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3화. (94/161)

93화.

베르타스의 말에 파브리스는 분노한 눈을 감출 수 없었다.

‘이자도 이실리스를 마음에 두었군.’

이렇게나 쟁쟁한 자들이 마음에 둔 이실리스는 그를 택했다. 그래, 그거였다. 베르타스가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이실리스가 그를 택한 것. 그러나 그녀는 지금 없었다.

“가지.”

바다 위에 떠 있는 해상제국이 보였다. 아주 거대한 바다 위에 떠 있는 땅. 원래대로라면 바다 아래로 가라앉아야 하는 대륙이 가운데에 빛나고 있는 마력석으로 인해 그 중심을 유지하고 있었다. 한 개가 아닌 여러 개의 마력석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멀리서도 보였다. 가장 눈에 띄는 빛은 붉은빛이 감도는 마력석. 이실리스의 마력과 같은 색을 띠는 것이었다.

그러나 뭔가 이상했다. 수평을 이루고 있어야 하는 바닥이 약간 기울어 있었다. 제국 위에 발을 올려놓았지만 불안함이 감돌았다.

“이것이…….”

“우리 제국의 문제지.”

한탄하듯 뱉은 그의 말에 베르타스는 눈을 감았다. 이런 곳에서도 이실리스의 마력을 탐하고 있다니.

‘그녀가 쉴 때는 언제인가.’

그와 함께 있을 때도 나라의 결계를 유지하는 그녀였다. 아니, 평생을 나라를 위해 마력을 바쳐야 하는 이실리스. 그런 자리가 좋은 건가 정말? 그 자리에 계속 앉아 있어야 한다고? 저는 그것을 보기만 해야 하고?

한순간에 구겨지는 표정을 바로 잡을 수가 없어 베르타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의 주먹에서 피가 흘러내리자 알뤼르가 서둘러서 마력을 일으켰다. 그에게 치유마법을 걸려는 알뤼르의 손을 가볍게 쳐낸 그가 파브리스를 향해 물었다.

“저 바다 너머엔 뭐가 있지?”

“제국 너머?”

“…….”

그것을 왜 묻냐는 그의 말에 베르타스는 답하지 않았다. 선황의 부군인 타르토스의 말에 의하면 그는 반드시 바다를 넘어야 했다. 그래야 그녀를 찾을 수 있었다.

“뮤르카 제국이 있지.”

“가는 방법은?”

“그곳에 왜 가려고……. 그렇군.”

무언가 짐작한 듯한 파브리스의 말에 베르타스가 눈을 찡그렸다. 저자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저곳으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그의 협조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마법사였다면.’

마력을 사용해서 바다를 그냥 건너갈 수 있었을 텐데. 그게 아니어서 아쉬웠다.

“마침 잘 됐군.”

“잘 돼?”

“해상제국에서 사신단을 파견할 때가 되었지.”

“그곳에 날 넣어 줘야겠군.”

“내가 왜?”

어깨를 으쓱하는 파브리스의 표정이 얄미웠다.

“이실리스의 용모파기는 우리도 갖고 있으니 우리가 찾으면 되는 것을.”

“그녀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데 그 나라를 다 뒤질 생각인가?”

“당연히.”

“가라앉는 나라를 끌어안고 제국민들이나 챙겨야 할 텐데?”

“그것은 그대가 신경 쓸 일이 아니지.”

절대 베르타스를 저 바다 너머로 보내줄 수 없다는 파브리스의 말에 그는 결심했다. 혼자 저 바다를 넘겠다고. 그의 눈짓을 이해한 알뤼르가 조용히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

“방법이 없겠나?”

“다른 마법사들을 모아보겠습니다.”

알뤼르가 함께 출정한 마법사들을 데리러 간 사이 베르타스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제국민들의 눈에 서린 두려움이 읽혔다. 그들의 땅이 언제 가라앉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불안해 보이는 사람들 사이로 베르타스는 걸었다. 그의 눈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놔!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고!”

“제국을 전복하려는 녀석이다. 끌고 가라!”

해상제국을 벗어나려고 했다가 잡혀가는 사람들이 몇몇 보였다.

“저런다고 통제되는 것이 아닐 텐데.”

그의 조용한 읊조림을 들은 누군가가 그의 팔을 살며시 쳤다. 시선을 돌려 옆을 바라보니 후드를 눌러 쓴 남자가 그에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런 말은 하지 않는 게 좋아.”

“왜지?”

“잘못 말했다가는 저렇게 될 수 있으니까.”

잡혀가는 사람들을 턱짓하는 남자의 눈은 어둑한 기운으로 물들어 있었다. 남자를 지긋이 바라본 베르타스가 그에게 물었다.

“왜 내게 알려주는 거지?”

“그러게.”

그냥 지나가던 사람의 참견이었다며 스쳐 지나가려는 남자를 잡았다. 베르타스를 의아하게 바라보는 남자에게 그가 눈짓했다. 그의 눈짓을 알아챈 남자가 베르타스와 다른 방향으로 멀어졌다. 그리곤 눈짓한 방향에서 다시 만났다.

“왜 불렀지?”

남자의 물음에 베르타스가 웃었다.

“불러 달라고 한 것 아니었나? 이걸 봤잖아.”

베루스 공작의 인장을 흔들면서 말하는 베르타스를 향해 남자가 희미하게 웃었다.

“베루스 가문 사람인 건가?”

“그렇지.”

“그 인장을 가지고 있으니…… 호의를 베푼 거지.”

아련한 미소를 짓는 남자의 얼굴에서 그리움이 묻어났다. 그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베르타스가 그에게 바짝 다가섰다.

“바다를 건너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바다를 건너? 조금 전에 그 꼴을 보고도 그 말이 나오나?”

해상제국을 벗어나려고 했다가 잡혀간 제국민을 보고 그 소리가 나오냐는 물음에 베르타스가 입을 열었다.

“나는 바다를 건너야만 해.”

“그렇다면 잘못 찾아왔군. 나에겐 방법이 없어.”

“저 바다 너머에 내가 찾아야만 하는 사람이 있다.”

“어쩌라고.”

어깨를 으쓱하는 남자에게 베르타스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 사람을 찾으면 이 해상제국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

“뭐?”

그렇다면 말이 달라진다면서 다가서는 남자를 향해 베르타스가 확신을 담아 속삭였다.

“그녀를 찾는다면 해상제국이 원래대로 돌아올 수도 있지.”

“그녀?”

“해상제국의 마력석이 문제가 아닌가?”

“그렇지. 찾는 사람이 라르헨의 황제 정도는 되어야…… 설마……?!”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베르타스를 보면서 남자가 헛웃음을 쳤다. 그 웃음을 바라보던 베르타스는 멀리서 저를 찾는 알뤼르를 보았다. 그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남자가 베르타스의 옷깃을 잡았다.

“어디서 묵고 있지?”

“아직 몰라.”

“그렇다면 좋아. 해상제국에서 제일 큰 보석상으로 찾아와.”

“보석상?”

“보석상.”

제대로 들은 것이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남자를 향해서 베르타스는 의문 어린 표정을 지었다. 때마침 알뤼르가 다가와 그가 잠시 고개를 돌린 사이 남자는 처음 등장했던 것처럼 홀연하게 사라져버렸다. 멀어지는 남자의 뒷모습을 잡을 수 없었던 베르타스가 알뤼르를 향해 물었다.

“나갈 수 있을 것 같나?”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해상제국을 떠날 수 있는 배들은 모두 압류되었고 남은 배가 없다고 합니다.”

“배가 없다고?”

“해상제국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것은 제독의 선함 뿐이랍니다.”

조금 전 보았던 남자의 말과 일맥상통하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방금 타고 온 배 이외엔 방법이 없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알뤼르가 참담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마법으로 날아가는 방법도 있지만…… 가늠할 수가 없습니다. 어느 정도 마력을 소비해야 갈 수 있는지.”

“그렇군.”

알뤼르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마법사들의 마력이 무한이 아닌 이상 그들도 마력을 조절할 필요가 있었다. 바다를 건너야 했다. 타르토스의 말에 의하면 이실리스는 분명 저 바다 너머에 있었다. 푸른 물결이 잔잔하게 흐르는 바다를 짙어진 눈으로 응시한 그가 알뤼르를 향해 몸을 돌렸다.

“보석상을 찾아야겠다.”

“보석상이요?”

“그래.”

그게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고 묻는 알뤼르의 말에 답도 하지 않은 채 베르타스가 걸음을 옮겼다.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보석상은 해상제국에 하나뿐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그들을 반기는 점원이 있었고 점원의 뒤에서 베르타스를 본 남자가 움직였다.

“생각보다 빨리왔군.”

“이쪽이 급해서.”

“정말로 저 바다 너머로 가면 해상제국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나?”

“그것은 내가 확답을 줄 수 있는 문제는 아니지.”

“그러면?”

“그 사람을 찾으면.”

베르타스의 말에 남자는 생각에 잠겼다. 그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가늠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다 알뤼르의 로브를 본 그가 눈을 반짝였다. 라르헨의 황실을 상징하는 로브를 몸에 두른 마법사인 알뤼르가 그와 함께 있자 일말의 가능성을 본 듯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입을 열었다.

“이든 저든 가능성이 있다는 말에 포기할 수는 없군.”

“배를 빌려주는 건가?”

“내가 빌려줄 것은 ‘배’가 아니야.”

“그럼?”

“잠수정이라고 불리는 거지.”

* * *

이실리스가 눈을 뜨자 어둠이 내려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는 그녀의 시야에 마뉘엘이 들어왔다. 옆에서 서류를 보고 있는 그를 보면서 몸을 일으켰다.

“정신이 듭니까?”

“…….”

저를 빤히 바라보는 이실리스를 향해 마뉘엘도 입을 다물었다. 그녀를 바라보던 그가 이상한 기분에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녀의 손에서 휘몰아치는 붉은 기운을 본 그가 놀란 눈으로 이실리스를 바라보았다.

“이것은……!”

그의 말을 들으면서도 이실리스는 반응하지 않았다. 어딘지 멍해 보이는 그녀의 표정에 마뉘엘이 당황하여 그녀의 어깨를 흔들었다.

“괜찮은 겁니까?”

“아…….”

“조금 더 쉬는 게 좋겠습니다.”

이실리스를 다시 침대에 눕게 한 그가 편히 쉬라는 말을 남기고 방 밖으로 나가자마자 그녀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다시 손바닥을 펼쳤다. 그녀의 손 위에서 흐르고 있는 붉은 기운을 눈여겨본 그녀가 속삭였다.

“나에게 뭘 원하니.”

그 붉은 기운은 그녀에게 화답이라도 하듯 움직였고 이실리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중요한 것을 잊은 듯한 기분이었다.

‘아니, 실제로 다 잊었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제 자신이 답답했다. 계속해서 들려오는 목소리도 신경 쓰였다. 그녀가 쓰러지기 직전 들었던 그 목소리는 도와달라는 말뿐이었다. 어디로 오라는 소리도 없었고, 무엇을 해 달라는 소리도 없이 무작정 도와달라는 말뿐. 대체 누구기에 이렇게 절실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도움을 청할까. 

‘이것 때문에 기억을 잃게 된 걸까.’

정답에 근접한 생각을 한 그녀였지만 이내 그 생각을 지웠다. 제가 생각하기에도 말도 안 되는 소리였기 때문이었다. 누군가 도움을 요청했다고 해서 기억을 잃다니. 그런 허무맹랑한 소리가 어디 있을까. 그래도 이실리스는 계속해서 그 목소리를 생각했다. 저에게 도움을 청한 이를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아니, 시시때때로 들리는 이 목소리를 해결하고 싶었다. 기억을 잃은 것만으로도 힘든데 계속 들리는 목소리라니. 자칫하면 정신을 놓을 수 있을 만큼 심각한 문제였다.

“어디로 가야 하는가.”

제게 도움을 요청하는 이를 구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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