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2화. (93/161)

92화.

이실리스는 자신을 마뉘엘이라고 밝힌 남자를 따라 어느 저택에 당도했다. 기억나는 것은 단 하나. 에리카라는 이름뿐이었다. 그것 외에도 아주 중요한 것이 있을 것만 같았는데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녀의 마지막 기억은 바닷속에 부유한 채 어떤 목소리를 들었다는 것. 그 목소리는 지금도 선명하게 들리고 있었다.

[나를 도와다오.]

남자를 따라 바닷가에서 저택으로 올수록 그 소리는 더욱 커졌다. 웅웅대는 소리가 아닌 그녀의 마음을 편안하고 부드럽게 울리는 그 목소리에 이실리스는 귀 기울였다. 그러나 도와달라는 말 외에 다른 말은 하지 않는 그 목소리에 그녀는 의아했다.

‘뭘 어떻게 도와달라는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여자들이 우르르 그녀의 방으로 몰려들어 정신없이 그녀를 재촉했다. 옷을 벗으라느니 씻어야 한다느니 하는 소리가 들렸고 한 여자가 그녀의 로브에 손을 대었다. ‘파츳’ 하는 소리와 함께 불꽃이 튀었다.

“죄…… 죄송합니다.”

그 자리에 엎드리는 여자를 무감한 눈으로 본 그녀가 여자를 향해 말했다.

“되었다. 일어나라.”

기품 어린 그녀의 목소리에 감동한 듯 눈물을 글썽이는 여자를 보면서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 알아서 하겠다.”

기억은 하나도 나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의 곁에서 부드럽게 떠도는 붉은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그 기운을 손으로 감아 장난치면서 로브를 벗었다. 전쟁을 위해 가벼운 옷차림을 한 이실리스였다. 거울에 비친 옷차림을 살핀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흠.”

그녀는 무슨 의도로 이 옷을 입었는지 모르지만, 사람을 내보내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저들이 그녀의 옷을 보고 어떤 말을 했을지 모르니. 

붉은 바람이 그녀의 뺨을 훑고 지나갔다. 마치 옷에 신경 쓰지 말고 저를 봐달라는 듯 움직이는 그 모습을 지켜본 그녀가 생각했다. 다른 무언가가 더 있을 거라고. 새하얀 머릿속이었지만 그녀는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자신이 중요한 것을 잃어버렸고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고. 그리고 이곳에서 아직 자신에 대한 것을 많이 드러내서는 안 된다고. 

‘준비되기 전까지.’

무엇을 위해서 그녀가 이곳에 기억을 잃은 채 도착했는지 알 수 없었으니 일단 차분히 정보를 얻기로 했다. 옷 위에 다시 로브를 걸치자 몸이 청량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 기분이 아니었다. 실제로 깨끗해진 제 얼굴을 본 이실리스가 웃었다. 편안했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매만지면서 이실리스는 주위를 살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고 이실리스는 편안한 시간을 보냈다. 기억은 없지만, 글자는 읽을 수 있었다. 신기하게 여기면서 책장을 넘겼고, 순식간에 읽어 내렸다. 한 권을 읽는 데 걸리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서재에 있는 책을 거의 다 읽은 그녀가 사람을 불러 정원으로 나가고 싶다고 말했다. 서재에서 내려다본 정원은 꽤 아름다웠기 때문이었다. 

천천히 걸어 나온 정원은 싱그러운 녹음으로 반짝였다. 꽃향기를 즐기는 그녀의 귓가에 바스락 소리가 들렸고 마뉘엘의 얼굴이 보였다. 가만히 서 있는 그에게 손짓했다.

“이리 와.”

그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달싹이는 입술을 보니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했다. 표정을 잠시 찡그렸다가 편 그가 말했다.

“영애는 예의가 없군요.”

“영애?”

“모르십니까?”

“그게 뭐지?”

제 말에 이상한 표정을 지은 그가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뜨는 것이 보였다. 

“배우셔야 할 게 많을 것 같습니다.”

한숨을 쉬는 마뉘엘을 보면서 이실리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가정교사가 붙었다. 일주일 후, 가정교사는 이실리스와 마뉘엘을 한 자리에 불러놓고 말했다.

“저는 이분께 가르칠 것이 없습니다.”

“뭐라고?”

가정교사의 말에 마뉘엘이 물었다.

“이미 모든 책을 섭렵하신 분께 제가 무슨 말을 합니까.”

자조 섞인 그 목소리에 마뉘엘의 얼굴이 이실리스를 향했다. 그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서재의 책을 다 읽어서.”

“책을 한 번 읽었다고 다 아는 법은 없습니다.”

“다 기억나는데?”

“네?”

“다 기억난다고.”

이실리스의 말에 가정교사가 답했다.

“사실입니다.”

벌써 몇 번이고 확인했다는 가정교사의 말에 마뉘엘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런 그에게 가정교사의 마지막 말이 떨어졌다.

“제가 아니고 예법 교사를 불러야 할 것 같습니다.”

영문 모를 얼굴을 하는 이실리스를 향해 마뉘엘이 입을 열었다.

“이제 영애가 뭔지 아십니까?”

“미혼 귀족 여자를 부르는 호칭?”

“다행이군요.”

뭐가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마뉘엘의 말에 이실리스가 빙긋 웃었다. 환하게 빛나는 그 얼굴을 마뉘엘은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그러다 고개를 흔든 그가 다시 물었다.

“그런데 왜 그전에는 몰랐습니까?”

“아, 서재에 있는 책들이 모두 역사와 전쟁에 관련된 책들이라 알 수가 없었…… 습니다?”

“습니다?”

“이게 아닌가.”

고개를 갸웃하면서 어색한 얼굴을 하는 이실리스를 본 마뉘엘이 웃었다.

“귀족 영애의 화법을 배우고 싶으십니까?”

“나는 불편하지 않으나 다른 이들이 불편해하는 것 같아서…….”

“배우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러나 조금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왜지?”

“손님께서 이곳에 있는 것을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기 때문입니다.”

이실리스가 마뉘엘의 저택에 있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의 저택에 있는 사람들은 입이 무거운 사람들인 데다 신원이 확실한 이들이었다. 이실리스를 교육한 가정교사도 그의 심복이었다. 

‘말하진 않았지만.’

감시하라고 보냈더니 오히려 그녀의 총명함에 감탄해서 돌아온 자에게 무슨 말을 할까. 기가 막혔다.

‘대체 뭐하던 여자인가.’

신전에서 작정하고 보낸 자라면 속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여자의 처세는 대단했다. 저를 빤히 바라보는 이실리스에게 희미하게 웃어 보인 마뉘엘이 그녀에게 다시 입을 열려던 찰나였다.

“그것은 내가 저것을 보기 때문인가?”

“네?”

“내가 저 붉은 기운을 보기 때문이냐고 물었다.”

이실리스의 입에서 나온 말에 마뉘엘이 눈을 크게 홉떴다. 그녀가 천천히 벽에 걸린 그림을 향해 다가갔다. 벽에 걸려있는 붉은 머리카락을 지닌 남자의 그림은 강렬하게 그녀의 머릿속에 박혔다. 붉은 머리카락에 붉은 눈동자를 지닌 남자의 그림. 그림 위를 떠돌아다니는 붉은 기운에 손을 대자 그 기운이 그대로 그녀에게 흡수되었다.

“이것은…….”

흔적도 남지 않고 사라진 붉은 기운을 찾아 이리저리 고개를 돌렸지만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네.”

“왜 그러십니까?”

“지금까지 보이던 것이…… 윽!”

깊게 생각하려니 머리가 아파 움직일 수 없었다. 깨질 것 같은 머리를 부여잡은 그녀가 줄을 잡았다. 밖으로 나간 사람들이 들어와 그녀를 보더니 놀라 소리를 질렀다.

“괜찮으십니까!”

“…… 흑!”

“대공 전하!”

마뉘엘이 당황하여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자 그의 기사가 그를 불렀다. 그제야 정신이 든 마뉘엘이 다급하게 말했다.

“의사를!”

“알겠습니다!”

밖으로 나간 여자가 신의 사자 어쩌고 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흘려보냈다. 설마 저것이 그녀를 지칭하는 말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이실리스에게만 들리는 소리가 커졌다.

[나를 도와다오. 아이야. 나를!]

커다란 소리에 이실리스가 주저앉았다. 가까이에 있는 의자에 앉아 숨을 고르는 그녀의 눈앞에 마뉘엘이 섰다.

“괜찮나?”

“머리가…… 흑!”

눈물이 흘렀다. 버텨보려고 했으나 버티기가 어려웠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은 채로 그녀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가득한 곳에 떨어졌다. 머리의 아픔보다 상실감이 훨씬 컸다. 그녀는 자신이 대체 누구였을까. 뭐 하는 사람이었을까. 그게 궁금했지만 자신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불안감을 감추기 위해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지금까지 아무렇지 않게 버틴 것만으로도 대단한 것이었다. 이실리스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고, 의자에서 떨어지려는 그녀를 마뉘엘이 받쳐 안았다.

“성력이…… 보인다고?”

황망한 표정으로 이실리스를 안고 중얼거리는 마뉘엘의 말을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 *

가서 조심해야 한다면서 신신당부하는 페일러스의 말에 베르타스가 눈을 찡그렸다.

“대체 몇 번을 말하는 겐가.”

“걱정이 되니 그러는 것 아닌가! 자네는 왜 이렇게 태평해!”

“내가 태평해 보이나?”

다시금 올라오는 오라를 잠재우면서 베르타스가 페일러스를 향해 말했다. 태평한 것이 아니었다. 침착한 척한 것뿐. 속은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내색할 수 없었다. 그가 불안해한다면 그와 함께 가야 할 알뤼르도 제대로 일을 할 수 없었을 테니까.

“아니, 아니라는 걸 알지.”

날카로운 베르타스의 기세에 페일러스가 입을 다물었다.

“자네는 황궁으로 가서 내 딸을 좀 지켜주게.”

“거기 괴물이 둘이나 있잖아!”

“그 둘은 내가 믿는 사람들이 아니야.”

선황도, 그의 부군도 믿을 수 없다는 베르타스의 말에 페일러스가 진지한 눈을 하고 그를 보았다.

“그럼 어쩌라는 겐가.”

“혹 상황이 잘못되면 에리카를 데리고 이곳으로 피신하게.”

“좋아.”

가볍게 말하는 페일러스의 말에 베르타스가 눈을 크게 떴다.

“너무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군.”

“그 정도 부탁은 들어줄 수 있지. 그러나 알지? 너나 이실리스가 돌아오지 않으면 에리카는 나와 내 어머니의 섭정 아래에서 성장하게 될 거야.”

“내가 말하는 의미를 모르나? 에리카를 보호하라는 것은 비상사태에 그렇게 하라는 거지, 지금이 아니야.”

“뭐?”

에리카의 주변을 철저하게 통제하는 두 사람에 의해 아무도 드나들 수 없었다. 베르타스의 기사들도 그 앞을 지키고 있었다. 사실상 에리카를 만날 수 있는 사람은 선황과 그녀의 부군, 메릴이라는 시녀장과 다한 경뿐이었다. 마주하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았다. 그것은 베르타스도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의 일은 아무도 모르는 법. 이실리스와 같은 상황이 벌어지게 할 수는 없었다.

“부탁하네.”

“좋아.”

고개를 끄덕이는 페일러스와 인사를 나누고 베르타스는 걸었다. 그 뒤를 알뤼르가 따랐다. 둘을 배웅하는 페일러스를 뒤로하고 앞에 놓인 배에 올라타니, 기다리는 또 다른 사람이 있었다.

“늦었군.”

“출발하시죠.”

알뤼르가 그를 보자마자 말했다. 베르타스가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니 알뤼르가 소개했다.

“해상제국의 제독이십니다.”

“아, 그 이실리스를 사라지게 만든?”

비꼬는 그의 말에 파브리스의 눈초리가 차가워졌다가 변했다. 중요한 것은 이자가 아니고 이실리스였으니. 그녀를 찾지 못하면 해상제국은 바다로 가라앉는다.

“황제의 이름을 국부가 함부로 부르다니.”

“그러니 국부가 된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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