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1화. (92/161)

91화.

지금까지의 상황을 들은 베르타스가 얼굴을 굳혔다. 그의 얼굴을 본 알뤼르가 허리를 숙였다.

“면목 없습니다.”

“잘잘못을 따지자고 온 것은 아니지. 이실리스를 찾아야 할 게 아닌가.”

“아직도 폐하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해상제국으로 넘어가는 바다 위를 마법사들이 샅샅이 뒤졌지만 발견하지 못했다. 지금도 알뤼르를 제외한 다른 마법사들은 제독의 협조를 받아 해상제국 곳곳의 바다를 뒤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실리스는 발견되지 않았다. 알뤼르의 얼굴에 체념이 드리워지자 베르타스가 입을 열었다.

“죽지 않았다.”

“네?”

“이실리스는 죽지 않았다고.”

소드마스터의 존재 맹세는 이실리스가 죽었다면 베르타스도 그 자리에서 절명했어야 맞다. 그가 살아있다는 것은 이실리스가 어딘가에 살아있고, 생명의 위협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목걸이가 작동하지 않았지.’

그랬다. 그녀의 목에 걸려있는 마법무구는 위험에 처하면 다른 목걸이를 지닌 사람에게 이동시켜주는 것. 그의 곁에 그녀가 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그녀가 무사하다는 방증이었다. 그래서 일이 더 어려워졌다. 안전한데 왜 돌아오지 못하는 것인가. 그게 의문이었다. 그러나 베르타스는 내색하지 않고 알뤼르에게 다시 말했다.

“그럼 다른 이들은 해상제국에 있나?”

“그렇습니다.”

“그대만 여기 온 것이고?”

“국부께서 오신다고 하여 왔습니다.”

바로 가보고 싶었지만 페일러스를 만나야 했다. 그를 만나서 정확한 정보를 얻어야 일이 제대로 파악이 될 듯싶었다.

“배를 타고 왔나.”

“그렇습니다.”

“페일러스를 만난 뒤에 바로 출발하도록 하지.”

“대공전하…… 말입니까?”

정보길드를 운영하는 페일러스의 실체를 알지 못했던 알뤼르가 되물었으나 베르타스는 그 물음에 답하지 않고 거침없이 걸었다. 페일러스가 운영하는 주점 앞에 선 그가 주점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언젠가 보았던 바텐더가 그에게 인사하면서 바로 본론을 이야기했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어디 있지?”

“이쪽입니다.”

바 뒤의 벽을 여는 바텐더를 따라 들어갔다. 뭔가 묻고 싶은 표정인 알뤼르였지만, 베르타스는 그의 궁금증을 풀어줄 만큼 친절한 성격이 아니었다. 거기다, 지금 그의 인내심은 바닥나기 직전이었기에 알뤼르에게 뭐라 말하지 않았다. 이야기를 꺼내면 그를 질책할 것만 같아서였다.

“베르타스.”

“페일러스.”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마주한 두 사람이 자리에 앉고 알뤼르도 그 옆에 앉았다. 어두 컴컴한 밀실엔 촛불 하나만이 켜져 있었다. 벨벳 의자에 앉은 베르타스가 페일러스를 향해 말했다.

“자료는?”

“여기.”

이토르트로 출발하기 전에 해상제국과 라르헨의 관계를 알아봐 달라고 부탁한 베르타스에게 페일러스가 자료를 내밀었다. 천천히 자료를 읽어내려간 베르타스의 얼굴이 굳었다.

“이게 뭐지?”

“본 그대로야. 베르타스. 이실리스는 해상제국에 마력을 보충하기 위해 간 거다.”

“대체 그녀가 왜!”

소리를 버럭 지르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베르타스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가 통제하지 않은 오라가 그의 몸 주위에 피어오르자 페일러스가 서둘러 말렸다.

“여기서는 안 돼. 베르타스. 안 된다고!”

새로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면서 울상을 하는 페일러스를 향해 베르타스가 분노 어린 시선을 돌렸다.

“지금 장난하나? 이실리스는 행방을 알 수 없는데?”

“그게 아니라, 마음을 조금 가라앉히게. 흥분해서 좋을 것은 하나도 없네.”

“그건 나도 알아!”

오라가 폭사 되면서 방안의 집기를 부쉈다. 사람은 건드리지 않고 지나가는 날카로운 기세에 페일러스가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알뤼르도 마찬가지였다. 이토르트 항구인 것을 잊고 마법을 일으키려다가 오히려 반작용으로 인해 속이 엉망이 되었다. 목 끝까지 올라온 핏물을 삼키면서 알뤼르가 아무렇지 않은 듯 표정을 바로 했다. 그러나 입가에 흘러내리는 피는 숨길 수 없었다. 페일러스가 손수건을 건넸고, 그의 모습을 본 베르타스도 기운을 갈무리했다.

“미안하군.”

베르타스의 말에 페일러스가 손을 내저었다.

“되었네, 자네 심정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니까.”

여기서도 똑같았다. 이실리스의 마력에 기대서 살아남다니. 해상제국? 라르헨만으로 부족해서 해상제국까지 그녀의 마력에 기대어 살고 있다는 소리에 베르타스는 이를 악물었다. 대체 라르헨에 걸쳐있는 국가들이 몇 개인 건가. 

‘이실리스는 왜 이들에게…….’

뻔했다. 라르헨의 이득을 위해서. 이실리스 개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제국을 위해서. 오로지 라르헨을 위해서 살아가는 그녀의 행동에 베르타스는 한숨이 나올 것만 같았다. 이제는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나. 언제까지 제국을 위해 희생하는 황제가 되어야 하는 것인가.

‘차라리 힐렌튼의 황족들처럼 탐욕스럽기라도 할 것이지.’

이실리스는 사재를 모은 적이 없었다. 라르헨의 황제인 그녀에게 부족한 것은 없었지만 그녀는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물욕이 없었다. 아름다운 보석도 좋아하는 법이 없었고, 마력석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관심을 두는 금은보화가 없어 무언가를 선물할 때도 늘 고민이었다. 그녀 자신을 위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개인 창고가 이렇게 비어있는 황제는 처음이라면서 시녀장과 시종장이 말하는 소리에 베르타스가 직접 그녀의 창고를 채웠다. 그랬는데 라르헨을 위해서만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제국에게도 그랬다니. 라르헨만이 아니었다니.

“진정하게, 베르타스.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잖나.”

“그렇지 중요한 것은 이게 아니지.”

“해상제국에서 일이 생겼다는 소리를 듣고 제일 먼저 조사했지. 혹시 그들이 이실리스에게 위해를 가했을 것이 두려웠네. 그랬는데 그들은 아니야. 이실리스의 마력이 없다면 해상제국은 가라앉을 걸세.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네. 길어야 일 년. 그 안에 이실리스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그 제국은 망해.”

“그렇다면 해상제국은 아니라는 소리로군.”

“해상제국의 제독은 이실리스와 오랜 친우야. 그러니 해가 될만한 일은 하지 않았을 걸세.”

“그럼 누구지?”

페일러스와 베르타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알뤼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정말 사고가 맞는 것 같았습니다.”

“그게 말이 안 되니 이러는 거지.”

베르타스의 반박에 알뤼르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다시 속삭였다.

“저도 봤습니다. 어떤 이상한 힘이 폐하를 끌어당겼습니다.”

“뭐?”

“바닷속으로 빠지는 속도가 달랐습니다. 어떤 힘이 폐하를 잡아당기는 것처럼 빠르게 움직였습니다.”

알뤼르의 말에 페일러스가 다급하게 물었다.

“어느 방향으로 가던가!”

“적어도 해상제국은 아니었습니다.”

“이런……!”

탄식하듯 나온 페일러스의 목소리에 베르타스가 그를 돌아보았다.

“왜 그러나.”

“서둘러야겠네. 베르타스. 이실리스가 해상제국이 아닌 다른 나라로 간 것 같아.”

“다른 나라?”

지도를 펼친 그가 라르헨의 바다 너머에 있는 대륙을 가리켰다.

“여기, 뮤르카 제국.”

“뮤르카 제국?”

“그렇다네. 내가 왜 이 나라에 대해서 아는지 궁금하지 않나?”

“소식통인 자네가 그렇게 말하다니…… 제국에 뭔가 있나?”

“이 제국으로 들어가는 마법사들은 전부 실종됐다네.”

“실종?”

* * *

마뉘엘 뮤르카. 뮤르카 제국의 대공이자 황제의 사촌인 그는 데려온 여자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붉은 머리카락에 군청색 눈동자.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여자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러나 그녀가 가진 분위기. 그 고압적인 분위기는 가히 그녀의 신분을 짐작케 했다.

“귀족임이 틀림없어.”

그것도 그냥 그런 귀족이 아닌 고위 귀족.

“기억을 잃은 척하는 것인가, 아니면 정말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는 건가.”

그가 그 바닷가에 나간 것은 마음이 심란해서였다. 신탁을 들었다면서 대신관이 황제에게 찾아와 속살거렸고, 신전에서는 연일 신의 사자를 위한 기도를 하고 있었다. 자연히 신도들이 몰렸고, 그 신도들은 신전을 위해 돈을 냈다. 기부라는 명목하에 합법적인 돈벌이를 하고 있는 신전을 생각하니 속이 답답했다. 

뮤르카 제국을 움직이게 하는 신력은 신전에서 나오는 것. 부패한 신관들의 신성력이 아니면 제국을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신전이 가지고 있는 권력, 그중 돈을 받고 신력을 넘기는 부정한 신관들의 행태는 도를 넘어 황권마저 위협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뮤르카 제국의 상황은 아주 위험했다. 그런 상황에서 바닷가에 등장한 여자.

“대공 전하. 손님께서 정원으로 나가고 싶다 하십니다.”

“정원?”

“그렇습니다.”

방에 있은 지 일주일이 흘렀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책을 들여다본다는 소리에 마뉘엘은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직접 움직이기를. 과연 신전에서 보낸 첩자가 맞을까. 마뉘엘 자신을 노리고 있는 부패한 신관들이 보낸 첩자인 걸까. 첩자라면 왜 바닷가에 드러누워 있었을까. 궁금했지만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에리카라고 밝힌 여자는 거의 입을 열지 않았다.

“그것도 계획의 일부라면 머리가 좋군.”

“네?”

“아니, 원하는 대로 해 주도록.”

“알겠습니다.”

정원은 이곳에서 가까운 곳이었다. 나가서 살펴볼 생각에 마뉘엘은 움직였다. 붉은색의 머리카락이 조금 걸리기는 했지만. 뮤르카 제국에서 황족만이 가질 수 있는 머리칼 색, 그리고 성력을 상징하는 색깔이었다. 뮤르카 제국의 주신인 보클로엠의 색. 그랬기에 처음 그녀를 본 사람들도 그녀의 앞에 무릎 꿇었다.

‘그것을 당당하게 받아들이는 태도도…….’

한몫했다. 저게 연기라면 정말 대단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여자의 자연스러운 태도에 감탄했다. 지금도 보라. 정원을 천천히 걷는 여자의 모습에서 우아함과 고아함이 묻어나왔다. 일개 신관이 가질 수 없는 태도였다. 일반 귀족도 마찬가지. 

‘고위 귀족 중에 머리카락이 붉은 이는 없었으니 정말 신의 사자인가.’

생각을 거듭하다 잘못 움직여 옆의 수풀을 건드렸다. 기척을 눈치챈 여자가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을 보았는데도 허리를 숙이지 않는 여자의 태도에 사용인들이 숨을 들이켰다. 그의 뒤에 있던 호위기사가 검을 빼 들려는 것이 느껴지자 손을 들어 말렸다. 지금도 그랬다. 그의 눈빛을 정면으로 받고 태연할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었다.

“왜 그러고 서 있지?”

여자가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하대에 마뉘엘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그녀에게 알려줄 필요가 있었다. 제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

“이리 와.”

허나, 그녀가 그에게 나비 같은 모양새로 손짓했다. 

그 우아한 움직임을 마뉘엘은 거절할 수 없었다. 마치 신의 부름을 받은 것처럼 그는 그녀의 손짓에 속절없이 끌려가서 그녀의 앞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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