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6화. (97/161)

96화.

마뉘엘은 없어진 여자를 찾다가 발견한 광경에 놀랐다. 여자를 구하는 남자의 솜씨는 놀라웠다. 그냥 일반적인 사내가 아니었다. 적어도 전쟁을 경험한 적이 있는 기사였다. 정확하게 사람의 급소만을 공격하는 사내를 보면서 마뉘엘이 감탄했다.

외국인처럼 보이는 사내들이 대공저에 머무르면서 여자를 보호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대공저에 여자가 있다는 것이 노출된 상황, 이 상황에서 그가 택할 수 있는 방법은 단 두 가지였다. 여자에게 호위 기사를 붙이거나 여자를 다른 곳으로 빼돌리거나.

‘어느 것 하나 쉬운 것은 없지만…….’

저 둘은 외국인인 것이 확실했고 그들의 말에 따르면 오늘 도착했으니 누군가의 손이 뻗었을 리도 없었다.

‘오늘 도착했지.’

대공령은 외부인의 출입이 대단히 폐쇄적인 곳이었다. 저 둘이 나타났다는 소문은 이미 아침에 보고를 통해 들었다. 바다에서 홀연히 나타난 사람들. 바닷가를 감시하는 신력을 사용한 성물로 인해 모든 것을 파악하고 있었던 마뉘엘이었다. 적어도 저 둘이 그에게 거짓을 말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 나라 사람이네 어쩌네 했다면 저 둘이 있을 곳은 지하감옥이었으니까.

“그렇게 하겠습니다.”

남자의 말에 마뉘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목적으로 접근한 것인지 아니면 이조차도 우연인지 알 수 없었지만 지금 급한 것은 여자를 보호하는 것이었다. 기사가 전한 서신은 신전에서 여자의 신병을 요구했다는 내용의 글이었다. 확실했다. 저 여인은 신전에서 보낸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는 이미 신을 닮은 여자에게 빠져들고 있었다. 그러니 내줄 수 없었다.

이실리스는 앞서 걷는 마뉘엘의 뒤를 따라 걸었다. 제 뒤에서 따라오는 두 남자의 모습이 석연치 않았다. 저를 바라보는 눈동자에 다양한 감정이 물들어 있는 남자. 검은 머리의 남자의 시선엔 많은 것이 담겨있었다.

‘나를 아는 사람인가.’

아는 사람이 확실한 것 같았다. 저에게 왜 그러고 있었냐고 물었던 것도 그렇고. 마뉘엘이 등장하고 나서부터 아무런 말이 없는 남자의 태도에 이실리스는 궁금해졌다. 저 사람은 정말 나를 알까. 그럼 내가 누구인지 말해줄 수 있는 것일까.

* * *

저택으로 돌아오니 어느새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마뉘엘이 남자들을 데리고 그녀의 방에 찾아온 것은 더 늦은 시간이었다.

“오늘부터 손님의 호위 기사가 되실 분들입니다.”

검은 머리카락의 남자는 그렇다고 쳐도 나머지 한 사람은 비실비실하게 생겼는데. 입 밖으로 나오려는 말을 애써 눌러 삼켰다. 실례되는 말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호위 기사라고 했나요?”

“오, 이제 제법 귀족 영애다운 화법이 되었습니다.”

눈을 휘며 웃는 마뉘엘을 보면서 이실리스도 웃었다. 어투를 바꾸는 것은 꽤 어려웠지만 노력했다. 괜히 트집잡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저를 보면서 수군대는 사용인들을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낯선 곳에서 긴장한 그녀는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그런가요?”

“그렇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마뉘엘에게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이곳에 적응하기 위해서 맞지 않는 옷을 입는 것처럼 어색한 화법을 사용하기 위해 그녀가 했던 노력에 대해 언급하고 싶지 않았다.

“베르타스라고 합니다.”

그녀의 앞에 서서 말하는 남자는 이전보다 더 짙어진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강인한 눈매에 다부진 턱선. 고집스럽게 다물린 입이 그녀에게 할 말이 있어 보였지만, 열리지 않았다. 그녀를 빤히 바라보는 남자의 시선에 의아한 듯 마뉘엘을 향해서 고개를 돌리자 그가 말했다.

“손을 내미시면 됩니다.”

천천히 내민 그녀의 손을 잡는 남자의 뜨거운 손이 느껴졌다. 따뜻한 온기가 그녀를 감싸자 서늘했던 마음이 어루만져지는 느낌이었다. 마뉘엘이 그녀의 손을 잡았을 때와는 다른 기분이었다.

‘대체…….’

이 남자가 누구기에 저에게 이런 기분이 들게 할까. 이실리스는 그것이 궁금했으나 그 궁금증을 입 밖으로 내는 우를 범하진 않았다. 그녀의 손등 위에 내린 입술마저 뜨거웠다. 묘한 기분이었다. 심장이 자리를 이탈한 듯 뛰기 시작했고 그 심장의 소리가 들릴까 두려워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남자의 시선은 그녀를 옥죄었고 이실리스도 남자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남자의 진득한 시선이 마뉘엘의 부름으로 인해 떨어지자 그제야 숨이 탁 트이는 기분이었다.

“어딜 가든 이분들과 함께 다니셔야 합니다.”

“이 안에서도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위험하다는 마뉘엘의 말에 이실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늦은 시간이니 나가보겠다는 세 사람을 내보내고 그녀는 생각에 잠겼다.

‘나는 여기에 왜 온 것일까.’

머릿속에서 울리는 누군가의 목소리는 아직도 진행중이었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만나지 못했다. 새로운 일의 연속이었다. 마뉘엘의 집에 새로운 사람이 들어왔고 이 집안에서 허점이 발견된 이상 이곳도 믿을 수 없었다.

‘붉은 기운이 보인다는 것을 이야기한 것이 잘못이었나.’

조심하겠다 다짐했음에도 불구하고 섣부르게 행동했던 자신을 탓하면서 이실리스가 눈을 감았다. 그저 눈앞에 흐르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뿐인데 누군가가 이것을 신경 쓸 줄이야. 그러나 후회는 이미 늦은 법. 사실을 말하지 않고 숨겼다면 좋았겠지만 이미 늦었다.

한숨을 삼키면서 이실리스는 침대 위에 누웠다. 밖에 있는 베르타스라는 남자가 신경 쓰였지만 애써 잠을 청했다. 귓가에 잔잔하게 울리는 소리를 모른 척하면서.

이실리스가 머무는 방 밖에서 베르타스는 알뤼르와 나지막한 목소리로 밀어를 나누고 있었다.

“폐……. 그분께서 이상합니다.”

“그건 나도 느끼고 있어.”

폐하라고 이야기하려다가 서둘러서 그분이라고 말을 바꾼 알뤼르였다. 베르타스의 날카로운 시선이 그에게 와 닿았다.

“아무래도 기억이 없으신 것 같습니다.”

“그런 것 같군.”

애써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있었지만 베르타스는 차오르는 분노를 다스릴 길이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저 사람이 여기서 이러고 있는가. 늘 강인하고 자신만만했던 사람이 저렇게 가냘픈 모습을 하고 나타나니 속이 탔다.

“마력은…….”

“아주 미미합니다.”

단언하듯 말하는 알뤼르의 말에 베르타스는 눈을 감았다. 참담함이 그의 얼굴에 자리했다. 마력도 잃고 기억도 잃었다니.

“마력을 잃는 것이 가능한가?”

“가능합니다. 이전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습니다. 흑마법사의 마법 중에서 타인의 마력을 갈취하는 마법이 있었습니다.”

“그 이그나르도라는 자 말인가?”

“그렇습니다.”

베르타스가 정면을 주시하면서 아무런 말이 없자 알뤼르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그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그 대공이라는 남자가 우리를 집에 들여줘서 다행이지만 어찌하면 좋습니까.”

“그자는 우리를 믿어서 안으로 들인 것이 아니야.”

“네?”

우연이었다. 모든 것이. 대공이라는 남자의 눈은 불신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서둘러서 베르타스와 알뤼르를 집으로 들인 것으로 보아 집안의 상황이 좋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이실리스를 지킬만한 사람이 없는 거겠지.’

그것도 믿을 만한 사람이.

대공씩이나 되어서 괜찮은 기사도 하나 없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지만 베르타스가 파악한 바에 의하면 그랬다. 그리고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신녀?”

“…….”

베르타스의 혼잣말을 알뤼르도 들었지만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신녀라니. 그들의 황제가 신녀라는 말 만큼 웃기는 소리가 어디 있겠는가. 이실리스에게 신성력이라고는 없었다. 그랬는데 이곳에서는 신녀 취급이라니.

“말이 안 됩니다.”

“당연한 소리지.”

어떻게 되어 먹은 나라인지 알 수 없지만 미미한 마력을 지닌 이실리스 보고 신녀라고 말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이 나라엔 마법사가 없군.”

“그렇습니다.”

페일러스의 말이 맞았다. 마법사들이 도착하면 실종된다는 나라. 뮤르카 제국. 그동안 바다 건너에 있었기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는데 이실리스가 이곳에 있다면 말이 달라졌다.

“어떻게 생각하나 알뤼르.”

“저도 모르겠습니다.”

기억을 잃은 그녀를 몰래 데리고 나가기란 어려웠다. 그녀가 순순히 협조해 줄지 확신할 수 없었다.

“하아 어쩌다 이런 일이.”

알뤼르의 한숨 소리를 듣고 있으니 베르타스의 입에서도 한숨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 * *

“신녀가 맞다고 했느냐?”

“그렇습니다. 성하.”

뮤르카 제국의 대신전. 기도실에서 수석 신관이 하는 이야기를 들은 교황이 명령했다.

“신녀님이 맞다면 당연히 신전으로 모셔와야지.”

“당연합니다! 신의 사자를 그냥 대공저에 머무르도록 할 수 없습니다.”

“대공이 순순히 보내주지 않으려고 해도 신전으로 데리고 오게.”

“알겠습니다.”

대답을 들은 교황이 나가보라며 손짓하자 고개를 숙이고 나가는 수석 신관이었다. 그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대신관은 기도실의 벽을 눌렀다. 비밀의 문이 모습을 드러내면서 좁은 복도가 눈앞에 드러났다.

그 안으로 들어가자 성력으로 움직이는 돌에 밝은 빛이 들어왔다. 그 빛 사이로 그가 천천히 걸었다. 꼬불꼬불한 미로와도 같은 길을 지나서 한참을 걸어 내려간 그가 어느 거대한 석문 앞에 섰다.

‘신녀라니. 그럴 리가.’

교황의 키보다 두 배는 높아 보이는 그 석문은 거대한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석문의 양쪽으로는 그들이 모시는 신이 양각과 음각으로 조각되어 있었다.

그 앞을 지키고 있는 성기사들에게 교황이 고개를 살짝 까딱였다. 석문이 천천히 열리고 대신관이 그 안으로 들어갔다. 한가운데에 있는 여신상을 제외하고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방안의 바닥 한 부분을 누르자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계단 아래로 내려간 그가 눈앞에 웅크리고 있는 어떤 거대한 형체를 향해 말을 걸었다.

“당신 짓입니까?”

“…….”

“말없이 그리 있으셔도 이곳에서 풀려날 일은 없을 겁니다. 대답하십시오.”

“…….”

“지금 밖에 있는 신녀라는 여자를 부른 게 당신이냐고 물었습니다.”

그의 말에 거대한 눈이 붉게 빛나면서 그 모습을 제대로 드러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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