싶다 아니, 데리고 돌아가고 싶다. 그녀에게 나를 알리고 싶다 아니,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 어찌해야 하는가. 계속되는 고민이었지만 결론은 나지 않았다. 결국은 모른 척하기로 했다. 불안해 보이는 이실리스를 흔들고 싶지 않아서.

“어디를 가십니까?”

“서재.”

이렇게 순식간에 변할 줄 알았다면 태도를 달리했겠지. 차가워진 이실리스의 목소리에 베르타스가 눈을 찡그렸다. 그 미묘한 온도 차이를 똑같이 느낀 알뤼르도 베르타스를 쳐다보았다. 

앞서 걸어가는 이실리스의 팔을 베르타스가 잡았다.

“이거……!”

“위험합니다.”

그녀의 바로 앞에 화병이 넘어졌다. 순식간에 품에 안긴 이실리스를 돌려 안은 베르타스는 그녀의 허리를 쥐고 숨을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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