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신전에서 그녀의 존재를 눈치챘으니 더 이상 숨길 수만은 없었다.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주신인 보클로엠을 닮은 붉은 머리카락과 군청색 눈동자. 새하얀 피부가 햇빛에 반사되면서 이 세상의 것 같지 않은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앞에서 저를 바라보고 있는 여자의 시선에 얼굴이 달아오르는 느낌이었다. 그러다 정신을 차린 마뉘엘이 그녀에게 입을 열었다.
“속성으로 배워야겠습니다.”
“뭘?”
“귀족 영애들이 사용하는 화법.”
“아, 그렇군.”
“‘-요’를 붙이십시오.”
“뭐?”
“무슨 말을 하든 끝에 -요를 붙이면 거의 비슷해집니다.”
“무슨 말을 하든 -요를 붙이라고?”
“그렇습니다.”
마뉘엘의 말에 잠시 생각하던 이실리스가 그를 향해 물었다.
“그럼 이렇게 말하면 되나……요?”
“그렇습니다. 특히 귀족 남성들에게 그렇게 말하시면 됩니다.”
“…….”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빠르게 사교계에 모습을 드러내야 했다. 신전에서 사실을 알았으니 어떻게 나올지가 궁금했다.
‘내놓으라고 할 것 인가, 아니면 그대로 두라고 할 것인가.’
만약 신전에서 대공저에 있는 것을 허락한다면 여자는 신전의 사람이 틀림없었다. 그것이 아니라면 신전의 사람이 아니라 정말 신의 사자가 맞으니 그에 합당한 대접을 해줘야 하는 것이 맞았다. 주신과 꼭 닮은 머리카락 색을 보아 신의 사자 쪽에 더 가까운 것 같았지만. 여태까지 신의 뜻을 받았다고 나타난 자들은 그녀와 생김새부터가 달랐다.
“무슨 생각을 하지……요?”
“아, 신전에서 손님이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모시러 올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실리스는 남자의 말에 문득 궁금해졌다. 남자는 누구이고 신전에서 그녀는 왜 찾는 것일까. 이실리스의 눈에 서린 의문을 읽은 것인지 남자가 차근차근 설명했다. 대신전에 신탁이 내려왔고 신의 사자가 내려온다는 신탁으로 인해 온 제국민들이 기대하고 있다고.
“기대?”
“그렇습니다. 신의 이적을 바라는 것이지요.”
신의 이적이라니. 그렇다면 여기서 떠돌고 있는 그 붉은 기운이 신의 이적이라 불리는 기운일까. 이실리스는 그것이 궁금했다. 신의 이적이라고 불리는 이 기운과 친숙한 그녀는 대체 뭐 하는 사람이었을까.
“신녀님.”
“신녀?”
“신전에서 사람들이 나오면 손님을 그렇게 부를 것입니다.”
“내 이름은…….”
“손님의 이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런 것을 신경 쓰는 이들이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한 마뉘엘이 그녀에게 다시 말했다.
“저는 이 나라의 대공이자 신전과 대립 되는 위치에 있습니다.”
“신전과 대립?”
“그렇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랬다. 신전에서 황권에 간섭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마뉘엘이 황제의 후계자를 데리고 피신했다는 것이었다. 그의 사정을 들은 이실리스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신전에서 나를 데리러 오면 나는 가야 하는…… 가요?”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신녀님은 신전의 우위에 있는 사람. 원하시는 대로 하실 수 있습니다.”
단순하게 말하는 마뉘엘의 말에 이실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운 곳으로 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이미 적응한 이곳에서 벗어나 새로운 곳으로 간다는 것은 그녀에게 다른 스트레스를 줄 것이 뻔했다.
기억을 잃은 상태인 그녀는 스스로도 아슬아슬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도 같았다. 위태롭고 불안한 마음이 천천히 이실리스를 잠식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불안함을 고스란히 느낀 마뉘엘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잠시 흠칫하며 손을 빼내려고 했지만 마뉘엘은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따뜻한 온기가 닿아오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이실리스는 당황했다.
“불안해하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손님께서 신녀님이 확실하다면 이쪽에서도 목숨 걸고 지켜야 하니까요.”
“목숨 걸고?”
“네. 목숨을 걸고.”
단호한 마뉘엘의 말에 뭐라 말할 수 없는 감정이 실려있었다. 애달프기도 하고 분노에 찬 것 같기도 하고 애정이 담긴 듯한 그 감정에 이실리스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당황한 그녀가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자 신경 쓰지 않는 듯 마뉘엘이 그녀에게 물었다.
“밖에 나가 보시겠습니까?”
“밖에?”
“그렇습니다. 밖에.”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조금은 설레었다. 이곳에 도착해서 밖을 구경하는 것은 처음이었으니.
* * *
이실리스는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거리를 돌아다녔다. 활기찬 표정의 사람들이 그녀의 옆에서 걷는 마뉘엘에게 인사했다.
번거롭다면서 귀족의 마차를 타고 오지 않은 그를 반겨주는 제국민들이었다. 우리 대공 전하, 대공 전하, 하면서 부르는 그 목소리에는 충성심이 가득했다.
그 모습을 본 이실리스는 기시감을 느꼈다. 어디선가 저도 비슷한 모습을 본 듯한 느낌이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저를 향해 충성을 부르짖는 무리를 본 것 같았다. 회색의 로브를 둘러쓴 그들은…….
“대공 전하!”
마뉘엘을 부르는 그 목소리에 집중이 깨졌다. 멀리서 다가오는 사람에게 손짓한 그가 이실리스에게 양해를 구하고 잠시 멀어졌다. 멀어지는 마뉘엘의 뒷모습을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던 이실리스가 주위를 살폈다.
모르는 사람들과 모르는 거리. 밝게 웃는 사람들이지만 어딘지 낯선 이들. 그녀를 바라보는 사람들 하나 없이 다들 제 일에 바쁜 사람들. 바쁘게 어디론가 걸어가는 사람들에게 이끌려 이실리스도 걸었다. 마뉘엘이 기다리라고 했지만 걷고 싶었다. 이렇게 사람들 사이에서 걷다 보면 제게서 느껴지는 이질감도 사라질까 싶어서.
정처 없이 걷던 그녀는 사람들에게 휩쓸려 뒷골목으로 들어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두운 곳이어서 당황한 그녀가 골목을 막 빠져나가려던 찰나였다.
“이봐 아가씨!”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가씨라니…….’
설마 저를 부르는 소리일 거라고 예상도 하지 못했던 그녀가 계속 걸음을 옮길 때였다. 누군가가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남자들이었다.
“부르는 소리가 안 들려?”
“나를 부르는 것이었나…… 요?”
“그래, 여기 아가씨 말고 누가 있어?”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남자들은 그들 나름의 확신이 있어 그녀를 부른 것이었다. 고급스러운 재질로 이루어진 로브는 꽤 값이 나가는 것이었다. 거기다 호위하는 기사도 없는 귀족 여성. 세상 물정 모르는 귀족 아가씨가 놀러 나왔다가 길을 잃은 것으로 보였기에 남자들은 이실리스의 주머니를 털기로 했다.
“우리가 집안이 조금 어려워서 그러는데 돈을 좀 주면 좋겠네?”
“돈?”
“그래. 돈.”
남자들의 말에 이실리스는 당황했다.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지만 사정이 어려운 사람들이라고 하니 돈을 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에겐 돈이 없었다. 마뉘엘과 함께 나와서 아무것도 들고나온 것이 없었고, 그와 같이 나오지 않았어도 그녀의 수중에 돈이라는 것은 없었다.
이곳에서 사용하는 화폐도, 돈의 단위도 몰랐다. 그런 그녀에게 돈을 요구하는 남자들이라니.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이실리스에게 남자들이 다시 입을 열었다.
“쉽게 말해서 가진 것을 다 내놓으라고.”
“가진 것을?”
“그래.”
계속해서 오가는 말에 남자가 답답한 듯 그녀에게 다가서려 할 때였다. 남자의 뒤에서 나타난 검은 머리의 남자가 이실리스에게 접근하려는 남자의 뒷목을 후려쳤다.
“억!”
“뭐…… 뭐야!”
당황하는 다른 남자들도 검은 머리 남자의 주먹에 하나둘씩 쓰러졌다. 전광석화와 같은 움직임에 이실리스가 놀란 눈을 크게 떴다.
* * *
목걸이를 착용한 자가 다른 목걸이를 찾으려고 움직이면 공명하는 목걸이였다. 베르타스는 바닷가를 벗어나 목걸이의 진동을 따라서 계속 한참을 걸었다. 그런 그를 수호하듯 조심스레 뒤따라가는 알뤼르였다. 그러다 번개같이 튀어 나가는 베르타스의 움직임에 당황한 알뤼르가 서둘러서 움직였다.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는 귀족 여성을 희롱하는 듯한 무뢰배들의 말에 알뤼르의 표정이 구겨졌다.
“왜 그냥 지켜보고 있지?”
무뢰배들을 처리한 베르타스가 귀족 여성에게 말하며 다가섰다. 여성이 놀라 주춤하는 것을 본 알뤼르가 뭐라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바람이 흩날렸고 서둘러서 움직이려던 여성이 그 자리에서 발을 헛디뎠다. 베르타스가 그녀의 허리를 잡아 간신히 넘어지는 것을 면했다. 그녀의 얼굴이 드러났고 알뤼르는 터져 나오려는 놀라움을 삼켰다.
“폐……!”
“괜찮으십니까?”
서둘러서 달려온 듯한 다른 남자의 모습에 알뤼르는 이실리스를 부르려던 호칭을 속으로 삼켰다. 당황한 듯 보이는 남자가 여자를 향해 다가섰다. 순식간에 안도하는 표정으로 바뀐 이실리스의 얼굴을 보면서 알뤼르는 베르타스의 얼굴을 살폈다. 표정은 그대로였으나 꽉 쥔 주먹이 그의 분노를 대변하고 있었다.
‘폐하께서 대체…….’
베르타스는 눈앞에 보이는 장면에 입술을 깨물었다. 이실리스가 다른 남자와 눈앞에서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속에서 천 불이 이는데 저를 전혀 모르는 듯한 그녀의 표정에 더 화가 치밀었다. 헌데, 이전 같았으면 저런 이들을 가만히 두지 않는 그녀였는데 저런 놈들의 희롱에 놀아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이상했다.
목걸이의 공명을 따라가던 베르타스는 목소리를 듣자마자 알 수 있었다. 로브 안에 얼굴을 숨긴 여성이 이실리스라는 것을. 가차 없는 손속으로 움직인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감히 그녀를 향해서 입을 함부로 놀린 사람들을 용서할 수 없었다.
“나는 괜찮……아요.”
말투는 또 왜 저러한가. 어딘가 어색하게 들리는 그 목소리에 베르타스도 알뤼르도 눈을 크게 떴다. 남자의 시선이 그를 향하는 것을 느낀 베르타스가 삽시간에 표정을 바꾸었다.
“귀하신 분께 도움을 줘서 감사하군. 방랑 기사인가?”
자연스럽게 하대하는 남자는 이 나라의 귀족인 것 같았다. 이실리스의 상태가 이상하여 섣불리 나설 수 없었던 베르타스가 남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 어떤 상황인지 알아보고 검을 빼 들어도 늦지 않으니.
“그렇습니다.”
다른 자들에게 허리를 굽히는 것은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그것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를 낮추었던 그때를 기억하면서 베르타스가 그를 바라보았다. 잠시 생각에 빠졌던 남자가 베르타스를 향해서 물었다.
“혹, 이 나라 사람이 아닌가? 아, 너무 실례되는 질문을 했다면 미안하네. 이곳의 사람들과 다르게 생긴 것 같아서 물어봤으니.”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눈을 가진 베르타스를 향해 묻는 남자는 이미 그들이 외국인이라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오늘 이곳에 도착했습니다.”
“오늘?”
“그렇습니다.”
남자의 말에 베르타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생각에 빠진 듯한 남자의 모습에 베르타스는 기다렸다. 아무 말 없이 뒤에서 저를 바라보는 이실리스가 신경 쓰였다. 그녀의 성격대로라면 이미 그에게 무슨 반응이라도 보였을 것인데. 아무 반응이 없는 그녀를 보면서 베르타스는 입 밖으로 나오려는 말을 애써 삼켰다.
“혹시 머무실 곳이 없다면 함께 가시겠습니까?”
남자의 말이 떨어진 것은 그가 참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