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알현실에서 물러나는 베르타스에게 타르토스가 눈짓했다. 알현장 밖으로 나오니 귀족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었다. 황제 폐하께서 살아계시는 게 사실이냐느니 하면서 묻는 그들에게 베르타스는 아무 말도 남기지 않고 멀어졌다. 복도의 끝자락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는 타르토스에게 다가갔다.
“이실리스를 찾으려면 바다를 건너야 할 거다.”
“바다를 말입니까?”
“그래.”
무언가 알고 있는 듯한 타르토스를 보면서 진지한 눈으로 베르타스가 물었다.
“혹, 알고 있는 것이 있습니까?”
“이실리스를 찾게 되면 자연히 알겠지만…… 데려오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 아이는 초대 황제의 재림이라고 불릴 정도로 비슷한 마력을 지니고 있는 아이니까.”
“그렇다면…….”
“라르헨 황족은 누구 하나 편한 길을 가는 사람이 없군.”
자조 섞인 목소리로 말하는 타르토스의 말에 짙은 후회가 묻어났다. 잠시 한숨을 내쉰 그가 베르타스에게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말해줄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바다를 건너라. 그렇다면 이실리스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무슨 의도로 이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믿어보겠다. 그녀를 찾을 수만 있다면 어디든 가야 했으니까. 바다 건너의 세계라니. 상상도 하지 못했던 세계지만 베르타스는 눈을 빛냈다. 이실리스를 찾기 위해서라면 가지 못할 곳이 없었다.
“해상제국의 협조를 얻어야 할 거다.”
“그들은 당연히 협조해야 할 겁니다.”
“그래야 하겠지.”
눈짓을 주고받는 그 둘의 사이에서 묘한 기류가 흘렀다.
“성인이 돼서는 바다로 나가지 말라고 했는데.”
타르토스의 혼잣말에 베르타스가 입을 다물었다. 인사하는 베르타스를 향해 손을 내저은 타르토스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와는 반대 방향으로 베르타스는 걸었다.
“사람을 골라야겠어.”
그래야 했다. 이실리스를 찾기 위해서 함께 갈 누군가가 필요했다. 힐렌튼부터 함께한 그의 신하 중 제대로 된 사람들을 추릴 생각이었다. 라르헨의 사람은 누구도 믿을 수 없었다. 이번 기회를 틈타 이실리스를 없애려고 들 수도 있었으니.
이실리스가 자리에 없는 틈을 타서 득달같이 들고 일어나는 귀족들의 행위에 환멸이 일었다. 그들은 타르토스와 선황의 압박에 조용히 입을 다물었지만, 그들이 언제까지 잠자코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귀족들의 수작은 눈에 보이듯 뻔했다. 이실리스는 사라졌고 남은 황족은 어린 딸 하나. 그 황족을 손에 쥐는 자가 권력을 쥘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에리카가 있는 곳의 문턱을 넘으려는 귀족들의 행태에 다한이 검을 빼 들고 나섰다.
“접근한다면 베겠습니다.”
서슬 퍼런 기세로 황태녀의 방문을 지키는 다한의 행동에 누구도 반박할 수 없었다. 그의 뒷배에 있는 베르타스 때문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선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황궁에 머무르게 된 타르토스는 다정한 가면을 벗어던졌다. 날 선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는 타르토스에게 적응하지 못한 귀족들이 반발했다가 그의 마력에 입을 다물었다.
“내 손녀를 보고 싶다면 아일라의 허락을 받고 와라.”
당연히 허락은 떨어지지 않았다. 에리카가 있는 곳은 철저하게 통제되었고, 누구도 허락 없이 아이를 만날 수 없었다. 아이를 잃은 경험이 있는 선황의 안배였다. 라르헨의 황성이 어느 정도 안정된 듯한 모습을 보이자 베르타스가 움직였다.
“에리카.”
“아빠!”
그를 부르면서 달려오는 딸아이의 모습에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철저하게 통제된 상황에서 이실리스가 사라진 것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그의 딸이었다.
“어디 가?”
“어딜 다녀오려고 한단다. 전에 내가 한 말은 잊지 않았지?”
“다한 옆에 붙어 있어?”
“그래. 그거란다.”
에리카의 보드라운 뺨에 얼굴을 비빈 베르타스가 아이의 뺨에 입술을 내렸다. 그의 얼굴에 ‘쪽’ 소리가 나도록 뽀뽀를 남긴 에리카가 말했다.
“내가 잘 지킬게!”
“지키지 않아도 된단다. 네가 안전해야지.”
겹겹이 보호 마법이 걸린 마법 반지가 아이의 목에 걸려있는 것이 보였다. 에리카의 것을 빼앗았다고 이실리스가 떠나기 전 만든 것이었다. 그것을 보니 울컥하는 마음에 베르타스는 말을 잇지 못했다.
“에리카.”
북받쳐 오르는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베르타스는 아이를 끌어안았다. 따뜻한 아이의 온기가 그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아이를 강하게 끌어안은 그가 결심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돌아오면 저 결계를 없애 버리겠다. 이실리스와 에리카에게 똑같은 속박의 굴레를 씌워줄 수는 없었다. 아이의 어깨 위로 베르타스의 눈이 결연하게 빛났다. 나오지 않는 그를 이상하게 여긴 다한이 들어와 그를 찾을 때까지.
출정 당일, 사람을 추리는 그를 본 타르토스가 한마디 했다.
“다 데리고 갈 수 없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이토르트 항구까지 저들 모두 가면 마력이 부족하다. 보낼 수 있는 것은 너 하나다.”
“말도 안 되는!”
“가서 그곳의 마법사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잘라 말하는 타르토스의 어투엔 뭐라 말할 수 없는 것이 느껴졌다. 마력이 부족하여 베르타스만 보낸다는 것은 거짓인 것 같았다. 그러나 다른 이들과 함께 가지 말고 혼자 가라는 그의 말엔 뼈가 있었다. 아무도 믿지 말라는 방증과 같았다.
타르토스의 말이 맞았다. 이실리스의 부재로 인해 라르헨은 지금 혼란한 상태였다. 그 안에서 반란을 획책하는 이들도 나타날 것이고 새로운 시작을 꿈꾸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어떤 일이 발생하기 전에 선황 부부가 나타나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들이 서둘러서 자리를 잡아준 덕분에 베르타스가 한숨 돌릴 수 있었으니. 그들이 없었다면 이실리스를 찾으러 가는 길은 더 늦어졌을 게 뻔했다.
‘그랬다면 지금 출발할 수도 없었지.’
그의 곁에 베루스 공작이 다가섰다.
“이것을 가지고 가십시오.”
베루스 공작이 내민 것은 그의 인장이었다.
“이걸 왜…….”
“해상제국에 집안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곳이 있습니다. 그것을 보여주고 도움을 요청하면 한 번은 들어줄 겁니다.”
“그렇게 중요한 거라면 자네가 쓰지 그러나.”
“아니, 폐하를 찾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녀가 죽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나?”
“저는 폐하의 진명을 지키는 자. 폐하께 변고가 생겼다면 가장 먼저 눈치챌 수 있는 사람입니다. 소드마스터의 맹세를 한 국부께서도 똑같은 상황 아닙니까?”
나지막한 목소리로 묻는 베루스 공작의 말에 베르타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실리스가 실종되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놀라긴 했어도 황망하거나 슬프지 않았던 것도 그 이유였다. 분명 어딘가에 살아있을 것이니까. 마력이 강한 그녀라면 금방 라르헨으로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그리고 일주일이 넘어서자 정말 크게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녀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설마 어릴 적처럼 마력을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한 것인가. 대체 무슨 상황인 것인가. 알 수 없으니 더욱 답답했다. 그런 그의 마음을 알기라도 한듯 모든 것은 서둘러서 진행되었고 드디어 베르타스는 타르토스와 아일라가 마련해 준 마법진 위에 섰다.
“그대에게 이런 부탁을 하게 되어 미안하다.”
“선황의 부탁이 아니었어도 저는 나섰을 겁니다.”
“부디 무사히 나의 아이를 데려와다오.”
“알겠습니다.”
그에게 구구절절 말하는 선황의 말이 듣고 싶지 않았다. 이실리스가 외로웠던 어릴 적엔 그녀를 방치하더니 이제 와 부모 노릇을 하려는 것인가. 그러다가도 그들이 라르헨을 통제한 덕분에 큰일이 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면 분노가 가라앉았다. 오락가락하는 기분을 애써 내리누르면서 베르타스는 생각했다.
‘이실리스가 없어서 그런 거다.’
그래, 그녀가 내 곁에 없어서 벌어진 일. 이 모든 것을 해결하려면 그녀를 찾으면 된다. 마력을 발동시키는 것을 느끼면서 베르타스가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뜬 그의 앞에 알뤼르가 서 있었다.
“오셨습니까.”
이를 악물고 말하는 그의 모습에 진한 슬픔이 드러나 있어 베르타스는 다시 눈을 감았다. 이실리스를 찾아야 했다.
* * *
[나를 도와다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실리스는 떨어지지 않는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녀의 몸 위를 바닷물이 훑고 지나갔으나 물에 젖지 않았다. 알뤼르의 여러 마법이 걸려있는 로브가 그녀를 구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알뤼르의 걱정이 그녀를 살렸다. 일어서려고 했으나 힘이 없었다. 간신히 팔에 힘을 주어 앉으려고 하였으나 버티고 있을 수 없었다.
“여긴 어디인가.”
처음 보는 풍경이었다. 모든 것이 새로운.
“아니, 그보다…….”
이실리스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새하얗게 변한 머릿속을 뒤졌다. 그러나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유일하게 떠오르는 것은 단 하나, 어떤 이름뿐이었다.
“저기 사람이 있습니다!”
어디선가 외치는 소리에 이실리스는 시선을 돌렸다. 바닷바람이 흩날려 그녀의 로브를 살짝 건드렸고 로브의 후드가 넘어가면서 그녀의 얼굴을 드러냈다. 로브 밖으로 쏟아지는 붉은 머리카락에 달려오던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멈추었다. 이실리스 또한 그들을 보면서 본능적으로 자리를 피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움직이지 않는 몸을 어찌할 수 없었다. 어수선한 사람들 사이로 이실리스와 비슷한 붉은 머리카락을 지닌 남자가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 역광으로 인해 남자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바로 앞까지 거침없이 걸어온 남자가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나는 마뉘엘이라고 합니다. 그대의 이름은?”
“…….”
“말을 하지 못합니까?”
아무런 대답이 없는 이실리스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 남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해 보이는 그의 눈동자를 그리고 그의 몸에서 풍기는 기운을 읽은 이실리스가 앉은 채로 입술을 달싹였다.
“에리카.”
“만나서 반갑습니다.”
허리를 숙이는 남자를 향해 이실리스가 손을 얹었다. 귀족의 예법 그대로 손을 올리는 그녀를 향해 남자가 눈을 휘며 웃었다.